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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1화 (51/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1화

“나는 분명 상서령에게 직접 가져오라 일렀는데 어찌 네가 왔느냐.”

손끝이 움찔했다. 고개가 버릇처럼 아래를 향했다.

나무라시는 건가? 그렇게나 중요한 문부였나? 하면 실수했다. 어쩌지. 주제넘은 짓을 했다 생각하시려나.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곱은 손을 억지로 펴며 말했다.

“제가 가져다드리겠다 했습니다.”

“그래도 제 아비라고 상서령을 감싸려는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농처럼 말했다. 다행히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무륜이었다. 안도하며 사실을 말했다.

“아니요. 정말로 제가 그러겠다 했습니다. 폐하가 보고 싶었으니까요.”

“…….”

“폐하?”

그는 대답 대신 입맞춤을 했다. 방금과 달리 혀가 오가고 타액이 섞이는 질척한 접문이었다.

눈매가 이지러졌다. 탄탄한 팔이 뱀처럼 내 허리를 옥죄었다. 혓바닥이 입천장을 콱 누르자 그만 허리가 쑥 빠졌다. 힘이 풀려 휘청거리자 나를 휘감은 힘이 더 강해졌다. 무륜은 굳건한 기둥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접문은 그러고도 한참을 이어졌다. 무륜은 반쯤 늘어진 나를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널 어쩌면 좋으냐.”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널 어쩌면 좋아.”

그 말이 어찌 그리 귀에 달던지. 나는 말없이 어리광을 피우듯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 * *

타낙한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뜰을 지나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최대한 자제하고 있으나 지금 심경 같아선 궁의 처마 위에라도 올라 크게 웃고 싶었다.

‘세상에.’

그가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정말 있었어.’

심장이 뚝 떨어질 만큼 놀랐다. 그토록 제 이상에 딱 맞는 얼굴을 타낙한은 처음 보았다. 상상 이상의 충격이었다.

걷기 시작하고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는 가장 먼저 누군가를 떠올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였다. 그건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기도 했다.

그에 대해 주변에 묻자 모두가 기뻐하며 당신께서 왕의 재목을 타고나 그러하다 했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타낙한에게 지한국의 건국 설화를 들려줬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태반이었으나 한 가지는 알았다. 그는 운명이라는 것. 역대 황후들의 초상화가 다 비슷비슷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타낙한은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그는 태어나 첫 숨을 터뜨린 순간부터 죽음까지의 길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거기에 반려가 더해진다 한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시간과 함께 찾아왔다. 몸이 자랄수록 그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졌다. 세상 어디 있는지, 정말 존재는 하는 건지. 그렇게 그리워하는 날이 늘수록 이상의 모습은 점점 선명해지고 구체적이게 되었다.

그리고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를 깨부술 것 같을 때도 있었고, 통증이라 부르기도 뭣할 만큼 잔잔할 때도 있었으나,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주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신료들은 이번에도 기뻐했다. 그리 자세하게 떠올릴 수 있다는 것과 원인 불명의 두통은 시조의 핏줄이 강한 증거라면서.

타낙한은 분이 치솟았지만 이번에도 결국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그는 기본적으로 냉정했다. 어차피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안 이상, 분노해도 저만 손해였다.

그리고 그가 약관이 되었을 때. 온 지한국에서 비빈 후보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성별에 상관없이 전부 한 사람을 닮아 있었다. 역대 지한국의 모든 국모가 닮았던 사람. 그러나 정작 그 얼굴을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는 사람을.

하나 그중 타낙한의 마음에 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한 신료가 간언했다.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은 십분 이해하나 지한국을 통틀어 가장 ‘이상’에 합하다 여겨지는 이로 추렸습니다.’

다른 신료가 말을 거들었다.

‘역대 모든 왕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완전한 이상은 없나이다.’

타낙한은 그 자리에서 두 신료의 목을 벴다. 모두가 놀라고 타낙한도 놀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내 억눌러 둔 분노가 터져 나왔다. 더는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다니. 무감하고 무심한 용의 역린을 건드린 건 다른 무엇도 아닌 그 한마디였다.

손에 든 검을 내려다본 그가 장내로 시선을 돌렸다. 신료들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떨고 있었다. 타낙한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업보처럼 함께 해온 답답함이 아주 조금 가셨다.

궁이 발칵 뒤집혔다. 하나 그뿐이었다. 누구도 타낙한을 벌하지 못했다. 왕은 이미 쇠락했고, 타낙한은 떠오르는 해였다. 곧 만인지상이 될 분을 벌할 수 있는 자가 뉘 있으랴. 그 후로 타낙한은 패도의 길을 걸었다.

그런 타낙한이 이번에 사절로 가겠다 나섰을 때, 그의 성깔을 아는 대소신료는 비겁한 침묵을 택했다. 기함한 건 왕실의 어른들이었다. 쏟아지는 노호 속에도 타낙한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봤다.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말꼬리를 늘이며 하나둘 침묵한 늙은것들은 타낙한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타낙한은 파랗게 질린 그들을 내려다봤다.

