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0화
나는 말고삐를 쥐고 그대로 뛰어올랐다.
“내 일인데 어째 네가 급해 보이는구나. 하긴 문부는 핑계고 제 임 보러 가는 건데, 황궁이 아니라 위금강 이남이래도 한달음에 가겠지.”
나와 흑월이 동시에 흠칫했다. 눈을 돌려 흑월을 봤다. 난 그렇다 치고 흑월 넌 왜?
“한데 그 차림으로 갈 셈이냐?”
그 말에 차림새를 다시 확인했다. 남청빛의 단정한 무복. 영웅건을 두르고 허리띠도 맸다. 먼지는 아까 흑월이 털어줬고, 땀도 흘리지 않았다.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어 여율령을 쳐다보자 그는 ‘본인이 괜찮다면야’ 하곤 설렁거리며 집 안쪽으로 되돌아갔다. 잘 다녀오십시오. 흑월이 눈짓으로만 말하고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보다 말 머리를 돌려세웠다. 요 근래 매일 어울려 다닌 탓일까. 고작 하루 못 봤을 뿐인데 무륜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조바심 나는 마음 그대로 말을 재촉했다.
* * *
예상대로 황궁은 정신이 없었다. 제 일에 관해선 철저한 여율령이 보고할 문부를 하나 빠뜨린 것도 이해가 갔다. 구석구석 급하게 단장한 티가 났다. 분위기 자체도 어수선했다.
이거 만난대도 노닥거리진 못하겠구나. 아쉽다 생각 말자. 얼굴 보는 게 어디냐.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봐, 거기.”
중앙궁으로 이어지는 외부 복도를 지날 즈음이었다. 누가 시비라도 부르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남청색 무복의 무사. 내 말이 안 들리나?”
남청색 무복이라는 말에 발이 멈췄다.
“그래. 거기 너 말이다, 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외궁의 뜰에 일단의 무리가 서 있었다. 방금까진 어느 누가 감히 황제의 위사장을 옆집 종복 부르듯이 부르나 의아해했는데 낯선 복식을 보고 이해했다.
‘사절단이군.’
어느 나라인지는 몰라도 틀림없었다. 그들은 귀족으로 보이는 셋과 일곱의 호위로 구성되었다. 날 부른 건 맨 앞에 선 자로, 아마 귀족이 아니라 왕족일 것이다. 나머지는 황궁의 내관과 시비였다. 내관 중 하나가 나를 보더니 슬그머니 빠져서 어디론가 향했다.
“잠깐 이리 와보거라.”
다시 한번 절감했다. 여율령은 틀림없이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으니 그의 말은 웬만하면 따르자고.
지금 내가 입은 건 틀림없이 단정하고 깔끔한 무복이었으되, 황궁 안에선 무록관인 이류 무사들이 주로 이리 입었다. 위사장의 정복을 입었으면 이렇게 불려 가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한숨을 삼키며 몸을 틀었다.
“절 부르신 겁니까.”
“그래. 너 말이다, 이리 가까이 와봐라.”
우선 시키는 대로 했다. 이름만 물으면 바로 해결될 일이니 조급해하지 않았다.
멀리서도 느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거한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구비는 뚜렷했으며, 선이 굵고 눈썹은 짙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놀란 낯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뭐지? 주춤했으나 맨 앞에서 아직도 손짓을 하고 있는 사내 때문에 안 갈 수도 없었다.
“더 와라, 더.”
이미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였다. 여기서 더 가까이라니. 머뭇거리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혀를 찬 사내가 불쑥 다가왔다.
붙어 서자 그의 덩치가 더욱 확연히 와 닿았다. 왕족으로 추정되는 사내는 거한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컸다. 어떻게 봐도 천생 무골이었다. 키가 나보다 한 뼘은 컸고 덩치는 족히 두 배는 됐다.
그래서 이름은 언제 물어보려나. 멍하니 생각했을 때, 손이 턱 밑을 파고들었다. 움칠했으나 맨손이라 저지하지 않았다.
타국의 왕족이 위사장에게 손을 대는 건 사과하면 넘어갈 일이나 그 반대는 있을 수 없었다. 잘해도 징계에 못하면 지하 뇌옥행인데, 한 달 만에 거길 다시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라 앓는 소리를 삼키며 잠자코 있었다.
턱이 위로 들렸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짙은 남색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열기가 감돌았다. 깊은 눈이었다. 그 반대편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부류를 두고 여율령이 한 말이 있다. 상종해서 좋을 것이 없는 치들이라고.
“귀족이냐?”
“상서령이 제 아버지 되십니다.”
나는 출신이 천해서 엄밀히 말하면 귀족은 아니었다. 여율령의 양자일 뿐. 그래서 그의 이름을 팔았다.
“아, 그렇군. 자네가 바로 그…….”
말끝을 흐린 사내가 방금과는 조금 달라진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 출신 때문이라고 하기엔 다소 묘한 반응이었다.
핏줄을 문제 삼는 자들의 시선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황궁에는 아닌 척하지만 그런 치가 제법 많았다. 정 3품 이상의 꼬장꼬장한 노인네들은 아예 대놓고 탐탁잖아 했다. 그들은 모두 명문가를 자처했다. 또 끼리끼리 사돈을 맺어 금국의 ‘귀족’이라 불리는 핏줄을 형성했다.
우스웠다. 자칭한다는 것부터 명문가와는 거리가 먼데 말이다. 다 쭉정이였다. 그들을 다 합쳐도 가장 강대한 두 가문에 비할 바가 못 되었고, 그 두 가문은 그들 무리에 들지 않았다. 범이 늑대 무리에 들지 않듯이.
