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6화
“아무래도 네가 직접 남방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제가 직접이요?”
“어차피 떠날 생각 아니었느냐?”
맞다. 내 숨이 다하기 전에 어쨌든 몸을 감출 셈이었다. 한데 어째서일까. 저 말을 듣자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하고 새삼 놀랐다.
“준비는 내가 다 해두었으니 넌 그저 몸만 가면 된다.”
“일전엔 예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 줄까, 그리 말씀하셨잖습니까.”
“상황이 바뀌었다. 희망을 봤으면 최선을 다해 붙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어리석게 굴지 말거라. 지금 잠깐 떨어지면 남은 평생 무륜과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 붙어 있으면 몇 달 뒤엔 영영 헤어지게 될 것이다.”
여느 때처럼 여율령의 말이 모다 옳았다. 그걸 아는데도 선뜻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가 나더러 영민하다 하였나. 눈앞에 빤히 보이는 답조차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있거늘.
“일단 지금은 쉬거라. 황궁에는 사람을 보내 놨으니 걱정 말고.”
툭. 비단 금침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어제 산 민담집이었다.
“마음이 술렁거리거든 이거라도 보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살려면 하루라도 빨리 남방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만 기억해라.”
표지에 손을 얹었다. 같은 책을 똑같이 나누어 가졌음을 상기시켜 주었던, 연당의 그림이 그려진 표지였다.
“타낙한에 대한 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여율령은 무표정했다. 하나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간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네가 염려할 만한 건 없다. 내 어련히 알아서 할까.”
“하면 지한국이 정말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 지금의 금국이 막을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그것이 대답이 됐다. 타낙한이 그 이후 나를 찾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것도 같은 이유일 터. 나도 아는 것을 여율령이라고 모를 리 없다.
“쓸데없는 소리.”
그가 내 처소를 나섰다. 손에는 여전히 내가 사 온 섭선을 쥐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내력을 다스린 후 식사했다. 잠깐 잠들었다 오후 느지막이 눈을 떴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동복이가 비단보에 싼 함을 양손 가득 들고 들어왔다. 무엇이냐 묻자 비틀거리며 원탁 위에 놓더니, 황궁에서 보낸 것이라 했다.
황궁이라 함은 결국 무륜이 보냈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일어나 보를 풀어 헤치자 약과며 당과며 온갖 군것질거리가 반들거리는 자태를 드러냈다. 나머지 함에는 약재가 한가득이었다. 동복이가 이만 가보겠다며 나간 후에도 나는 한참이나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일에 치이다 갑자기 한가해져 그런가. 시간이 유독 더디게 흘렀다.
약과를 먹으며 금침 위를 뒹굴다 결국 어제 산 민담집을 펼쳤다. 앞은 기억하는 내용이라 후루룩 읽어 내렸다. 눈이 멈춘 것은 초반부가 끝날 즈음, 초하룻날의 연당에서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리라 다짐하는 부분이었다.
가문을 감춘 무사.
신분을 속인 공주.
연당에서 노리개만 나눈 채 헤어진 둘은 공주와 위사가 되어 다시 만난다. 공주가 호족의 땅으로 향하는 열흘. 그것이 이 민담집의 본편이었다.
공주와 무사는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고 도망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를 한발 먼저 알아챈 다른 위사가 왕과 호족에게 전서를 보낸다. 그 결과, 무사는 왕궁으로 끌려가고 공주는 호족에게 감금당한다.
그 후로 수년. 노리개의 문양이 닳도록 매만지던 무사는 전장으로 보내졌다. 그는 최전방을 구르면서도 여전히 공주를 그리워했다.
비슷한 시기, 공주는 난산 끝에 호족의 아이를 낳고 죽는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무사는 적들의 한복판에 몸을 던져 자살 아닌 자살을 한다.
다 읽고 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예전에 끝까지 다 못 읽고 덮었던 이유가 있었군. 이게 어떻게 가장 잘 팔리는 민담집 중 하나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지.”
“오셨습니까.”
기척은 느끼고 있었다. 관모를 확 잡아 내린 여율령이 긴 숨을 내쉬었다.
“상태를 보러 왔는데 이제 좀 살 만한가 보구나.”
“그러는 아버지는 영 상태가 좋지 못하십니다.”
“옷만 갈아입고 연회장에 가봐야 하니까. 그냥 관복 입고 가면 되지, 환복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그게 예의니까요.”
“오냐. 이번에 사절들이 돌아가면 예부를 한번 살펴봐야겠구나.”
여율령이 웃었다. 나는 예부의 관리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여율령이 금침 위에 널브러진 서책에 시선을 주었다.
“끝까지 읽었느냐?”
“아, 예. 한데 이게 실화였습니까?”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지. 대부분의 설화가 그러하듯이. 뭐, 그것도 사실과 많이 다르긴 하다만.”
나는 여율령이 사당에서 해주었던 사월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갑자기 흥미가 일었다.
“그럼 원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그 민담의 제목이 왜 위금지사인지는 아느냐?”
