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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2화 (52/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2화

타낙한은 인정했다. 자신은 선입견에 사로잡혀 무륜을 보고 있었다. 황위에서도 밀려난 채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 솥에 삶아진 개 따위. 틀림없이 그저 그런 사내일 거라 믿었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 하였거늘.’

실로 멍청했다. 그 시리한의 아들이 골골거리는 들개일 리 없잖은가.

타낙한은 어릴 적 딱 한 번 보았던 고모님을 떠올렸다. 아름답고 냉철한 분이셨다.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 같았다. 사내로 났으면 논란의 여지 없는 다음 대 왕이었을 것이라, 비틀린 칭양을 꼬리표처럼 달고 살던 분이기도 했다.

눈이 뜨인 기분이었다. 그래서 금국이 즉위 축하 사절을 요구했을 때, 두 번 생각 않고 저가 간다 하였다.

지한국은 금국과 달리 이미 오래전부터 후계가 타낙한으로 확정시됐다. 조금이라도 그의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은 이미 다 죽고 없었다. 그 뒷배를 자처한 세력은 전부 귀양을 가거나 아예 가문을 엎어 관비로 만들었다.

왕은 노쇠하여 병상에 누운 지 오래였고, 타낙한은 반년 전부턴 아예 왕의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타낙한의 아비인 다로한은 어리석고 욕심만 많은 왕이었다. 타낙한은 그가 숨이 넘어갈 때까지 썩어 문드러진 엉덩이를 왕좌에 붙이고 있을 것이라는 데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걸 수 있었다.

딱히 상관은 없다. 지금은 왕보단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태자’의 신분이 편해 머물러 있는 것뿐. 그가 왕이 되겠다 생각한 순간이 곧 정권 교체의 순간이리라.

“아무튼 일이 재밌게 됐어. 원하는 것이 생기면 손에 넣는 것이 왕으로 태어난 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미구르는 대답이 없었다.

타낙한은 뜰을 어슬렁거리던 걸 그만두고 배정받은 숙소로 돌아왔다. 침상에 대자로 누운 그는 양팔로 머리를 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한 타낙한은 두통 중에도 연신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 * *

연 대륙과 역사를 같이한 금국과 달리, 금국에서 떨어져 나온 지한국은 올해가 건국 420년째였다. 결코 짧다 할 수 없으나, 바로 옆에 보다 잘난 것이 있으면 비교하게 되는 게 사람이었다.

지한의 사람들은 짧은 역사에 은근한 열등감이 있어 역사적 사료와 뼈대 있는 설화 등에 집착했다. 특히 건국 설화와 관련된 것들에는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짧은 역사라 옛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었다. 지한(地漢)국은 본래 지한(地恨)이라 해서 한 맺힌 땅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명명한 건 지한국을 세운 시조로,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지한국이 ‘금국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점에서 예상할 수 있듯, 그는 금국 사람이고, 건국도 본래의 형태는 반란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금국 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겠고, 군세를 일으켰으니 틀림없이 군권을 손에 쥐고 있었을 자. 병부령, 못해도 대장군이라고 지한국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지.”

설화는 그 이름 모를 무관이 금국을 비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부패하고 타락한 이 나라를 더는 두고 보기 힘들구나. 상선이여, 부디 굽어살피시어 제게 힘을 주소서.]

그러자 상선이 나타나 시조에게 힘을 내려주었다.

사내는 신수와 같은 힘을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타인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봤으며, 거대한 바위를 생각만으로 허공에 들어 올렸고, 국지적인 날씨를 조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 힘을 이용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금국 영토의 1/4을 점령했을 때, 그는 돌연 전투를 멈추고 건국을 선포하여 왕이 됐다.

‘내, 힘을 받으며 한 가지 약조한 것이 있은즉, 지금부터 그 약조를 지키려 한다.’

그렇게 말한 왕은 직접 초상화를 그려 이 사람을 찾으라 했다. 신하들이 성별을 묻자 그는 알 수 없다 했다.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다고.

곧 새로이 지한국이 된 땅에서 초상화를 닮은 이들이 걸러져 올라오고, 그중 한 명이 초대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대대로 그 ‘이상’은 왕의 자격처럼 핏줄을 따라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내려왔다.

지한국에서 다음 대 왕이 될 자는 아주 어릴 때부터 뇌리에 낙인이 찍힌다. 또 만난 적도 없는 ‘그 사람’을 평생 그리워하고 지독히 원하게 된다.

“-라는 이야기인데, 어때. 흥미 있나?”

“…….”

있겠냐.

이화는 한숨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더 꾹 다물었다. 오늘도 비번인 그는 위사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청운관에서 홀로 수련에 정진하고 있었다.

무륜은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정무의 체계가 잡혔다곤 하나, 그뿐이었다. 선황 때 난 구멍을 메우려면 아직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그 와중에 각국 왕족이 포함된 사절이 와 있었고, 그들을 위한 연회가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여느 때처럼 짬을 내어 그가 있는 곳으로 몰래 온다거나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게 되는지라. 이화는 여율령의 저택에 가지 않고 예 머물러 있었다. 그랬었는데…… 오라는 임은 안 오고 웬 놈팡이가 얼쩡거렸다.