‘지한국의 법도와 법률은 전부 훑어봤습니다. 태자가 사절단으로 가지 못할 이유 따윈 없더군요. 그럼에도 제가 금국으로 가는 것이 마음에 안 차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 말씀하십시오.’

침묵하는 그들을 훑어보며 타낙한이 말했다.

‘기억해 둘 테니까.’

늙은이들은 타낙한이 떠나는 날까지도 계속 침묵했다.

아무렴 그래야지. 흥. 코웃음을 친 타낙한은 생각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아까 본 자신의 ‘이상’. 그는 상서령의 아들이었고, 황제가 된 무륜의 위사장이었다. 이름은 여이화라 했다.

“어쩜 이름도 저같이 어여쁠꼬.”

혼잣말에 뒤따르던 이들이 일제히 흠칫했다.

“이 먼 금국까지 온 보람이 있었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미구르.”

“저하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미구르의 낯이 떨떠름했다. 정확히는 혼란스러워하는 거였다. 미구르만이 아니다. 이번에 데려온 이 전부 아까 본 위사장이라는 자의 얼굴이 뇌리에 아른아른할 터였다.

타낙한은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그는 여장을 꾸릴 때만 해도 꽤나 복잡한 심경이었다. 금국에 오게 된 경위 자체가 썩 좋지만은 않았던 탓이다.

각성 이후, 타낙한은 자신이 짠 판이 어긋나는 걸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것이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이나 인간의 변심 같은 불확정 요소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한데 최근 후자에 의해 판이 어긋나는 사건이 있었다. 5황자 무륜의 망명 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딱 이맘때였지.’

2년 전, 타낙한은 무륜으로부터 망명을 원한다는 서한을 받았다. 무륜의 어머니이자 지한국 공주였던 2황비 시리한이 죽고, 그가 북궁에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무륜은 금국의 황실에 강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궁중 암투로 어릴 적부터 목숨의 위협에 시달리다 결국 여동생을 잃고, 아비인 황제에게 개처럼 부려먹힌 끝에 세력이 좀 커졌다 싶자 바로 팽 당했으니까.

하지만 그쯤은 어느 왕실에서든 있는 일이다.

타낙한은 무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 무륜은 나약한 패배자였다. 여태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아마 황자 신분임에도 특급 무사라는 특이점 때문인 것 같은데, 궁이라는 곳은 그것만으론 살아남을 수 없었다. 심지어 황자라면 영민하기보단 영악해야 했고, 강함보단 독함이 필요했다.

‘하긴 그게 안 됐으니 황자씩이나 돼서 사냥개로 쓰였겠지.’

해서 타낙한은 그쪽으론 관심을 껐다. 대신 무륜의 망명을 받아들였을 때의 이해득실을 철저히 계산해 봤다. 그의 황위 계승권을 계속 유지할 방책과 다른 황자들에 대한 정보도 전부 훑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그의 망명을 수락하기로.

일단 계획이 서자 진행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주고 정세를 살피는 한편, 들키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해 날을 잡았다. 그 과정에만 약 반년이 걸렸다. 길게 걸린 만큼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랬던 판을…….’

마지막에 와서 무륜이 엎었다. 송구하고 어쩌고저쩌고. 결국 못 가겠단 소리를 적은 서한을 받았을 때, 타낙한은 코웃음을 치며 서한을 던져뒀다. 또 자신이 따로 물을 때까진 5황자에 대한 보고를 일절 하지 말라 일러뒀다.

‘팔다리가 잘려 팽 당한 개새끼가 무슨. 좀 있으면 울면서 한 번만 다시 받아 달라 하겠지.’

대체로 잘 들어맞는 타낙한의 예상이었으나 이때는 달랐다. 살짝도 아니었다. 완전히 빗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뒤, 타낙한은 금국으로부터 도착한 소식에 마시던 차를 뿜었다. 펄쩍 뛸 만큼 놀란 그는 현 금국의 정황에 대한 자료를 전부 가져오라 명했다. 곧 빽빽한 글자가 들어찬 보고서가 올라왔다. 타낙한은 토씨 하나 빠짐없이 읽어 내렸다.

마지막까지 읽은 타낙한이 보고서를 툭 던지며 첫마디를 뱉었다.

‘더럽게 운 좋은 새끼.’

실로 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아니, 게다가 이 나라는 뭐 이래. 연 대륙 최강국인 금제국이잖아. 그 제국의 대가리를 달리기 시합으로 정해? 미쳤나? 하. 허. 하.

탄식할 만큼 탄식하고 욕할 만큼 욕한 그는 금방 냉정을 찾았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금국과 국경을 맞댄 지한국의 실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 후엔 차분히 금국을 주시했다.

결과는 이번에도 타낙한의 예상을 빗나갔다.

간헐적으로 받아 본 보고로 알게 된 무륜의 행보는 독보적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알던 무륜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무륜은 결국 가장 먼저 천태백산 정상에 도달해 금국의 새 황제가 됐다.

그 무륜이.

북궁에 유폐되어 죽어가던 비루먹은 사냥개가!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했다. 그렇구나. 밖에서 수집한 정보와 주고받은 서한만으론 이게 한계인 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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