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7화 (47/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7화

여율령이 놀이판에 개입했을 때. 나는 그답지 않은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면, 왜 그답지 않을 짓을 했을까?

울컥.

‘……이것 때문이었군.’

반사적으로 입을 막은 손이 핏물로 젖었다. 손바닥을 적시고 바닥까지 떨어진 선혈을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옷에 튄 피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흑의 무복이라 다행이었다.

이렇게 된 이후 줄곧 가지고 다니던 흑천을 꺼냈다. 누가 볼세라 얼른 손의 피를 닦았다. 혈향은 조금 남았으나 금방 바람에 실려 날아갈 터다. 바닥은 발로 문질러 덮었다.

되돌아간 놀이판은 난장이었다.

그 말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일시 정지를 뜻하는 붉은 깃발이 본진에서 나부끼고, 위수혁이 전령으로 왔다. 그는 대뜸 남은 판들만 무기의 사용을 허가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청대의 사냥꾼들은 진짜 발도하여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댔다. 그림자가 사라지자 숨을 곳이 줄어든 암묵단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당황한 그들이 맞대응을 위해 검을 뽑았으나 함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청대들은 암묵단처럼 복면을 쓴 걸로 모자라 두건까지 꼼꼼하게 맸다. 다시 말해, 누가 황제인지 얼핏 봐선 분간이 가지 않았다.

황족의 몸에 실수로라도 칼을 대면 즉살이다. 놀이 중에 벌어진 일이고, 황제 폐하께서 정상참작 해주시리란 기대만으론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사안이었다.

‘어쩐지 갑자기 규칙이 바뀌었다 했지.’

쓰게 웃으며 빠르게 몸을 물렸다. 벌써 잡힌 자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대론 안 돼. 그리 생각하며 건네받은 복면을 쓰고 부러 발을 늦췄다. 바로 입질이 왔다. 청대 하나가 내 허리끈을 덥석 쥐었다.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나는 사월린이다!”

의기양양해 뒤를 돌아봤다.

나를 잡은 이가 복면을 벗었다. 이름은 모르나 분명 금군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낭패했다거나, 당했다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낯이 활짝 폈다. 내 손을 덥석 잡은 그가 본진을 가리켰다.

“가십시다, 위사장.”

그를 지켜본 다른 청대들이 감격해하는 게 복면 너머로 드러났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는 걸까. 설마 내가 암묵단을 이끄는 것으로 생각했나.

암묵단을 통솔한 건 처음부터 흑월이었다. 단 내에서 가장 어리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내.

혹자는 나를 하늘이 내린 무재라고 불렀다. 부정은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반면, 흑월은 하늘이 내린 무재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틀림없는 수재지만 그의 한계는 분명했다.

대신 그는 하늘이 내린 그림자였다. 내게 밀리는 건 무력 하나뿐으로, 은신이나 보법, 통솔력 등. 그 무수한 것에 있어 나는 흑월의 발끝이나 겨우 쫓아가고 있었다.

‘지금부터 나 외엔 전부 사냥감이다. 청대는 물론이고 암묵단도 잡아야 해.’

본진에서 띠를 바꿔 달며 손을 씻고 싶다 하자, 내관들이 잽싸게 은 대야를 대령했다. 슬쩍 다가온 여율령이 말을 거는 척 핏물이 배어 나오는 흑천을 가려주었다. 혹시 몰라 옷에 튄 부분도 적셔서 핏물을 뺐다. 대야는 실수를 가장해 그 자리에 엎어버렸다.

“잘되어 가느냐?”

“천태백호가 누군지 모르는 것만 빼면요.”

“망설이 늘었구나.”

섭선 위로 빼꼼 나온 눈이 휘어졌다.

“넌 그가 누군지 알지 않으냐.”

나는 대답 없이 웃었다. 저 말이 곧 천태백호의 정체를 알리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저러니 백구렁이 소리를 듣는 게지.

“시간이 없으니 가보겠습니다.”

“매정하긴. 소원권이 백지가 되었으니 폐하께서 지금쯤 내게 이를 갈고 계실 것인데. 너는 이 아비가 걱정되지도 않느냐?”

깔끔하게 무시했다.

숲을 향해 내달렸다. 주변 풍경이 휙휙 밀려나며 숲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여기서 보자 초토화된 모습이 더 잘 보였다. 어쩐지 예부의 관리들이 달달 떨고 있더라니. 숲의 초입에서 기감을 곤두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본래 사냥감과 사냥꾼이었던 이들이 이제 죄 한편이 되어 꼭꼭 숨어버렸다.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암묵단이 작정을 하고 숨으면 나로선 찾을 방법이 없다. 무륜처럼 무식하게 다 때려 부수지 않는 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 그냥 청대를 노릴까.’

천태백호가 웅크리고 있을 가능성이 큰 청대였으나 지금 상황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리라. 천태백호가 누군지 모른다는 건 망설이 아니었다. 짐작만 했을 따름이니까.

대화가 필요하다는 건 2회차가 시작할 때 절감했다. 하나, 그게 온전히 이루어진 판은 없었다. 다들 짐승처럼 서로를 향해 달려들기 바빴다. 이번 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여율령이 대놓고 편을 갈라놓아 더 힘들었다.

