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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7화 (57/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7화

2황자는 상선의 이름하에 진행된 신성한 시합에서 패배했다. 3황자가 괜히 자살한 게 아니었다. 금군과 밀영군, 그리고 문관들의 세 수장이 하늘비석에 손을 얹은 무륜을 봤다. 그 순간 황제는 정해졌다. 황제가 되지 못한 자의 미래도 함께 정해졌다.

무륜에게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위씨나 여씨에서 새로운 황제가 섰으면 섰지, 그는 아니다. 자격을 잃었으니까. 반대로 발견되면 죽거나, 평생을 유폐되거나, 귀양이다. 그러니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게 숨어 살 거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었다.

한데 설마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일류 무사들을 이끌고 연회장에 나타난 2황자 시묵은 심지어 불구였다. 왼쪽 팔이 잘렸고 오른쪽 눈에는 안대를 쓰고 있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었습니다. 그저 연회장의 사람들을 베기 시작했죠.”

그렇구나. 그 말을 들었을 때 2황자의 목적을 깨달았다.

“황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겁니다. 그냥 분이 가시지 않으니 깽판을 치겠다는 셈속이었겠죠. 목숨도 아끼지 않고 뒤를 생각하지 않는 미친놈이라니. 어떤 의미에선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입니다.”

막상 도망을 쳐 몸이 안전해지고 나자 뒤늦게 분이 치밀었을 수도 있다. 황태자를 제외하면 본래 가장 높은 항렬이었던 2황자다. 이대로 산다 한들 그게 과연 사는 것인가. 드높은 자존심이 피를 토했을지 모른다.

“빌어먹을.”

욕설을 삼키며 침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부 짐작일 뿐이다. 그 속내가 어떠한지 정확히 아는 자는 없다. 왜 하필 여율령을 납치했는지도 알 수 없다. 기도하듯 모아 쥔 양손을 꽉 얽었다.

턱.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고개를 돌리자 무륜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이지만 눈에는 걱정이 서렸다.

“전…… 괜찮습니다.”

빈말이었다. 무륜 또한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꽉 쥐었다. 마치 여율령처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정리를 해보지.”

2황자는 그렇게 들쑤셔 놓고 정작 본인은 귀신같이 황궁을 빠져나갔다. 죽거나 제압당한 자들은 애당초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제압당하자 곧바로 자진을 시도했다. 전부 수백 출신의 무사들이었다.

그렇게 2황자가 사라진 후, 무륜이 진두지휘하여 장내를 정리했다. 술렁거리는 사절단에게 호위를 붙여 숙소로 돌려보내고, 추적대를 편성하고, 신료들 역시 무사들을 붙여 귀가시켰다.

여율령이 변을 당한 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호위하던 무사는 전부 죽고 금군 둘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2황자 전력 중에 이 정도의 강자는 없었을 텐데요.”

“시험이 끝나고 벌써 3개월째다. 그새 어디서 새로운 세력을 끌어와도 이상할 것은 없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백이겠지만-”

무륜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백. 그 작은 나라가 과연 끈 떨어진 2황자의 손을 들어줬을까?

“그래도 우선은 정석대로 움직여야겠지. 위수혁. 지금 사절로 와 있는 수백의 왕자가 누구지?”

“4왕자 무뢰입니다.”

기억에 있었다. 타낙한이 사칭한 왕자였다.

“눈치채도 상관없으니 금군을 겹겹이 둘러 감시해. 숙소 밖으론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해라. 저항하면 신병을 구속해도 상관없다. 그리고 나머지 사절들의 숙소에도 호위를 늘린다는 명목으로 금군과 밀영군을 추가 배치해.”

“명을 받듭니다.”

위중혁의 복귀 이후 부단장으로 돌아간 위수혁이 읍하곤 자리를 떴다.

도성은 철저히 폐쇄됐다. 2황자는 어차피 살아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목숨에 미련이 있는 자였다면 애당초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터.

‘여율령.’

잠깐 괜찮아졌던 속내가 옥죄어왔다. 무수한 심려(心慮)의 개미 떼가 장기를 갉아 먹었다.

원탁을 빙 둘러앉은 이들이 2황자의 목적과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들의 추측은 반짝이지 않았다. 그럴듯할 뿐, 감탄이 나올 만큼 납득할 수 있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여율령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빛나는 눈과 총명한 머리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짚어줬을 텐데.

짜악! 양손으로 뺨을 때렸다. 도성의 전도를 짚어가며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던 사람들의 이목이 죄 내게 쏠렸다.

“죄송합니다. 이제 정신 차렸습니다.”

“그래. 무리하진 마라.”

무륜이 가장 먼저 다정하게 말했다. 그가 재차 내 어깨를 툭 두드렸다.

여율령은 없다. 나는 가장 먼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했다. 그는 없고, 없는 이유는 납치당해서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 전에 반드시 구해야 한다.

생각해. 생각해라.

2황자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여율령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

“……섭선.”

