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6화
“허윽.”
관리의 양옆에 나타난 밀영군이 그의 팔을 한 짝씩 잡아 어딘가로 끌고 갔다. 황궁에서 눈치 없음은 때로 죄가 되기도 한다.
위중혁이 흠칫했다. 속절없이 흔들리던 동공이 놀이터인 먼 숲을 향했다. 그 모습을 본 몽휼은 ‘제 눈치가 없는 줄 알고 있었구먼’ 하고 생각했다. 역시 기민은 개뿔이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겠다며 놀이판에 참여 않고 본진을 지키던 위수혁은 해쓱하게 질린 위중혁을 흐뭇하게 봤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여율령이 섭선을 팔락이며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궁에서 형님을 봐서 그럽니다. 어쨌든 이리 오셨으니 복귀도 금방이지 않겠습니까.”
“금군대장은 지금 자리에 별 미련이 없으신가 봅니다.”
“전 부대장이면 족합니다. 제 그릇은 제가 아는지라.”
흐음. 여율령이 슬쩍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잠깐 말을 섞어본 위수혁은 그의 기준으로 재미없는 부류였다.
놀이는 다음 회로 넘어갔다.
이번에야말로 사냥꾼을 뽑으리라, 그렇게 결심한 무륜은 정말로 사냥꾼을 뽑았다. ……이화와 함께. 푸른 띠가 매어지는 이화의 허리를 지긋이 본 무륜이 제비 담당 관리의 곁에 붙어 섰다. 밀영군들이 스스슥 그 주변을 벽처럼 둘러쌌다.
저잣거리였으면 왈패들과 그 두목이군. 여율령이 낄낄거렸다.
한편, 어떤 의미론 금군보다 무서운 밀영군에게 둘러싸여 하늘 같은 황제와 마주한 관리는, 숫제 오줌을 지릴 기세로 벌벌 떨었다.
“제비에 손을 쓰는 건 아니겠지.”
“그, 그 무슨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까! 상선께 맹세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2회는 신속하게 끝났다. 그때쯤 눈치가 빠른 축에 속하는 금군과 밀영군은 이 놀이판의 목적을 전부 눈치챘다. 그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거 저들끼리 으르렁거릴 때가 아니었다.
밀영군 하나가 2회 차 3판째에 무륜에게 와서 속삭였다.
“위사장께서 방금 말없이 잡히셨습니다.”
무륜이 희미하게 웃었다. 상선 희 견차처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3회, 마지막 제비를 뽑기 전 상서령이 나섰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무료하기도 하고, 놀이판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말입니다.”
이 구렁이는 또 왜. 대부분의 이가 불길한 것을 보듯 여율령을 봤다.
“마지막 판은 이렇게 해보면 어떻습니까. 제가 배역을 정해 드리는 겁니다. 물론, 누가 어떤 배역이 될지는 저만 알고 있지요. 대신 인원을 좀 늘리면 어떨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율령 주위로 암묵단이 스르륵 나타났다. 금군과 밀영군이 일시에 검을 빼 들었다. 여율령을 위시한 암묵단과 황제를 위시한 군사들이 대치했다.
무륜은 이화를 힐긋 봤다. 이 살벌한 상황에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이 같았다.
‘저런 것을 봤는데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리 없지.’
그러다 그는 문득, 제 이런 사고마저도 여율령이 계산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께느른히 웃는 얼굴이 확신을 더했다.
“그렇게 하지.”
그렇다고 안 된다 할 수도 없었다. 피할 수 없는 함정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무륜은 내심 혀를 찼다.
여율령이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제비를 나눠 줬다. 띠를 매자 양측이 확연히 갈렸다. 홍대는 이화와 흑월을 포함한 암묵단. 청대는 황제를 위시한 금군과 밀영군이었다. 위중혁과 몽휼도 청대였다.
‘이건…….’
아주 대놓고 패가 갈렸다.
천태백호의 제비를 건네받은 황제가 여율령을 봤다. 네가 나 좋은 일을 할 리 없는데.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여율령은 손가락으로 제 섭선을 툭툭 두드렸다. 항상 제 몸처럼 그가 가지고 다닌 물건이다. 그의 성격이 묻어나 깨끗한 고급품이나 어쩔 수 없이 낡은.
“하.”
그가 무언가의 대가로 겨우 섭선을 요구할 리 없었다. 알지만 이 역시도 지금은 속아 넘어가 줄 수밖에 없다.
“금국, 아니, 연 대륙에서 가장 좋은 물건으로 구해 주지.”
난데없는 말에도 사람들은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지엄한 황상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여율령만이 알아들을 무언가가 있는 게지. 과연 여율령이 공손히 읍했다.
“홍대. 출!”
이화가 가장 먼저 뛰어나갔다. 암묵단과 함께 달리는 얼굴은 한 점 그늘 없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아아. 무륜은 신음처럼 경탄했다. 저 얼굴이면 충분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놀이판을 만든 보람이 있었다.
“청대. 출!”
이때까지만 해도 무륜은 이번 판이 가장 즐거운 판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반드시 죽인다.”