“아니요.”
“위문현과 금윤주의 사랑 이야기라 그렇다.”
위문현? 어째 익숙한 울림이었다.
“네가 아는 그놈 집안이 맞다. 가문을 숨긴 위씨 가문의 장자와 신분을 숨긴 금국 황녀의 이야기였지. 그때까지만 해도 금국 황족은 금씨 성을 썼거든.”
현 황족은 성이 없다. 언제 어쩌다 그리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대신인지는 모르나, 황족과 같은 이름을 가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 금국에 ‘무륜’은 무륜 하나뿐이고, 그는 다른 황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허…… 용케 민담집이 되어 팔리고 있군요.”
“워낙 옛날이야기니까. 400년도 더 전의 이야기였지 아마? 게다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어도 세세하게 맞는 건 별로 없다. 같은 건 큰 가닥뿐이지. 둘은 사랑했고 도망했다. 하지만 결국 잡혀서 위문현은 황궁으로 끌려가고, 금윤주는 외가인 주문가에 감금당했다.”
종복이 옷을 가져왔다. 여율령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그를 물리고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니 그는 왜, 뭐, 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얼핏 보인 몸이 제법 탄탄하여 놀랐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하긴 얼굴부터 본래 나이보다 스물은 어려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위문현은 사월린의 힘을 빌려 지한국을 세우게 된다.”
“……?!”
뭐? 잠, 뭐?!
갑자기 중간을 건너뛴 결과에 당황했다. 고개를 홱 돌려 여율령을 봤다. 마침 옷을 다 갈아입은 그가 허릿대를 조여 매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허릿대의 끈이 보였다. 그 끈처럼 늘어진 여율령의 이야기가 타낙한의 이야기와 맞물렸다.
“상선이 아니라 사월린 말입니까?”
“그래. 그래서 위문현은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목재 같은 걸 허공에 들어 올렸으며, 국지적인 날씨를 조작할 수 있었다. 전부 사월린의 능력이지.”
“그럼 타낙한이 말한 상선의 약조는…… 그 ‘이상’은…….”
“사월린이 사랑한 인간이 있음을 기억하느냐?”
등줄기로 소름이 끼쳤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이 굳어서 여율령을 보았다.
“사월린은 상선의 말을 순수하게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선이 그토록 어여삐 여기는 인간에게 그런 가혹한 짓을 했음을 믿지 않았지. 그래서 손톱만 한 영혼의 구슬을 찾아 북방 설원을 헤매는 한편, 제 연인이 인세에 환생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
“그래서 뭔가 수를 써 두고자 하는 마음을 항시 품고 있었지. 위문현은 뭐 대단한 이유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때마침 걸린 것이 위문현이었을 뿐.”
당신은 그걸 어떻게 다 아십니까.
가슴에 한기가 스몄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끔 여율령에게서 느껴지던 묘한 느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아버지, 당신은-”
“늦겠구나. 이만 가보마. 마저 쉬고 있으렴.”
그가 가만한 눈으로 내 말을 잘랐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입을 틀어막은 듯, 그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흑월.”
다른 말을 하자 그제야 입이 트였다. 나는 다소 창백한 낯으로, 하지만 계속 궁금했던 바이기도 한 것을 물었다.
“흑월은 어디 있습니까.”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그 앞에서 그리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데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다니. 흑월답지 않았다. 깨어났을 때 곁에 없던 것은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야 정상이거늘.
“잠깐 심부름을 보냈다.”
여율령이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남방으로 말이지.”
전혀 여상하지 못한 행선지였다.
<7장 타낙한 완결>
가타부타 설명도 없었다. 여율령은 연회에 늦겠다며 홀랑 도망을 쳤고, 나는 세가의 암묵단을 호출해 하문했다.
무의미한 짓이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만 살래살래 내저었다. 결국 씨근덕거리며 여율령을 기다렸다. 어차피 연회가 파하면 갈 곳이 어디 있겠나. 집밖에 없다.
하지만 나를 찾아온 건 여율령이 아니라, 옷에 피를 묻힌 암묵단이었다.
스르륵, 탁!
기별도 없이 문이 열리고 그가 반쯤 구르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장 먼저 피 냄새가 훅 끼쳤다. 숨을 헐떡인 암묵단원이 고개를 쳐들며 고했다.
“연회장이 습격당했습니다!”
“뭐?!”
순간 눈앞이 아득했다.
“폐하는, 폐하는 무사하신가!”
“폐하는 무사합니다. 하나-”
암묵단의 낯이 일그러졌다. 번져가는 절망이 복면 위로도 선명했다.
“상서령께서 납치당하셨습니다.”
8장 갈림길
황궁의 한복판. 각국 사절이 모인 자리. 그런 곳이 습격당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습격한 자의 정체는 더욱 경악스러웠다. 바로 2황자였다. 정당한 황위 계승권도 잃고 목숨이나마 부지해 보겠다고 도망했던 그가 돌아왔다.
믿을 수가 없어서 잘못 본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암묵단원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