아직 내게 모인 시선이 떨어지기 전이었다. 나는 원탁에 자리를 차지한 면면들을 보며 말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물건 중에 섭선은 없었습니까?”

“없었다.”

위중혁이 답했다.

“그렇다면 여율령은 끌려갈 때도 의식은 있는 상태였을 테고, 구속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체적으론 전혀 단련하지 않은 일반인이니까 그쪽으론 경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겠죠.”

“그래서?”

“섭선을 찾아야 합니다.”

갑자기 웬 섭선. 그렇게 생각한 이들의 표정은 이어진 내 말에 일변했다.

“의식도 있고, 구속되지 않은 채로 끌려간 여율령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아침이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사를 동원해 바닥에 떨어진 섭선을 수색해 주십시오. 발견한다면 건드리지 말고 절 불러주세요.”

“그가 연회 때 지참한 섭선의 생김이 어땠는지 아나? 바닥에 떨어진 섭선이 그리 흔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들어두면 도움은 되겠지.”

“분명…….”

처음엔 설마라고 생각했다. 피가 말라붙은 섭선을 아무렇지 않게 손에 쥔 것을 보고서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가 아는 여율령이라면, 남들의 반응이 재밌겠다는 이유로 그걸 연회장까지 들고 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피가 말라붙은 섭선일 겁니다. 평소 그가 들고 다니는 고급품은 아닙니다. 평범하고, 수수하고, 돈 없는 선비들이나 쓸 것 같은 재질이죠.”

“알겠다.”

무륜이 지시를 내렸다. 원탁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나와 무륜뿐이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고, 무륜은 그런 나를 응시했다. 걱정 어린 시선에도 그를 보지 않았다.

뭔가……. 계속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반딧불이처럼 뒤통수 쪽을 날아다녔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채, 티끌만 한 불빛은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몸도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우선 조금이라도-”

“2황자의 팔과 눈.”

감히 자신의 말을 끊었음에도 무륜은 나를 책하지 않았다. 외려 계속해 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망연한 눈으로 무륜을 봤다.

“시험이 끝났을 때, 어쨌든 승자는 폐하였지만 저희 일행의 상태는 좋지 않았죠. 반은 흩어지고 와해된 상태였잖습니까.”

“그랬지.”

그때를 떠올린 건지 무륜의 표정이 흐려졌다. 중상을 입고 죽을 뻔했던 나를 떠올린 게 분명했다.

평소였다면 녹진해졌을 마음이 차게 얼어붙었다. 그렇다. 그때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흑월 역시 뒤에 홀로 남겨졌고, 몽휼과 위중혁은 무륜을 정상까지 옮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3황자는 그때도 아직 산의 초입이었습니다. 거기서 목을 매 죽었죠. 또 그때 당시의 보고에는 2황자의 부상에 대한 건 없었습니다.”

무언가 깨달은 듯 무륜의 눈이 커졌다. 나는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던 반딧불이를 움켜쥐었다.

“그럼 2황자의 팔과 눈은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3황자는 목을 매 죽었다. 자진을 한 흔적도 남아 있어 모두가 자살이겠거니 했다. 어쨌든 그는 죽었고, 황제는 정해졌다. 누구도 이미 죽은 패배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멍청해도 황자로서의 자존심은 있었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고 흘려 넘겨 버렸다.

하지만 그게 만약 타살이었다면.

그럴 여력이 없던 우리도, 당시 근처에 없던 2황자도 아니었다면.

“애당초 우리를 공격한 녀석들은 2황자나 3황자의 소속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우리가 겪었던 그때의 일을 다시 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처음 우리를 습격한 자들은 2황자의 손이 맞다. 저들 입으로 그렇게 고했으니까. 하지만 막바지에 독과 함께 덮쳐온 자들은? 그들은 누구의 손이지?

나와 흑월은 그들을 보고 철석같이 2황자와 3황자 중 규정을 위반한 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이유가 있는 건 그 둘뿐이었으니까. 특히 정공법으론 이길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3황자를 의심했다. 그 의심에 힘을 더하듯, 놈들은 눈을 가리는 독을 사용했다.

돌이켜 보니 이상한 점이 쏟아졌다.

첫째. 독술사를 다수 거느린 3황자가 겨우 그따위 독을 사용했을 리 없다. 게다가 습격한 놈들도 독술사가 아닌 일류 무사였다.

둘째. 2황자면 모를까, 3황자는 그 정도의 무장 집단은 가지지 못했다. 설령 어떤 이유로든 데리고 있었다면 백 명이 넘는 어중이떠중이보다 그 일류 무사를 전부 데리고 출발했어야 했다.

‘빌어먹을. 어찌 이리 멍청할 수가.’

“이화.”

무륜이 고뇌하는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자책할 필요 없다. 우리 모두의 시야가 좁아서 벌어진 일이야. 해도 나중에. 지금은 아니다. 당장은 상서령을 찾는 것이 급선무야.”

“예. 압니다.”

알아요.

신음처럼 중얼거리면서도 몸을 바로 세웠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내 행동에 여율령의 목숨이 달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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