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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4화 (54/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4화

앞에는 아직 다 보지 못한 문부가 가득했다. 아주 신물이 났다. 이런 것을 무륜은 황제위에 오른 날부터 매일 보고 있을 터. 그리 생각하자 못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 무릎에 누워 눈을 감았던 그를 떠올렸다. 헌앙한 풍모는 그대로인데 어찌 그리 연약해 보였을까. 곧 부스러질 잠자리 날개와 같았다.

손등을 눈에 얹고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위사란 곧 지키는 자. 그런데 황제의 위사장이라는 자가 그의 무엇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말 한마디로 성 하나둘쯤 지킬 수 있는 자. 그런 자가 되어야 무륜을 구할 수 있을 거라던 여율령의 말이 뼈에 사무쳤다. 그리되겠다 한 말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한데 지금은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득함이 아니었다. 어둠이다. 바로 한 치 앞이 캄캄한 어둠에 묻혀 있었다. 그 앞에 멈춘 발이 더 나아가지 못했다. 설령 이 어둠을 헤치고 나아간들 그 끝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벽이었다.

우울함에 젖어 든 때, 기척을 숨긴 누군가가 창밖에 내려와 앉았다. 감았던 눈을 서늘하게 떴다. 밤손님인가.

내 집무실은 청운관 4층이었다. 일류로 구성된 위사가 득시글거리는 곳에 오다니. 오만하고 불손한 놈이었다.

순간 타낙한, 그 미친놈인가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검술을 익힌 흔적은 있었으나 경지가 그리 높진 않았다. 잘해봐야 일류 수준. 하면 누군가. 정말로 밤손님인가.

검대에 한 손을 얹고 창가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격자창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날아들었다.

“폐하?”

반쯤 뽑아낸 검을 얼른 집어넣었다. 머리엔 나뭇잎을 붙이고 잠행복을 입은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가자.”

“예?”

“서두르지 않으면 몽휼이 올 거다.”

그 말에 일단 옷부터 부랴부랴 갈아입었다. 항상 입던 잠행복을 갖춰 입자 무륜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폐하아아아! 멀리서 몽휼의 절규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나도 무륜도 모른 척했다. 어디로 가시느냐 묻자 그가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했다.

“야시장.”

“……일이 이렇게 많은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더구나.”

“뭘 미적거리고 계십니까. 어서 가시죠.”

앞장서는 내 뒤를 따르며 무륜이 소리 내어 웃었다.

* * *

휘몰아친 업무 때문일까. 잠행을 나온 것이 굉장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야시장이 선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가자 온 거리에 환한 등이 가득했다. 틀림없는 축제였다.

“야시장이다.”

아, 그렇구나.

그 말을 듣고 나자 그제야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색색의 천도, 왁자한 소란도 없었다. 하지만 특유의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국상으로 잠깐 사라진 수련제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라도 채우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심스러웠다. 좌판도 놀이보단 음식 위주였다. 아이들은 여전히 뛰놀았지만, 어른들로부터 종종 주의를 들었다. 그래도 웃음이 있었다. 온기도 있었다.

“야시장은 처음이더냐.”

“예, 처음입니다.”

“흠. 그래.”

무륜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야시장이 형성된 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성에서 이 거리만 환하게 빛났다. 거대한 황룡이 지상에 내린 것 같았다.

무륜은 지나다 약과가 보이자 사 주었다. 엿과 당과도 빼놓지 않았다. 한데 당과를 살 때, 장사치가 나와 무륜을 번갈아 보더니 씨익 웃었다.

“둘이 정인이구먼. 그렇지?”

과연 장사치의 눈썰미라며 마냥 감탄할 수 없었다. 기함하며 얼굴이 벌게진 나와 달리, 무륜은 흡족하게 웃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맞소.”

그러곤 나를 향해 뭔가 기대하는 시선을 보냈다.

“마…… 맞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무륜은 확실히 들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장사치의 손으로 건네지던 동전이 은전으로 바뀌는 것을.

“감사합니다, 대인들!”

예쁜 사랑 하세요! 감춰진 뒷말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면이 홧홧하여 잰걸음을 놓았다. 무륜이 건네받은 당과를 내 입가에 대줬다. 막 만든 것이라 그런지 끝에 설탕이 맺혀 있었다. 혀부터 밖으로 내었다.

할짝.

살살 핥다가 끝을 입술로 물었다.

추읍.

침이 흘러 먼저 빨았는데 생각보다 소리가 컸다. 추접스럽다며 저어하시려나. 힐긋 눈을 굴리자 딱딱하게 굳은 낯이 보였다. 얼른 끝에 한 덩이를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단맛이 번졌다.

이제 내가 쥐고 먹으리다. 이리 달라며 손을 뻗었으나 무륜은 내 손을 피해 당과를 쭉 뒤로 물렸다.

“이대로 먹거라. 손이 지저분해지지 않으냐.”

그럼 당신 손은요? 눈으로만 물었다.

“내 손은 이미 묻어서 괜찮다. 나중에 씻으면 돼.”

그럼 어차피 마찬가지 아닌가. 나 역시 씻으면 되는 것을.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시 입가에 대어지는 당과에 얼른 입을 열었다. 두 번째 당과를 한껏 입에 넣었다. 안쪽에서 눌린 터라 볼이 살짝 튀어나왔다. 침에 젖은 축축한 소리는 덤이었다.

