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9화 (49/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9화

파직. 발밑에 나뭇가지가 밟혔다. 단검이 번개처럼 내 턱 밑을 찔렀다.

“졌다.”

양손을 들어 보이자 흑월이 단검을 치웠다. 그가 내 어깨며 등에 붙은 먼지를 털어줬다.

“됐어. 어차피 갈아입을 건데.”

흑월이 내 등에 글귀를 적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대답하며 위를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창창한 하늘이었다. 눈이 부셔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응. 좋은 것 같아.”

* * *

황궁은 오랜만에 활기를 띠었다. 지한국과 남방 5국의 사절들이 도착할 때가 가까운 까닭이다. 그들을 위한 연회 준비로 궁이 들썩이고 있었다. 때마침 성의 호위 인력과 군사의 보충이 이루어졌고, 내가 비번인 날도 늘어났다.

근무표를 받아 쓱 훑어본 후 무륜을 봤다. 나를 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영 복잡한 표정이었다. 안절부절못하기도 했다. 흑월 덕에 사람의 내심을 읽는 데 도가 튼지라 그의 생각과 불안이 손에 잡힐 듯했다.

설마 그런 말 들었대서 제가 변할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아니면 당신을 저어할까 염려하셨습니까. 그리 겪고도 아직 절 모르십니까. 그런 내심을 전부 담아 웃었다. 사르르 녹아내릴 듯한 미소였다.

무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더니 이내 내 것과 같은 미소가 만개했다.

“허.”

누군가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나와 무륜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몽휼이었다.

파리하게 질린 그가 우릴 번갈아 봤다. 곧 마른세수하곤 ‘아니, 뭐. 하아……. 예. 알겠습니다’ 했다.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감탄사로 점철된 다섯 마디에 굉장히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 밤 이후, 무륜과 나 사이엔 작은 변화가 일었다. 겉에서 보기엔 이슬처럼 작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물처럼 거대한 변화였다.

내 근무표를 나보다 정확히 외운 무륜은 비번인 날이면 몰래 처소로 찾아들었다. 그리고 내가 몇 안 되는 문부를 처리할 동안 무릎을 베고 오수에 들었다. 일이 끝나면 어린애 장난처럼 손가락을 얽고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이야기였다. 대체로 선문답이었고 항간에 떠도는 풍문이나 설화, 민담집의 일화일 때도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딱히 정해진 게 없었다. 정할 필요도 없었다. 무륜과 나는 우리 사이에 오가는 대화 그 자체가 좋았다.

여태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일을 우린 함께 겪고 헤쳐 나왔다. 하나 정작 그 사이엔 그다지 말이 없었음을 그와 나도 뒤늦게 알게 됐다.

사실 그럴 만했다. 겨우 재회했던 초봄부터 오늘까지. 휘몰아치는 사건에 떠밀려 그저 버티고 이겨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네가 처음 5황자 궁에 왔을 때. 그때 이리 차분히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았을 것을.”

참으로 아까운 짓을 했다며 무륜은 연신 혀를 찼다.

“그땐 말없이 오가는 게 많았잖습니까. 저만 그리 느꼈나요?”

내 말에 구겨졌던 무륜의 미간이 활짝 폈다.

“아니다. 네 말이 옳다. 생각해 보면 고작 반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 굉장히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구나.”

“그렇습니까? 전 반대입니다. 목련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전하를 기다리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습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우린 말없이 마주 보고 웃었다.

세상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 바로 지금의 그와 나처럼. 또, 말로 전하지 않으면 결코 모르는 것도 있다. 곧 다가올 나의 죽음처럼.

‘첫눈이 오는 날까지.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과연 참아낼 수 있을까.’

장담은 할 수 없다. 심지어 이미 벌써 말할 뻔한 전적도 있다. 그때 무륜이 첫눈이라 기한을 정하지 않았으면 이미 온갖 연모의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런 얼굴이냐.”

내 얼굴이 어떻기에?

“사고 친 똥강아지 같은 얼굴.”

그만 웃어버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초조했고, 여전히 그에게 감춰야 할 것이 있었다. 그에게서 좋아한단 고백을 들은 후에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

“잘못 보신 겁니다.”

무륜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나는 대놓고 화제를 돌렸다.

“그보단 오늘 잠행이나 나가시렵니까. 이제 저녁이고, 내일부턴 폐하께서도 일이 바쁘시지 않습니까. 남은 하루가 아깝습니다.”

“내 일이 바쁜 걸 네가 어찌 아느냐.”

몽휼에게 들었다. 하나 이걸 그대로 말했다간 필시 대전에 거꾸로 선 대벌레가 출몰하겠지. 나는 모른 척 말했다.

“누군가 언질을 주었습니다.”

“몽휼이군.”

그러나 무륜에겐 통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몽휼.’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구석의 장롱을 열고 잠행에 쓰는 옷을 꺼냈다. 내 것만이 아니라 무륜의 것도 있었다.

잠행은 처음이 아니다. 처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지겨워지면 이렇게 무륜과 황궁을 벗어나 시가지로 향하곤 했다. 돌아오면 야차 같은 낯의 몽휼과 위중혁이 있겠지. 무륜이 헛기침을 하며 무게를 잡아도 그때만큼은 소용없다.