“제겐 무슨 볼일이십니까.”

“내 생각엔 네가 내 왕빗감인 것 같아서.”

사방에서 쨍그랑, 쨍, 쨍, 난리가 났다. 검을 떨어뜨린 위사들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화는 어이가 없어 결국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나를 봐주는군.”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음. 어떻게 하면 그대를 꼬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일국의 태자라는 자가 어휘 한번 저렴했다.

“말 나온 김에 어때. 나와 함께 지한국으로 가서 내 왕비가 되어주지 않겠어?”

말 나온 김 같은 소리 하네. 이건 그냥 미친놈이었다. 이화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자세를 바로 한 그가 다시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쑥 들어온 손이 이화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타낙한이 제 얼굴을 이화에게 바싹 들이밀었다.

“들어야지.”

움칠한 이화는 움직이지 못하고 굳었다. 힘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는 지금 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미친놈이라지만 일국의 태자. 잘못하여 그를 다치게 할까 염려해서다.

타낙한은 그런 이화의 생각과 상태를 훤히 꿰고 있었다. 눈매를 얄팍하게 접은 그가 부러 칼날 쪽으로 몸을 붙이며 말했다.

“하면 이건 어때. 나는 지금 전쟁을 준비 중이야. 연 대륙 전체를 집어삼킬 만큼 아주 큰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저, 저하!”

타낙한의 명령으로 멀찍이 서 있던 지한국 가신들이 기함했다. 경악한 그들의 낯에서 진실을 읽은 이화의 낯이 다른 의미로 굳었다.

“제게 그런 말을 하시는 목적이 뭡니까.”

“이런 말을 듣고도 침착하네. 심지어 사실이라고 생각했으면서. 더더욱 마음에 들어. 내 비가 되려면 이 정도 강단은 있어야지.”

“목적을 여쭈었습니다. 대답하지 않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그냥 가겠다고?”

가야 한다. 무륜에게 가서 당장 이 사실만이라도 전해야 했다. 미련 따위 없이 어서 놓으라고 종용하는 눈빛에 타낙한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연애는 먼저 반하는 쪽이 지는 거라더니.”

뭐래, 미친놈이.

“크흡.”

웃음을 삼킨 그가 불쌍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쟁은 올가을이 끝나갈 때 일으킬 거야. 남방 5국은 침묵할 거고, 지한국은 금국을 집어삼킬 거다.”

그렇게 말한 타낙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천태백산 꼭대기서 내려다봤던 북방 설원이 꼭 저러했다.

“네가 내게 온다면 적어도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금국을 치지 않겠다. 시간을 줄 테니 한 번 생각해 봐.”

볼일은 끝났다는 듯 타낙한은 몸을 돌려 멀어졌다. 이화는 그의 뒷모습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타낙한으로부터 들은 걸 나는 그대로 무륜에게 전했다.

무륜은 전쟁보다 타낙한의 조건에 크게 분노했다. 당장 금군에게 놈을 추포하라 명하려는 걸 몽휼과 내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얼마 전 복직한 위중혁은 갈까요? 지금 갈까요? 하며 눈만 빛낼 뿐,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반쯤 어르고 달래어 무륜을 진정시킨 후, 우리는 진지하게 의견을 나눴다. 중점이 되는 건 역시 타낙한의 말이 사실이냐는 거였다.

“사실일 겁니다.”

문이 스르륵 열리며 여율령이 안으로 들어섰다. 무륜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상서령을 부른 적이 없거늘.”

감히 누가 불렀냐는 물음에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제가 청했습니다. 상서령의 고견을 빌리고자……. 그게 폐하의 심기를 상하게 할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주 잘했다.”

무륜이 태도를 싹 바꾸어 나를 칭찬했다. 몽휼은 작게 ‘허’ 하는 소릴 냈고, 여율령은 뱀처럼 웃으며 착석했다.

“아까 말했듯, 타낙한의 말은 대체로 사실일 겁니다.”

여율령은 암묵단이 조사한 것이라며 그 근거가 될 만한 자료도 늘어놨다. 침음을 삼켰다. 그리 가볍게 말한 것이 죄 사실이었을 줄이야.

“설마가 사람을 잡았군.”

무륜의 말에 몽휼이 흠칫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내 물음에 여율령은 여상한 어조로 답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이화 너를 왕비로 내주는 것이지.”

무륜이 쥐고 있던 노대가 그대로 손안에서 으스러졌다. 몽휼이 양손으로 덮치듯 위중혁의 검대를 움켜쥐고, 나는 무륜에게 달라붙어 고개를 저었다. 여율령은 여전히 홀로 태연한 신색이었다.

들썩임이 잦아들길 기다린 그는 차분히 제 의견을 말했다.

“만약 상책이 싫으시다면 지금부터라도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마 그래도 많이 늦을 겁니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죠.”

선황 때부터 금국은 모든 곳이 조금씩은 썩어 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썩진 않았으되, 가장 크게 흔들린 곳은 다름 아닌 병부였다.

최악이다. 자리에 있던 이들의 생각이 드물게 하나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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