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3화 (53/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3화

여율령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당장 고민하기보단 한발이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라고. 그러곤 전보다 더 자세히 지한국 내부 사정을 파고들어 보겠다 했다.

그렇게, 상서령이 떠나고 의외로 위중혁이 따라 일어섰다.

“아버지를 뵈러 가봐야겠습니다.”

금국을 지탱하는 두 가문 중 하나이자 무가의 수장이라 불리는 위씨 집안의 가주. 무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화를 나눌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몽휼마저 어디론가 떠나고 광실에는 나와 무륜만이 남았다.

“이화야.”

“예.”

“잠깐 무릎 좀 빌려주련.”

그리 말하는 무륜의 목소리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래서일까. 해서는 안 될 말이 자꾸 혀끝에 맺혔다.

“폐하.”

“그래.”

연모하고 있습니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조금 그렇구나.”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럼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일이 많아 어렵구나. 이렇게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게다.”

하나 결국 하지 못했다.

나는 올해의 끝이 오기 전 그를 떠날 것이다. 여율령은 그 유능함을 십분 발휘하여 내 흔적이 밟히지 않도록 잘 감춰주겠지. 그렇지만 언제고 아주 먼 훗날, 무륜은 내 죽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의 내가 이미 죽음 앞에 서 있었다는 것도.

그때를 생각해 보았다. 뒤늦게 모든 것을 알게 된, 내가 없는 세상에 남겨진 그를. 상상 속 무륜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낮과 밤을 울기만 했다. 그에게 남은 건 비탄과 절망뿐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단 한 모금의 공기도 들이쉴 수가 없었다. 억지로 생각을 흩어냈다. 그러고도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쥔 후에야 겨우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비단 금침보다 네 무릎이 더 편하구나.”

“그는 폐하께서 절 마음에 두신 까닭입니까.”

무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당황하던 그가 곧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하하, 네 말이 맞다. 내 너를 좋아한다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그를 어찌 잊으리까.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겨 봅니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하냐? 하면 다시 말해주마. 내 너를 연모하고 있단다.”

마음이 속절없이 일렁였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그가 짓궂게 물었다.

“어떠냐. 지금 이 순간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으냐?”

“……예.”

“하하. 그럼 앞으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오거든 내게 말하거라. 그때마다 연모한다 해주마.”

“진정이십니까.”

“하면. 내 네게 망설을 할까.”

머뭇거리다 말했다.

“모든 순간이 그렇습니다.”

말하고 보니 그게 꼭 고백과 같았다. 무륜의 낯이 그대로 굳었다. 능글맞던 웃음이 싹 가셨다.

“폐하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제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입니다.”

무륜의 손이 위로 확 올라왔다. 그가 내 목덜미를 잡아 내렸다. 절로 고개가 숙어지고 입술이 그의 입술에 삼켜졌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모든 감각이 무륜에게 집중됐다. 목덜미를 잡지 않은 다른 손이, 자연스럽게 앞섶을 파헤치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흠칫하자 왔을 때처럼 손이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입술도 떨어져 나갔다.

“그래. 이다음은 첫눈 올 때 네 대답을 듣고 해야겠지. 내 그렇게까지 경우 없는 사내는 아니다.”

“…….”

“왜 그리 보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린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하십니까? 제가 위사장이 되어 북궁에 갔을 때. 폐하께서 제게 목적이 무어냐고, 뭘 위해 당신의 위사장을 자처하였냐고 하문하셨죠.”

“그래. 그랬지.”

“그때 제가 무어라 답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목적은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은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5황자 전하를 곁에서 보필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 무륜의 눈이 짙어졌다.

내 무릎을 베면서 안 그래도 모양새가 흐트러진 동곳을 잡아 뺐다. 영웅건까지 풀어낸 후, 그의 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스륵스륵. 손가락이 머리를 매만질 때마다 무륜의 몸이 편하게 늘어졌다.

“저는 항상 폐하의 곁에 있을 겁니다.”

제가 떠나는 날까진 그리할 겁니다. 대신 떠날 때엔 마음을 두고 가겠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폐하의 곁으로 돌아올 겁니다.”

이 독이 제 몸을 갉아먹어 결국 죽게 되더라도 폐하를 잊진 아니할 것입니다.

“내세에 제가 무엇으로 태어나고, 폐하가 무엇으로 태어나도 전 다시 폐하의 위사로 살겠습니다.”

사람이 아닌 것으로 태어나도 돌아올 겁니다. 꼭 올 겁니다. 하니 제가 무엇으로 나든 부디 저어하지 마시고, 제 주인에게 말도 없이 떠나간 개라 밉다 마시고, 부디 곁에 서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무륜이 조용히 머리칼 위를 오가던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곤 손등에 입을 맞췄다.

“넌 내가 널 택하였다 그리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니다. 내가 네게 택함을 받은 거야. 이번 생에 이렇게 내게 와준 너를, 다음 생이라고 밀어낼 리 없잖느냐.”

그가 양손으로 내 손을 그러쥐고 거기에 제 얼굴을 묻었다.

“내 남은 생에 위사장은 너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무륜의 목소리는 잔뜩 젖어 있었다. 바다보다 깊은 진심이었다.