나란히 앉아 한참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 후 잠행엔 몽휼과 위중혁 둘을 꼭 동행하기로 했으나 잘 지키진 않는다. 그보단 외려 아예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는 편이었다.

나쁜 쪽으로 마음이 맞은 무륜과 나는 이전보다 더 치밀하게 계획하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황궁 지리를 세세하게 알며, 금군과 밀영군의 배치를 마음대로 손댈 수 있고, 특급인 무사. 그런 이가 작정하고 움직이자 황궁의 담장을 넘는 일도 식은 죽 먹기였다.

명목은 민심을 살피기 위한 잠행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건 그냥 노는 거였다.

왁자한 도성의 중심가를 걸었다. 다원에 들러 신기한 차를 맛보거나 배가 고프면 사람이 많다 싶은 객잔에 들어갔다. 배가 차면 다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한약 냄새 가득한 약방. 싸구려 장신구를 파는 좌판. 대부분은 스치듯 지나쳤으나 그냥 지나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엿판이었다. 그를 보면 무륜은 꼭 사서 하나는 내 입에 넣어주고 나머진 주머니에 싸 손에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 맞잡고 있는 손이 더는 어색하지 않았다.

평범한 옷으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든 후, 비로소 나는 내 나이를 실감했다. 올해 스물넷인 그의 나이도 확 와 닿았다.

자란 환경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 이르게 어른이 되었다. 이렇게 있으니 잃어버린 시간이 조금이나마 채워지는 듯했다.

입안에 든 엿을 우물거리며 그와 함께 도성 구석구석을 누볐다. 즐거웠다. 이토록 즐거운 날이 또 언제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의 옆에선 푸른 것이 더 푸르게 느껴졌다. 지름길이라며 가로지른 좁고 음습한 골목조차 비밀스럽고 안락할 따름이었다. 하루걸러 하루. 무륜이 사라졌음을 눈치챈 밀영군이 기함하여 쫓아오는 그런 일탈을 즐겼다.

* * *

매일이 즐거운 까닭일까. 시간이 여느 때보다 빠르게 흘렀다.

8월 중순에 접어들어 사절들이 도착하는 당일. 애매한 비번이었던 나는 몽휼의 권유로 오랜만에 저택에 돌아왔다. 사절이 오니 위사장인 내가 자리를 지키는 게 낫지 않겠냐 했으나, 그는 비번은 비번이고 규율은 규율이라며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분명 뭔가 있었다. 하나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무륜의 그림자인 몽휼이 이런다는 건, 그의 뜻도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하여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몽휼이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마디 해주었다.

‘지한국의 태자, 타낙한을 조심하십시오.’

지한국이라면 무륜의 외가인 ‘한’ 왕가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남방 5국의 사절도 아니고 지한국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찬찬히 생각하다 알아차렸다. 사절이 오는 시기에 유독 비번인 날이 많은 것도 무륜의 손이 닿은 결과였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고, 무륜은 나에게 그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거기서 곧바로 손을 털었다. 그렇다면 몰라도 되는 것이므로. 다만 몽휼의 충고는 기억해 뒀다.

쿨럭.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각혈이었다. 혀를 차며 품을 뒤졌다. 빠르게 다가온 손이 한발 먼저 내 입가에 천을 댔다. 흑월이었다.

“고맙다.”

흑월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훈련은 여기서 끝이다. 피를 대충 닦고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활기는 넘쳐도 보통 조용한 저택이 어째 소란스러웠다.

중문 근처에서 관복을 갖춘 여율령이 종복 몇을 모아두고 뭔가 지시를 내렸다. 옆에는 암묵단원 한 명과 말도 한 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며 알은체를 했다.

“나가십니까.”

“그래. 급히 궁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

“궁에요?”

“음. 그보다 넌 오늘도 흑월과 대련을 했느냐.”

“대련까진 아니고 은신의 연습을 그가 도와줬습니다. 제가 어떤 상태인지는 압니다만, 내력의 운용이나 사용엔 무리가 없습니다. 간혹 각혈하는 걸 제외하면 평소와 같은데 굳이 아픈 척 병자로 있을 필욘 없잖습니까.”

“그래. 마냥 우울하게 웅크린 것보다는 낫다. 그래도 유의하거라. 몸에 이상이 생기거든 바로 내게 알리고.”

여율령의 손이 내 어깨를 꽉 잡았다 놓았다.

힐긋 시선을 내렸다. 그가 직접 손에 든 두루마리가 보였다. 붉은 실로 묶고 금색 인장으로 봉했다. 황족이 아니면 열어 볼 수 없는 봉문이었다.

“그 문부, 제가 전해도 되겠습니까.”

“네가?”

“직접 걸음 하신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라는 뜻 아닙니까. 여기서 그를 대신 전할 만한 이는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암묵단은 실력이 뛰어나나 어디까지나 여율령의 사설 조직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은 황궁 출입이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개인 호위 자격으로 흑월은 그 예외에 해당됐으나, 지하 뇌옥 사건 이후 한동안은 그 역시 저택에 발이 묶였었다.

“요즘 안 그래도 일이 바쁘신 줄 압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것 뭐 있습니까. 여기 노는 손이 있는데.”

“방바닥 구르느라 바쁘다던 놈이 웬일이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율령은 순순히 문부를 건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