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8화
“대외적으론 금군과 밀영군의 합동훈련이었거든. 가장 국력이 강해야 할 때에 병부가 비실거리는 상황이니 그네들도 마지못해 찬동했지. 내일이면 소문이 다 날 테니 또 한동안 상소 더미에서 못 벗어나겠구나.”
장난스러운 한탄에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무륜은 그런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폐하는…… 겪으면 겪을수록 그저 신기한 분이십니다.”
“나도 그렇다.”
“예?”
“가끔 내가 사람을 상대하는지 목련의 화신을 상대하는지 모르겠더구나.”
갑작스러운 칭양에 당황했다. 붉어진 뺨으로 어물거리며 되물었다.
“그 무슨 황망한 말씀이십니까.”
“황망이라. 어느 부분이 말이냐.”
“제가 어찌 목련의 화신일 수 있겠습니까.”
무륜의 손이 내 뒷덜미에 닿았다. 보지 않아도 눈앞에 그려낼 수 있는, 길고 마디진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문질렀다.
“이화.”
그가 내 이름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심장이 별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름부터 그렇지 않으냐.”
뒤통수가 그의 배에 닿았다. 스르륵 미끄러진 그의 손가락이 내 턱을 쥐어 살짝 위로 들었다. 고개가 딱 그만큼 뒤로 젖혀지며 시야 가득 그의 웃는 낯이 들어왔다.
나는 ‘지금’을 잘라 칠보함에 넣어두고 싶어졌다. 흐트러진 옷. 휘어진 눈매. 어느 것 하나 흘리지 않고 그렇게 고이고이 넣어둔 순간을, 후에 두고두고 꺼내 볼 것이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내 대답에 무륜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떨어졌다. 옆으로 움직인 그가 내 옆의 창틀에 엉덩이를 붙였다. 제법 넓다 생각했던 창틀이 꽉 찼다. 비단 무복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소매 안에 감춰진 손끝이 안으로 곱았다.
나는 그가 이리 올 줄 알고 있었다. 이젠 안다. 그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은 것을.
“예까지 오면서 길이 어둡기에 등이라도 항시 밝혀두라 명하려 하였는데,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이러니 외려 별이 잘 보이는구나.”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힘겨운 일이었다.
우린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봤다.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외려 굉장히 편했다. 흰 담장에 얹어진 기와를 따라 먼 데서 아른거리는 등의 불빛이 선을 그렸다. 그 외엔 온통 어둠에 가렸다. 땅도, 하늘도, 슬그머니 내 손등에 얹어지는 무륜의 손까지도.
그의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은 내 손가락을 얽었다.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대화가 없었다. 하지만 무륜의 온기는 말보다 많은 뜻을 품은 채 나를 파고들어 왔다.
입 안쪽의 살을 세게 물었다. 같은 마음인데 이어질 수 없었다. 차라리 다른 마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아프진 않았을 것을. 하늘을 보던 고개가 땅을 향했다.
자신을 다잡았다. 올해의 계절도 다 보지 못하고 저버릴 목숨이다. 얻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는 법. 상실과 상처를 남기고 떠나진 않으리라.
“갑자기 왜 고개를 숙이느냐. 보렴. 저기 별똥별이구나.”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두엇의 별똥별이 밤하늘에 하얀 선을 그렸다.
“……폐하, 그거 아십니까?”
저, 곧 죽습니다.
“…….”
“무슨 말을 하려 그리 뜸을 들일까. 내 장히도 궁금하구나.”
다시 한번 입 안쪽의 살을 세게 물었다. 해서는 안 될 말은 가슴에 묻었다.
“귀인이 죽으면 신이 혼을 거두어 별로 만든다 합니다. 어두운 밤. 그 어둠 속에 숨어 악하고 탁하게 물든 곳이 없나 지상을 굽어살피라고.”
“아, 그래. 어디서 본 것 같군. 옛 설화였던가. 민담집이었던 것도 같은데.”
“폐하께선 나중에 필히 가장 빛나는 별이 되실 겁니다.”
“하하. 난 귀인이 아니다. 대단한 이들의 도움으로 운 좋게 황위에 앉은, 일개 인간이지. 그럴듯한 위업 하나 이루지 못하였거늘. 설마 앞으로 성군이 될 거라 입바른 소리라도 할 참이더냐.”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진지하게 답했다.
“어떤 무사가 길을 지나다 우연히 마을을 습격하려는 도적 떼를 발견합니다. 도적 떼에 가족을 잃은 적이 있던 무사는 온전한 복수심만으로 그를 소탕했습니다. 의(義)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풀에 숨어 있던 아이는 그 무사로 인해 살아남아 그를 귀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럼 이 무사는 귀인입니까, 아닙니까?”
“누가 상서령 아들 아니랄까 봐 이젠 네 쪽에서 선문답을 시작하는군. 어디 보자. 적어도 그 아이에게는 귀인이겠구나.”
고개를 돌려 무륜을 봤다. 별빛도 빛이라, 그의 하얀 얼굴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웃었다.
“예, 귀인 중의 귀인입니다.”
무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뒤늦게 무사와 아이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억죄었다.
짙은 어둠과 희미한 별빛으로 이루어진 순간, 그가 내게 입을 맞췄다.
