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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8화 (58/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8화

해가 뜨고 한 시진 후, 야시장이 섰던 남쪽 방면의 뒷골목에서 금군이 섭선을 발견했다. 핏물과 먼지가 얼룩진 섭선. 내가 사다 준 그 섭선이 맞았다. 섭선에는 피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남차(南茶).”

내가 말했다.

“남쪽에 있는 모든 다원을 뒤져야 합니다.”

내 말은 무륜의 입에서 다시 나와, 지엄한 황명이 됐다. 일류와 특급의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2황자를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온 건, 다시 한 시진이 흐른 후였다.

보고를 들은 직후 거짓말처럼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는 날 무륜이 받쳐 지탱했다. 드디어 찾았다는 안도보다 여율령의 신변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2황자를 찾았다면 그에 대한 보고도 곧 들어올 터.

어쩐지 나는 두려웠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2황자가 굳이 여율령을 선택해 납치한 연유를 나는 몰랐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는 것이 두려웠다.

‘나 때문이다.’

암묵단은 황궁 내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최고의 살수 집단이자 금국 제일의 무력을 지닌 단체 중 하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였다. 하나, 흑월만은 개인 호위의 자격으로 특별하게 예외였다. 그리고…… 그 흑월이 없다. 남방에 갔다. 남방에 간 이유는 나 때문이다.

원을 그린 사고가 결국 모두 내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단단한 품이 앞을 가렸다. 내 생각도 심경도 다 읽은 것처럼 무륜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 탓이다.”

머릿속을 잠식한 생각이 무륜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부족했던 탓이야. 금국에서 가장 삼엄해야 할 황궁에 괴한들이 침입한 걸로 모자라 신하가 납치까지 당했으니. 그는 누구의 부덕함이겠나.”

다정한 손길이 내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시선이 내 이마에서 눈꺼풀로, 다시 콧잔등과 입술로 향했다. 그 선이, 그가 입 맞추고 싶어 하는 선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보는 눈만 없어도 품에 안고 얼렀을 텐데. 그의 생각이 놀랍도록 선명하게 읽혔다.

“자책하지 마라. 그럴 바엔 차라리 나를 원망해.”

그가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해도 미워하진 마라. 원망해도 되는데 미워하지는 마. 저어하지 마. 네가 그러면 나는…… 아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여율령에 대한 걱정을 지우지 못하는 한편, 눈앞의 사내에 대한 애틋함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나는 무륜과 반대였다. 미워해도 된다. 저어해도 괜찮다. 하지만 내가 떠난 후의 당신이 날 원망할까 봐. 원망하며 마음 찢어지게 슬퍼할까 봐 밤에도 깜짝깜짝 놀라 눈을 뜬다.

“예, 폐하.”

순순히 대답하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리 결심한 순간, 다른 보고가 들어왔다.

“상서령을 찾았습니다.”

기다리던 소식을 전한 금군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내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내내 속을 갉작거리던 불길함이 화마처럼 전신을 휘감았다.

* * *

2황자가 몸을 의탁한 곳은 도성 남부 구석진 곳에 자리한 다원이었다. 그곳의 주인은 수백 출신으로, 몇 다리 건너면 2황자의 외사촌이 있다 했다. 필요한 정보는 그걸로 충분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포박된 2황자가 보였다. 오랏줄에 꽁꽁 묶여 재갈까지 찬 그는 나와 무륜이 나타나자 거칠게 들썩였다. 금군은 자비가 없었다. 그들이 꿇어앉아 있던 2황자의 어깨를 눌러 바닥에 처박았다.

2황자는 흙바닥에 뺨이 짓눌린 채로 우릴 쏘아봤다. 시선만으로 꿰뚫어 죽일 기세였다. 그럼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가슴의 초조함이 너무 짙어 다른 감정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금군이 ‘이쪽입니다’ 하고 안내하는 길을 따라 발을 옮겼다. 심장이 거칠게 널을 뛰었다. 가슴이 아플 지경이다. 피가 몰린 머리가 멍했다. 귀 뒤가 당기는 것도 같다.

마침내 도착한 다실 안. 피투성이의 여율령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옆엔 의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해야 할 의원의 낯은 사색이었다. 지옥의 수문장처럼 주변을 메운 금군들 때문이 아니었다.

익숙한 죽음의 냄새가 온 다실에 가득했다. 나는 담담하지 못한 마음으로 애써 담담한 척 죽어가는 여율령을 마주했다.

“……아버지.”

무륜이 작게 움찔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앞에서는 항상 그를 ‘상서령’이라고 불렀다. 내 부름에 가는 숨을 내쉬던 여율령이 눈을 떴다.

“올 거라고 생각했지.”

그는 여느 때처럼 실쭉 웃었다.

나는 의원에게 그가 살 수 있느냐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율령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여율령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열었다.