“내 평생 마음을 내줄 사람도 이화 너뿐일 게다.”

이화야. 내 어여쁜 이화야.

그 말에 결국 가는 물줄기 한 가닥이 뺨을 가로질렀다.

“평생, 당신의 이화로 살겠습니다.”

이 또한 바다보다 더 깊은 나의 진심이었다.

* * *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렀다. 그동안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여율령은 여느 때와 같이 물밑에서 움직였다. 평소엔 하얀 꼬리가 보이는 구렁이였다면 지금은 긴 수염을 단 잠룡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물밑을 휘젓기 시작했다.

위중혁은 오른쪽 눈에 푸르뎅뎅한 멍을 달고 돌아왔다. 나와 무륜은 할 말을 잃었다. 위씨 집안의 가주, 위혁강의 작품이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금국의 가문과 힘의 흐름에 대한 것을 익힐 때, 그에 대한 것도 들어 배웠다. 정계에서 물러나 현재는 칩거했으며 점잖고, 올곧고, 무인 주제에 폭력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가주 자리를 물려받고 싶다 했습니다. 아버님도 이제 나이가 있으시니 물러난 척만 하지 마시고 진짜 물러나 쉬시라고. 그랬더니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왔습니다.”

와. 아니, 와…….

“주먹만 날아간 게 다행이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몽휼이 했다. 위중혁이 몽휼을 노려봤다. 그래 봤자 저런 멍을 달고 있으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때 무륜이 내게 두루마리를 하나 건넸다. 얼핏 봤는데 저번에 내가 여율령으로부터 건네받아 무륜에게 전한 것과 같은 봉문이었다.

“지금 전해 주고 올 수 있겠나. 이런 하잘것없는 일을 맡겨 미안하다.”

“아닙니다.”

양손으로 받아 든 두루마리를 품에 넣은 채 바람처럼 궁을 가로질렀다. 내달리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무륜은 적법한 절차로 황위에 올랐다. 다른 황위 계승자도 남지 않았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기다리면 권력은 자연히 그에게로 모일 것이다.

문제는 그 시간이 부족해졌다는 거다.

제법 위세를 떨치는 관료나 가문은 몇 달 전까지 황태자 측 사람들이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중립이었다. 소수의 2황자나 3황자파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소수라 언급할 것도 못 되었다.

중립은 그나마 나았다. 본래 황태자파였던 자들은 무륜이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바로 숙이고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가장 강대한 두 가문 중 하나인 여씨 가문이 황제의 편에 서자, 겉으로 따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위중혁이 위씨 가주에게 저런 말을 한 이유는 짐작이 갔다.

위씨와 여씨가 함께 황제의 편을 든다면 그 아래쪽은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상황이 된다면 도태되지 않으려는 것들이 앞다투어 머리를 숙이고 기어들어 올 테니까.

‘하면 그냥 황제의 손을 들어 달라 위혁강을 설득하면 되는 것 아닌가?’

여율령에게 두루마리를 전하며 묻자 그는 ‘위중혁은 단순한 자라 중한 것은 제 손으로 지켜야 성에 차는 성정이다’ 하였다. 친아버지일진대 남이구나. 한편으론 그 또한 위중혁다웠다.

무륜이 있는 동관으로 돌아왔을 때, 집무실 앞엔 대벌레 두 마리가 거꾸로 서 있었다.

“다 너 때문이다, 소금쟁이. 네놈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됐고. 어디 장에라도 가서 눈치 좀 사 와라, 이 투구벌레야.”

“…….”

정정한다. 대벌레처럼 거꾸로 선 소금쟁이와 투구벌레였다.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모른 척 외면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 * *

타낙한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던지 무륜은 타낙한에게 붙여두었던 밀영군 중 한 명을 불러들였다. 하나 보고받은 내용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정말로 제 처소와 황궁의 뜰을 오가며 탱자탱자 늘어졌다. 가끔 궁인과 무사들을 상대로 추파를 던진다는 것 외엔 별다를 것도 없었다.

무륜과 나는 일에 파묻혔다. 무륜은 본래 처리해야 할 정무에 사절단의 일과 타낙한이 던진 거대한 돌이 더해져 쉴 틈이 없었다. 나 역시 금군, 밀영군과 함께 연회 때의 호위 계획과 동선을 짜고 세부 사항을 조율하느라 하루가 짧았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사이, 어느덧 사절단을 위한 연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연회 며칠 뒤면 그들은 여장을 꾸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갈 터였다.

‘내 생각엔 네가 내 왕빗감인 것 같아서.’

‘네가 내게 온다면 적어도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금국을 치지 않겠다. 시간을 줄 테니 한 번 생각해 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설령 그가 주절거린 말이 전부 사실이고, 내가 그 ‘이상’이라는 것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타낙한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상서령의 아들이며 이름이 여이화라는 것조차 그때 처음 듣지 않았나. 나도 그렇다. 그가 수백에서 온 ‘무뢰’라 했을 때 나는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그 정도로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그저 꿈꿔온 ‘누군가’와 생김이 비슷하다 하여 연모의 정을 고백한다고?

“하아.”

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더 생각해 봐야 혼란에 빠질 뿐이다. 이해하길 관두고 당장 내가 처한 현실로 눈을 돌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