무륜이 앓는 소리를 냈다.

“기다리다 죽겠군.”

무엇을요? 하나 뭔가의 예감으로 나는 묻지 않았다.

당과를 다 먹어갈 즈음, 갑자기 손목을 잡아챈 무륜이 나를 으슥한 골목으로 이끌었다. 미처 먹지 못한 마지막 당과 한 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다시피 내 한 손이 이래서 영 여의치가 않구나.”

“예?”

“하니, 네가 해주련?”

“예?”

“접문 말이다.”

거듭되는 반문에도 짜증은 일절 없이 그가 아주 담백하게 말했다. 반면 나는 얼굴이 홧홧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과 장수의 말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응? 어서.”

조른다. 조르고 있다. 그 무륜이 어린애처럼. 나보다 큰 사내가 바라는 것이 있는 얼굴로 은근히 보챘다.

이길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양손으로 그의 뺨을 잡은 내가 있었다. 살짝 위로 들린 고개가 아래로 숙어진 그의 낯과 마주했다. 그가 진득한 손으로 내 머리칼을 쥐려다 직전에 멈칫했다.

“흣.”

혀가 보다 사나워졌다. 무륜의 손은 결국 내 얼굴 옆의 벽을 짚었다. 콰드득. 나무로 된 벽이 그의 손아귀에 부서졌다.

“어이구. 아주 입술 없어지겠네?”

“잡아먹겠어, 아주?”

여느 때와 같은 여운은 없었다. 빛도 잘 들지 않는, 우리가 자리한 곳보다 더 깊숙한 골목의 안쪽에서 껄렁거리는 사내들이 기어 나왔다.

“…….”

“…….”

이거 설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설마.

설마설마하다 나와 무륜의 차림새를 다시 봤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한 잠행복이다. 고급스러움이라곤 전혀 없이, 좀 사는 상인 집안 자제들 같았다.

“괜찮아. 우린 비역질에 편견 없어. 관심도 없고.”

“하지만 이거엔 좀 관심이 있지.”

‘이거’라고 말한 사내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나는 묵묵히 허리춤의 검대를 풀었다. 도병째로 검을 손에 쥐고 무륜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그럴 것 없다.”

무륜이 턱을 까닥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밀영군이었다.

“뭐, 뭐야!”

“그 더러운 입 닥쳐라.”

쇠를 긁는 듯 음습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잡배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밀영군은 말 한마디로 그들을 제압했다. 당당하던 놈들의 다리가 이젠 후들후들했다. 조금만 더 두면 오줌을 지릴 기세였다.

‘저자가 밀영군 대장인가.’

흑월이나 위중혁과 달리 그는 밀영군 내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데 모아놓으면 누가 누군지도 알 수가 없다.

호기심에 고개를 빼는데, 무륜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의 다른 손을 젖은 영건으로 닦는 밀영군이 보였다. 아까 당과를 쥐었던 손이다.

“이만 가자.”

무륜에게 이끌려 골목을 나서면서도 자꾸 고개가 뒤를 향했다.

처음 봤다. 목소리도 처음 들었다. 금군과 달리 어둠에서 황제를 지키는 밀영군은 드러난 것이 거의 없었다. 눈만 간신히 드러내는 복면을 쓰고, 비번일 땐 황궁 곳곳에 흩어져 각자 다른 모습으로 지낸다 했다. 누구는 내관으로, 누구는 마구간지기로.

그 정도로 비밀스러운 밀영군의 대장은 평시에 어떤 모습으로 지낼까?

“저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내게 집중하렴.”

“예. 폐하.”

“또, 또. 그 버릇 간신히 고쳤나 했더니. 내 당장 돌아가서 저놈들을 요절내야겠구나.”

“무, 무륜 님.”

속으론 아무렇지 않게 무륜이라 하는데. 여율령의 앞에서 부를 때도 자연스러웠는데. 어째서 그의 앞에서 입 밖으로 내기는 이다지도 어려울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빙긋 웃었다.

그 후론 별문제 없이 야시장을 거닐었다. 과연 여율령이 받아줄까 싶지만 섭선도 하나 사고, 흑월을 위한 휴대용 숫돌도 하나 사고, 그만 주면 섭하다 할까 싶어 암묵단을 위한 것도 대량 주문했다. 그것들은 상서령의 저택으로 보내 달라 한 후 대금을 치렀다.

바람직한 소비를 마치고 계속 걷다 눈에 쏙 들어오는 동곳을 발견했다. 길이는 동곳이었지만 생김은 비녀에 가까웠는데, 끝에 작은 목련이 핀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마음에 드느냐?”

“예.”

“하면 사 주마. 주인장.”

“아뇨, 아닙니다! 제가 사야 합니다!”

다급하게 그를 막으며 얼른 대금을 치렀다. 저 동곳이 마음에 들었던 건, 그걸 한 무륜이 생각나서다.

주인은 가격도 묻지 않고 일단 달라는 내가 기꺼웠는지 덤이라며 비단 주머니에 동곳을 넣어 줬다. 어차피 이 주머니 값도 포함해 많이 받았겠으나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조금만, 무륜이 이 동곳을 잊어버릴 만큼만 기다렸다 그에게 건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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