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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9화 (59/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9화

“저는…… 저는 당신께 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받기만 하였는데.”

“그런 말은 굳이 할 필요 없다. 이미 다 아는 말이니.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순간을 그런 걸로 허비할 순 없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여율령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그의 말이 뇌리에 한가득 들어찼다.

‘내가 원하는 건 너밖에 줄 수 없지만, 내가 멋대로 가져갈 수도 없고, 네가 원한다 해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긴 세월. 내 안에서 잊힐 듯 말 듯, 결국 잊히지 않던 말.

단순하게 생각하면 단순한 문제였다. 상서령이자 금국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여씨 가문의 가주가, 비쩍 말라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어린애에게 받을 것 따위 과연 있기나 했을까. 그런 게 정말로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물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 당신께서 원한 것이 혹, 제 마음이었습니까?”

마음.

나밖에 줄 수 없지만, 그가 멋대로 가져갈 수 없는 것. 상선조차 가는 길을 알지 못하기에 분명 내 것이지만 옜다 하고 내줄 수 없는 것.

여율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묘하다 못해 허탈한 낯이었다.

“너무 오래 머물렀던 게지. 본래 이렇게까지 길게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오래 끌었는지 결국 이리되고 말았구나.”

그의 말은 이상했다. 마치 이리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화야. 세상에는 말이다.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는 평범한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지. 선과 악은 구분하지 않으나, 제게 속하지 않은 것은 밖으로 밀어내고 배척하려는 성질이 있다.”

여율령이 끌끌 혀를 찼다.

그를 알고 난 이래 꾸준히 느껴온 위화감이 정점을 찍었다. 있을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일인데, 여율령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여율령이니까.

넋 나간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평소처럼 해죽 웃은 여율령이 가느다란 기침을 토했다.

“시간이 됐구나. 이제 정말 가야 하려나 보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어린애처럼 도리질 쳤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이화야.”

“…….”

“오래 살거라.”

내 삶의 끝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말했다.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삶은 지금 이 순간까지였다.

“오래 살고 늦게 오렴. 네 후회 없을 만큼 살다가…… 그렇게 내게 오려무나.”

그때도 내 다시 마중을 나가마. 우리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부디 그땐 네 애틋한 임 두고 오란다고 밉게 보지 말고, 내 손을 잡아주겠느냐?”

다시 아버지라 불러주겠느냐?

토담 사이사이에 핀 꽃처럼 침묵 속에 숨겨진 말은 귀가 아닌 가슴에 피었다.

“예. 그리…… 흐윽, 그리하겠…….”

“이화야.”

“흐윽. 흐으, 예.”

기다려도 말이 없었다. 거기서 더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불러도 역시 대답이 없다.

“아버지?”

그게 마지막이었다.

여율령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온화하게 웃는 낯으로 눈을 감은 그를 나는 내려다보다, 하염없이 보다, 그 몸 위에 엎드러져 울었다. 처절한 울음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 * *

상서령 여율령이 죽었다. 죽인 자는 행방불명되었던 2황자 시묵으로, 여율령이 집행관의 몸임에도 시험에 개입하여 부정을 저지른 것에 앙심을 품었다고 증언했다.

2황자는 도망하던 중 일류 무사로 구성된 흑의인의 무리와 맞닥뜨렸다. 우리가 마주한 무리와 같은 녀석들이었다. 그들을 뿌리치고 도주하는 과정에 거느렸던 가신 대부분과 신체의 일부를 잃었다.

그 모두를 여율령의 짓이라 생각한 2황자는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있는 건 심증뿐인데도 그러했다. 시험 초반에 일어난 여율령의 작은 개입과 그에 대한 불신이, 시험을 치르는 내내 그를 따라다니며 눈덩이처럼 불어난 결과였다.

허망하고 허탈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절대 여율령의 수가 아니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무뢰배 같은 것들이라면 천박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였다.

하나, 2황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거다. 저렇게 불어난 의심의 덩어리는 분명한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어도 그 증거를 의심한다.

눈에 핏발이 선 채 끌려가는 내내 소리를 지르는 2황자를 보다 눈을 감아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이미 의미가 없었다.

이번 일의 유일한 득은 제삼세력의 개입에 대한 확신이었다. 사실 득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게 말하기엔 실이 너무나 컸다.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여율령이 죽었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떠올라 뇌리에 맴돌았다.

2황자는 지하 뇌옥 깊은 곳으로 끌려갔다. 황궁은 뒷수습과 진상 조사로 들썩였다. 금의부 인간들이 눈이 벌게져서 돌아다니자 관리들은 알아서 숨을 죽였다. 2황자는 아무 잡음 없이 황궁 한복판의 연회장에 당도했다. 내부에서 도와주는 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륜은 천태백산에서 나타난 무리에 대해서도 뒤늦게나마 조사를 명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성과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정체불명의 세력이 개입했음을 안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상실감에 절대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 * *

여율령의 죽음 이후. 내 울음을 들은 무륜이 문을 열었다. 나는 엎드러져 울다가 곁눈에 비친 그를 보고 손을 뻗었다.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저 좀, 저 좀 안아주세요, 폐하.”