‘천태백호가 반드시 사냥꾼이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패가 이렇게 갈리고, 내가 사월린이라고 한다면 아마 천태백호는-’

파악! 수풀을 뿌리친 몸이 탁 트인 공간에 진입했다. 숲 중간중간에 있는 공터 중 하나였다.

눈을 크게 떴다. 공터 한중간에 누군가 있었다. 두건도 복면도 벗은 채 나와 같은 흑의 무복만을 걸친 사내. 무륜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푸른 세상은 더 푸르러지고, 머리칼 어디쯤을 스치던 바람의 존재가 선명해졌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멈췄다. 나뭇잎에 가장자리가 조각난 원형의 햇살이 그를 비췄다. 그의 발치에 작은 그림자가 졌다.

문득, 그곳에 서고 싶었다. 저 자리야말로 내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화야.”

“예, 폐하.”

대답하며 그를 봤다. 가장 먼저 다정하게 웃는 낯이 보였고, 그다음에 나를 향해 내민 손이 보였다.

“이리 온.”

내가 사월린인 것도, 그가 천태백호인 것도 상관없었다. 설령 여기서 그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에 무엇이 있었어도 나는 갔을 것이다.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몸이 확 당겨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단단한 가슴팍에 코를 박은 후였다. 무륜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몸이 틈 없이 맞닿으며 귓가에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아아.

발치에 깔린 햇빛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활짝 웃는 그 얼굴이 그야말로 태양과 같았다. 무륜이 내내 탐내던 먹잇감을 사로잡은 짐승처럼 말했다.

“어흥.”

* * *

사냥 놀이가 마무리된 이후, 승점을 계산하자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우승은 흑월이었다.

‘하긴 사냥감일 땐 마지막까지 살아남고, 사냥꾼일 땐 소리 소문 없이 잡아댔지. 2회째에 사월린도 했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으로 황궁 보고에 있던 명검 중 하나를 하사받은 그는 그 자리에서 내게 검을 건넸다. 한사코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어차피 주로 쓰는 건 단검과 암기이니 괜찮다고. 하여간에 똥고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받아 들며 잘 쓰겠다 하는 순간이었다.

콰직.

시상대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들렸다. 3등을 한 무륜이 뭔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부스러진 나무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3등 부상은 섭선이지. 내가 항상 주문해서 쓰는 것과 꼭 같은 것인데, 아무래도 폐하의 심미안을 채우기엔 부족했나 보아.”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여율령이 씩 웃었다.

“아까 3회차의 역할을 짤 때 슬쩍 언급을 드렸는데도 말이지.”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 했구나. 확신에 차 한숨을 쉬었다.

뒷정리는 예부에서 맡았다. 금군과 밀영군은 본래 비번인 인원을 제외하고 전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흑월은 여율령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비번인 내게도 같이 가자 하였으나 고개를 저었다.

내 처소는 이제 본궁에 딸린 별관에 있었다. 본래는 황족의 위사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황제의 위사들뿐이었다. 무륜이 후와 비를 맞아 자식을 보면 그들의 위사 역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혀를 차며 잰걸음을 놓았다. 처소에서 쉴 것처럼 굴었으나 사실 갈 곳이 있었다. 여율령에게 솔직하게 말했다간 청승이라 비웃음 살 장소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온 북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허름하고 조용했다. 과거 5황자 궁이었던 이곳은 이제 완전히 텅 비어, 가끔 슬지 않게 들여다보는 사람만 있다 했다.

‘한여름엔 이곳도 나쁘지 않구나.’

공기가 선선하다 못해 시원했다. 저녁 무렵엔 오히려 한기가 들 듯했다. 북궁에 뿌리를 내려서일까. 봄에는 제법 꽃송이를 많이 맺었는데 잎사귀는 그렇지 못했다. 그냥 보기에도 성긴 잎을 안쓰럽게 보다 무륜이 머물던 방의 창을 열었다.

잠가 두진 않았는지 격자창이 쉽게 열렸다. 틀에 엉덩이를 걸쳤다. 언제나 무륜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주변은 완전히 깜깜해졌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해가 지고 희미하게 깜박이는 별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사당에서 보던 것만은 못했으나 예서 올려다보는 별도 썩 나쁘진 않았다. 어느 유명한 기생은 시간을 잘라 이불 밑에 넣어두고 싶다 했다. 특히 동짓달의 긴 밤을.

‘그 긴 밤. 하늘을 올려다봤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을 것을.’

그렇게 생각하고 픽 웃었다.

나는 본래 밤하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사당에서 별 무리가 흐드러진 하늘을 보고, 그걸 무륜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생각한 순간, 그건 아무래도 좋은 대상이 아니게 됐다.

“무얼 그리 열심히 보나.”

첫걸음을 뗐을 때부터 따라오는 인기척을 느꼈기에 놀라지 않았다.

“별을 봅니다.”

“찾는 별이라도 있느냐.”

“딱히 없습니다. 막눈이라 그저 예쁘구나, 할 뿐입니다.”

무륜은 ‘그렇구나’ 했다. 그가 자신의 처소였던 방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기척이 바로 등 뒤까지 왔을 때,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이번 사냥 놀이. 저 때문에 열린 거지요?”

“알고 있었느냐?”

“축제 날짜와 딱 겹치지 않습니까. 대체 어떻게 추진하신 겁니까. 신료들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