어둠이 발을 물린 듯 긴장으로 살짝 굳은 그의 얼굴이 유독 선명해,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어색한 것은 처음뿐이었다. 다정하던 입맞춤이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놀라서 몸을 물리자 그의 손이 내 뒤통수를 휘어 감았다.
쿵.
내 뒷머리를 감싼 무륜의 손등이 창틀에 부딪혔다.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접문에 더욱 열중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꽉 쥐었다. 목에 걸린 먹먹함을 연신 삼켰다. 몇 번이고 타액을 삼켜도 아릿함이 가시지 않았다.
“손에 힘 풀거라. 상처라도 날까 저어되느니.”
어색하게 풀어진 손에 그가 다시 손가락을 얽어왔다.
처음이었다. 입술에 맞닿는 감촉이, 혀로 파고드는 열기가 낯설고 두려우면서도 기꺼웠다. 갈 곳 잃은 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안을 쑤셔대던 살덩이가 한결 거칠어졌다. 단단한 손과 팔이 뒤통수와 허리를 옥죄었다.
무륜은 한참 만에 떨어져 나갔다.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희미한 별빛이 들었다. 그런 별빛을 받은 하얀 낯은 내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그 무사는 귀인이 맞다. 하나 그건 무사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아이가 그를 귀인이라 하여 귀인이 된 것이지.”
무륜이 손바닥으로 내 뺨을 감쌌다. 세상 귀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자개함에서 나를 건져낼 때도 그랬다.
“너는, 나를 귀인으로 만든다.”
그는, 언제나 나를 구해주었다.
“그런 너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예?”
갑작스러운 고백에 눈만 깜박였다. 무륜이 탄식했다.
“본래 이리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네 마음이 나와 같아질 때까지 참으려 하였다. 한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어리석었다.”
어리석지 않습니다. 사람 마음이 가는 길은 상선도 모르는 것입니다. 흔들리고, 넘치고, 변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더이다.
“이화야.”
“예, 폐하.”
“좋아한다.”
안 그래도 술렁이던 마음이 기어이 폭발했다. 고요하던 수면이 거칠게 요동치며 폭풍우가 몰아쳤다. 입술 끄트머리가 일그러졌다.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저도 좋아합니다. 좋아한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연모하고 있습니다.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습니다. 깨닫는 것이 늦어 여율령에게 멍청한 소릴 하였지요. 저는 충심이라며 당신의 곁에 섰지만, 그건 처음부터 충심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표정을 본 무륜이 안도했다.
그제야 그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굳은 뺨과 움츠러든 어깨. 불안으로 곱은 손. 그 상태로 숨죽이고 내 반응을 살피었을 그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대답은 지금 하지 말거라.”
의문을 표했다.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가 좋을까…… 그래. 올해 첫눈 오는 날 대답을 다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죽음과 운명이 손을 잡고 다가와 내 앞에 현실을 들이밀며 낄낄 웃었다.
“내 말에 휘둘리지 말고, 내 앉은 자리와 지위 고하에서도 눈을 돌리고서 오래도록 차분히 생각해 보거라. 이 ‘무륜’이라는 사내를 어찌 생각하는지. 그 후에 답을 다오. 어떤 대답을 내놓든 그땐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나는 후- 하고 웃었다. 내 절망을 보고자 했던 것들이 멈칫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6장 첫눈의 고백 완결>
무륜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그냥 첫서리 내리는 날로 할걸.”
사부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부가 넘어갔다. 그는 얼마간 그렇게 일하다 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서리보단 단풍이 낫지.”
그 일다경 뒤엔 ‘그냥 이번 달 말로 할 걸 그랬나’ 했고, 다시 일다경 뒤엔 ‘그냥 그 자리에서 들었어야 했는데. 어떻게 봐도 좋은 답이 나올 분위기였거늘!’ 하며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려쳤다.
씨근덕거린 그가 옆에서 먹을 갈던 몽휼을 보았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뭘요.
“설마 그런 쪽으론 생각해 본 적 없다며 거절하거나, 같은 사내라서 싫다거나 하진 않겠지?”
그러니까 대체 뭘요.
7장 타낙한
‘인간은 쓸모가 있어야 살 자격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꽤 무감각했다. 별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하나, 그 직후에 겪은 끔찍한 경험 때문인지 아비의 마지막 말은 오늘까지도 내 가슴과 기억에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항상 자신의 쓸모를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 짓고,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율령의 교육을 받을 때도, 수련을 할 때도 그랬다. 쓸모를 증명하는 것은 능력과 결과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건 너밖에 줄 수 없지만, 내가 멋대로 가져갈 수도 없고, 네가 원한다 해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여율령의 말에 초조함을 느꼈다.
모호한 여율령의 말은 내 쓸모 역시 모호하게 만들었다. 내가 줄 수 없고, 그가 가져갈 수도 없는데, 나만이 줄 수 있는 것. 그게 뭔지는 지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좋아한다.’
그리고 쓸모에 관계없이 그저 내가 좋다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말에서 나의 쓸모를 증명받았다. 나는 필요한 사람이고, 따라서 살아갈 자격이 있음을. 그는 예나 지금이나 나의 구원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