일말의 주저도 없이 뛰어들어 온 무륜이 나를 끌어안았다. 아니, 아예 품에 안아 올렸다. 시간이 역행했다. 나는 5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악몽에 시달리는 나를 밤마다 어르고 달랬던 품이 다시 한번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아픔이 가시질 않았다. 설움도 떨치지 못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륜으로도 채워지지 못할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울고 또 울었다. 몸 안의 수분이 다 가시도록 목 놓아 울었다.

무륜과의 마지막 날이자 여율령과의 첫날과 같이, 나는 여율령과의 마지막 날을 절감했다.

반쯤 탈진해 늘어진 나를 무륜이 도닥였다. 어깨며 가슴팍이 온통 젖어 들어도 저어하는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내가 겨우겨우 진정했을 때, 그는 다정하고 침통한 어조로 여율령의 시신을 수습하겠다 했다. 정중하게 모시겠노라는 말에 짓무른 눈가가 떨렸다. 금군들이 들어와 비단 장포로 시신을 감쌌다. 밖으로 옮겨지는 여율령을 차마 보지 못하고,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무륜은 밀영단의 장포를 빼앗아 내 위에 씌웠다. 두 겹, 세 겹, 한여름의 더위를 느낄 수 없는 몸을 단단히 둘러 궁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자개함의 일 이후 쭉 빛 없는 공간을 두려워했다. 한데 지금은 그 공간마저 아늑하게 느껴질 만큼 나는 한기에 떨었다.

그래서 더더욱 맞닿은 온기에 매달렸다. 손가락을 갈퀴처럼 오므려 그를 잡고 놓지 않았다.

“그래. 내 예 있다. 예 있어.”

무륜은 연신 내 등을 도닥거렸다.

처소에 당도하자마자 그는 두꺼운 발을 내리고 모든 사람을 물렸다. 둘만 남은 방. 그가 나를 침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장포를 헤쳐 나를 꺼냈다. 어둠이 걷히고 그의 낯이 다시 보였다. 그 순간, 빛살 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여율령은 그나마 내게 말이라도 남기고 죽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남길 수 없다. 중독에 대한 것도, 죽음에 대한 것도, 아무것도 모르길 바라며 떠나려는 것이니.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미처 붙잡지 못한, 붙잡을 수 없는 마음이 멋대로 튀어 나갔다.

“폐하. 저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흑월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제 상처에 급급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는 날 막아줄 수 있었을까.

놀람으로 크게 뜨이는 무륜의 눈이 흐린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렇게 모호함을 싫어했으면서 그에겐 항상 모호한 선을 그어 놨었다. 입으로 연모의 정을 말하지 말 것. 입맞춤까진 괜찮지만 그 이상은 피할 것. 껴안기는 하되, 심장 소리가 들킬 만큼 꽉 안지는 말 것. 전부 소리 소문 없이 떠나겠다 마음먹은 탓이다.

“내, 첫눈 오는 날 대답하라 이르지 않았느냐.”

그때면 저는 이미 죽고 없습니다.

“첫눈은 너무 멉니다.”

넌 망설에 재주가 없으니 잘라낸 진실을 말하렴. 이것도 여율령이 내게 가르쳐 준 거였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소중한 사람의 흔적은 그가 사라진 후엔 슬픔이 된다는 걸 나는 지금 처음 알았다.

그렇다면 무륜은 어떠할까. 내가 그에게 남긴 흔적도 그의 슬픔이 될까. 내가 여율령의 상실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그 또한 배신감과 상실감에 처절한 몸부림을 치게 될까.

사고는 쳇바퀴를 돌았고 나는 두려워졌다. 여율령과 나에서, 나와 무륜으로. 그렇게 무언(無言)의 결심은 흔들려 무너지고 말았다.

“충심을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

“제가 전하를 마음에 품은 것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충심과 연정을 구분하지 못할 둔자는 아닙니다.”

“이화야, 내 진정 기쁘고 기꺼우나 너는 방금 상서령을-”

“폐하께 안기고 싶습니다. 이래도 착각인 것 같습니까.”

크게 뜨인 무륜의 눈이 이번엔 속절없이 흔들렸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아니면 절 좋아한다는 건 그저 해본 소리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잖느냐. 나는, 나는 단지.”

“그럼 안아주세요.”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잡힌 손등이 움찔했다.

“아무리 내력을 끌어 올려도, 몸이 떨릴 만큼 한기가 듭니다. 갈비뼈 안쪽이 무너진 기분입니다. 피도 장기도 없는 허 공간이 여기 생겼습니다.”

그의 손을 끌어다 내 가슴에 얹었다.

“아버지를, 상서령을 잊고 싶은 건 아니지만, 다 비어버린 것 같은 기분은 잊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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