그 두 가문은 무가의 위씨와 내가 속한 문가의 여씨였다.
“이거 내가 실례를 했군.”
드디어 사내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귀힘이 어찌나 센지 그것 잠깐 잡혔다고 턱이 얼얼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의외로 천생 무골일 것 같던 사내는 잘 쳐줘야 일류 무사 수준이었다.
이상하게 여기다 곧 납득했다.
하긴 상대는 왕족이 아닌가. 특이한 건 무륜이었다. 보통 왕족에게 무위란 제 몸 하나 지킬 수준으로만 요구된다. 어차피 몸을 던져 지켜줄 사람이야 차고 넘치니까.
“나는 수백의 4왕자인 무뢰라 한다.”
별로 뛰어나지도 않은 자가 아귀힘이 세다 했더니, 역시 수백인가. 뒤에 ‘배’자만 붙이면 딱일 것 같다며 속으로만 비꼬았다.
“황제 폐하의 위사장인 여이화입니다.”
“호오. 상서령의 아드님은 위사장이셨군! 한데 어째서 그런 무복을 입고 궁내를 돌아다니는 중이지?”
“오늘은 본래 쉬는 날이었습니다. 궁에는 상서령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심부름이라니. 그건 보통 종복이나 거느린 무사들이 하는 일 아닌가.”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살살 무시하며 건드리는 그의 눈앞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확 들이밀었다. 사내의 뒤편에 선 자들이 일제히 검대에 손을 얹었다. 귀족이라 생각했던 자들의 움직임도 보통이 아니었다.
‘귀족인 척하는 호위거나 실제 귀족이지만 호위로 데려왔거나. 둘 중 하나군.’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여기 보시면 붉은 끈이 감겨 있습니다. 이는 ‘기밀’을 뜻합니다. 또 봉문에 금색 인장이 보이시죠. 이는 금국 황실의 직계만이 열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시점에선 황제 폐하 한 분뿐입니다.”
그러니까 어쭙잖은 자의 손을 타선 안 되는 물건이다, 이 말이야. 두루마리를 거두었다. 눈앞에 다시 드러난 사내는 멍청한 표정이었다.
“아들에, 위사장쯤 되지 않고선 함부로 전할 수 없는 문부이죠.”
당당하게 턱을 들며 무뢰를 봤다. 자, 다 들었으면 어서 날 보내. 이래 봬도 갈 길이 바쁜 사람이다.
“하, 하하하!”
그는 갑자기 파안대소했다. 허리를 숙이는 건 기본이요, 배까지 움켜쥐었다. 판때기 같은 등판이 푸들푸들 떨렸다.
“하하하, 미치겠네. 하하.”
“…….”
나야말로 미치겠다, 이 미친놈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 멀뚱히 있는데 외부 복도 끝에서부터 반가운 기척이 가까워졌다.
“이 나라의 홍복을 뵙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정식으로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평신하게.”
고개를 들다 움찔했다. 다소 흐트러진 의관과 숨. 거기에 평소보다 창백한 뺨까지. 어떻게 봐도 놀라서 급히 온 행색이었다. 빠르게 나를 훑은 무륜은 별 이상이 없자 무뢰를 향해 돌아섰다.
“예서 뭘 하고 계십니까, 타낙한.”
귀를 의심했다. 타낙한이라고? 무뢰가 아니라? 고개가 팩 돌아갔다. 기다렸다는 듯 날 보고 있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씩 웃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여태 제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지한국 태자, 타낙한이라 합니다.”
* * *
타낙한과는 뜰에서 그대로 헤어졌다. 그는 그럼 연회 때 뵙겠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다 손목이 잡혔다. 무륜이었다. 그는 뭔가 말할 듯 입을 달싹이다 결국 말없이 나를 이끌고 본궁에 들어섰다.
집무실로 가시려나 했는데 아니었다. 그가 곧장 향한 곳은 동관에 있는 그의 처소였다.
보랑을 가로질러 침전까지 당도한 그가 당황해 굳은 시비들을 향해 문 열어라, 일갈했다. 시비들이 흠칫하여 재빨리 양쪽에서 문을 열었다. 평소 마음을 편케 해주던 나뭇결의 부드러운 소리도 소용없었다.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무륜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보았다. 잡힌 곳이 아려오는 기분이었다. 북궁에서 함께 밤하늘을 보며 공유했던 침묵과는 달랐다. 불편하고 숨이 막혔다.
싫다. 어느 때보다 강렬한 부정이 뇌리에 떠올랐다.
다른 이면 모를까. 무륜과 함께 있으면서 발치에 깨진 얼음 조각이 흩뿌려진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해서 뭐든, 정말로 아무 말이든 꺼내려는 순간-
그가 나를 왈칵 끌어안았다. 무륜의 체향이 확 들이치며 그의 온기가 나를 감쌌다.
날 선 기분이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등을 휘감은 무륜의 팔이 희미하게 떨렸다. 나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했을 그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타낙한, 그자가 무슨 짓을 했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인가?”
“예. 정말입니다. 다만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수백의 왕자라고 망설을 하긴 했습니다.”
“그게 다냐.”
“예.”
“그래. 그럼 되었다.”
안도의 한숨이 내 머리칼을 간질였다. 겨우 떨어진 그가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솜털 같은 입맞춤이었다.
“오늘은 상서령의 저택에 머무른다 들었는데. 황궁엔 어쩐 일이냐.”
“이것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이건…….”
봉문된 두루마리를 내밀자 그의 눈에 잠깐 이채가 서렸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