“제삼의 세력이 있음을 짐작은 했지. 하지만 그 세력이 이용할 황자는 다 사라졌으니 이제 끝난 일이라 그냥 흘려보냈던 것을.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구나.”

본래 여율령이었다면 그리 흘리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런 일은 시간이 생명. 어떻게든 끄나풀을 잡고 조사하여 개입한 것이 누구인지 알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그에겐 추적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죽어가는 나를 살리는 일이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웃은 여율령이 무륜을 불렀다.

“폐하.”

“그래.”

“제 아들과 둘만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무륜은 두말 않고 좁은 다실에 가득하던 금군을 전부 바깥으로 물렸다. 밀영군의 그림자도 천장을 따라 스르륵 사라졌다. 눈짓을 받은 의원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무륜이 내 손을 슬쩍 잡았다 놨다.

“나가 있으마.”

그의 손끝이 내 손바닥을 길게 미끄러졌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 너를 홀로 두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의 미련이 손끝에 맺혀 있었다.

탁.

그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다실에는 여율령과 나만이 남았다.

가느다란 숨소리. 짙은 피 냄새. 기울어져 마루를 비추는 햇살. 모든 것이 기이할 만치 눈에 아로새겨졌다. 무륜과 열흘을 함께 보냈던 넓은 방. 비단 금침과 원형의 탁자와 화병이 있었던 그 방의 풍경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듯이, 이 방의 풍경 또한 그렇게 될 것을 나는 직감했다.

“네 혹, 신과 신수가 마냥 높은 데서 하계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느냐.”

나는 기어이 역정을 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선문답이십니까.”

내 큰 소리에 놀란 여율령이 눈을 깜박이다 학학 웃었다. 폐를 다친 자의 웃음이다.

“그게 내 본질이라 그렇다.”

멈칫하여 ‘예?’ 하고 되물었다. 그만큼 예상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답을 제시해 줄 수 없다. 그럴 수 없게 태어났거든. 다만 질문을 하지. 또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고민하게 해서, 올바른 길로 인도한단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냥 듣거라. 새겨들어도 되고 흘려들어도 된다. 내 지금부터 두 가지만 네게 일러두마.”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흐른 피가 나무로 된 바닥을 적셨다.

“네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거든 ‘상선 희 견차처’라 세 번 외치거라. 잊어선 안 된다. 꼭 기억해 두렴.”

“그게 무슨……! 됐습니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소릴랑 관두고 다른 말을 해주세요. 아직 들어야 할 말이 많습니다. 아직-”

아직 못 한 말도 많습니다.

참고 참았던, 꾹꾹 덮어 눌러둔 것이 그 순간 터져 나왔다.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사고’라 한다. 이 일도 사고였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준비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벌거벗은 기분으로 그의 죽음 앞에 서 있었다.

“이대로 가실 순 없습니다. 절대 이렇겐 못 보냅니다. 아버지라 몇 번 부르지도 못했단 말입니다.”

떨리는 입매와 일그러진 눈을 하고, 나는 설움을 못 이겨 울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피에 젖은 여율령의 장포 위로 떨어졌다. 흐윽, 흑. 숨 들이켜는 소리가 볼썽사납기 그지없었다.

“이화야, 듣거라.”

여율령이 왈칵 주먹을 움켜쥔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듣지 않으리다. 하고픈 말 있으면 살아서 하소. 부디 살아서 하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섭선 위로 짓던 익숙한 눈웃음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특급 무사라도 문 너머에선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황궁 서고의 사(蛇)열. 세 번째 줄. 여섯 번째에 꽂힌 서책을 펼쳐 보거라. 그를 보면 아마 필히 나를 원망하게 될 게다. 지금 이리 흘린 눈물을 아깝다 여길지도 몰라.”

“거기 뭐가 들었어도 그럴 일은 없습니다.”

“죽은 개구리나 개똥이 들었어도 말이냐?”

“…….”

이런 상황에서도 농이었다. 어이가 없어 울면서도 황망해하자 그가 재차 학학 웃었다.

“내 이러니 어찌 너를 어여삐 여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생기가 도는 얼굴과 달리 내 손등을 덮은 그의 손은 점점 차게 식어갔다.

“우리 처음 본 날을 기억하느냐?”

기억했다. 그를 만난 날은 무륜과 헤어지던 날이었다.

“내겐 너와 설레는 첫 만남의 날이었다. 하지만 네겐 애틋한 이와 예정에도 없던 이별을 한 날이었지.”

너무 정확한 말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린 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쳤을지 내 어찌 모를까. 민가에서 아이를 낚아채 가는 도깨비 같았을 것이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긴. 그러니 제게 원하는 것이 있느냐 물었던 거겠지.”

그때 여율령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확히는, 잊을 수 없었다. 한때는 그 모호함을 싫어했다. 나 자신마저도 모호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하나 지금은 어떠냐 묻는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상관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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