무려 황제 폐하의 살해 예고였다. 주어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곁을 달리던 금군과 밀영군들은 그게 상서령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목숨이 위험한 건 상서령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위사장을 몰아넣지 않으면 그다음 순번은 무능력한 저들이었다. 그들은 2판째에 인정했다. 암묵단은 황군보다 반 급수 정도 뛰어났다. 특히 은신과 은밀 행동에선 한 급수 위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른이 넘는 일류 무사가 날뛰기에 이 숲은 턱없이 작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2판이 시작될 때까지 단 한 명의 암묵단도 잡지 못했다.
“후우-”
무륜이 긴 숨을 내쉬었다. 욕은 한 번이면 족했다. 이쯤에는 그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건 상서령이 제게 내건 싸움이었다. 종목은 전략 전술.
“놀이판이 장기판이 되었군.”
그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도합 스물다섯의 금군과 밀영군이 흠칫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이게 만약 진짜 장기판이라면 무륜은 절대 상서령을 이길 수 없었다. 네모반듯한 판 앞에 마주 앉으면 세속의 무력, 재력, 권력은 전부 사라지고 전술과 전략에 대한 머리만이 남는다.
하나, ‘만약’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건 장기판이 아닌 놀이판이었다. 그리고 무륜은 현 금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황제였다.
“몽휼. 위중혁.”
“예, 폐하.”
몽휼과 위중혁이 한목소리로 읍했다. 무륜이 둘에게 명을 내렸다. 내용을 들은 둘의 반응이 상이하게 갈렸다.
“대, 대체 어쩌시려고 그런 명을……!”
기겁하는 몽휼과-
“분부 받잡겠습니다.”
가타부타 말없이 따르는 위중혁이었다.
금군과 밀영군의 반응은 하나로 모였다. 몽휼 쪽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시커먼 것들 사이에서 무륜이 일갈했다.
“시간이 없다. 움직여라.”
둘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륜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숲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차피 놀이가 아닌가. 그는 잠깐만 폭군이 되기로 하였다.
* * *
몽휼과 위중혁이 비조처럼 보법을 밟았다. 특급 무사가 작정하고 내달리자 본진이 코앞이었다. 몽휼은 망설이다 물었다. 지금이 아니면 둘만 있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혁중아, 천태백산에서 돌아온 이후 왜 칩거 생활을 했냐?”
위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혁중’이라고 부른 것에 울컥하지도 않았다. 평소와 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몽휼은 초조해졌다.
‘그럴 리 없다.’
하나, 세상에는 ‘절대’라는 말도 없는 법.
그는 위중혁의 마음이 돌아섰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사실 그럴 만했다. 천태백산에서 이화가 중상을 입은 채 암묵단에게 업혀 돌아오고, 무륜이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위중혁과 몽휼은 진짜 먼지가 나도록 맞았다.
자신은 모든 것을 이해한 터라 묵묵히 맞았지만, 위중혁은 중간에 질문을 던졌다. 어찌해 이러시냐고. 뺨이 퉁퉁 붓고 어딜 잘못 맞았는지 팔을 움켜쥔 채였으나 그 음성은 담담했고 어조도 차분했다. 원망은 일절 없이 그저 맞는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무륜은 답하지 않았다. 또 그 후 한마디도 하지 않다 돌아갈 적엔 데면데면하던 흑월과 함께 환궁했다. 저는 버림받은 건가?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몽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쭙잖은 마음이 돌아서는 것보다, 충직한 마음이 돌아서는 게 몇 배는 무서운 법. 눈치는 없으나 우직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중혁이다. 설령 무륜이 저를 위해 죽으라 하면, 어찌 죽어야 가장 그에게 득이 될지를 생각해서 죽을 위인.
‘나면서 눈치와 충정을 등가교환 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침묵하던 위중혁이 답했다.
“폐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몽휼이 침음을 삼켰다. 역시 그런가.
“하지만 지금은 이해했다.”
응?
“얕보이는 게 싫어 감췄지만 사실 알고 있다. 난 눈치가 둔한 편이지.”
……감춘 거였냐. 아니, 그보다 그게 감춘다고 감춰지는…… 됐다. 말을 말자.
“정확히는 알아차리는 것이 남들보다 늦다. 끝까지 모르지는 않아. 그런데 이번 것은 특히 어려웠다. 그래서 홀로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지.”
“그냥 내게 물었으면 됐을 것을.”
“말해줄 생각 없었잖나. 말할 수도 없었을 테고. 주군께서 아무 말씀 안 하시는 문제를 손이 멋대로 판단하여 나불거릴 순 없는 일이지. 뭐, 이제 다 지난 일이다. 이해했으니 그걸로 됐다.”
몽휼은 인정했다. 자신이 위중혁의 충심을 얕보았노라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의미는, 여타의 우직함과 그 격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그럼 어찌 소원으로 위사장직을 달라 했나.”
또 맞으려고? 위중혁이 담담하게 답했다.
“위사장직에 있는 이상 내명부에 속할 수는 없을 테고, 위사장의 성격상 자진해서 그만둘 생각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위사장이면서 후궁이 될 수는 없으니 그가 위사장직을 차지해 이화를 후궁전에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몽휼은 인정했다. 눈치는 없지만 창의적이다. 창의적으로 미친놈이었다.
“주군의 마음을 헤아려 움직여야 진정한 충신인 법.”
“…….”
몽휼이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아니야, 이 미친놈아.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는데 그거 아니라고.
“왜 그러지? 그래서 앞은 보이나? 그러고 뛰다 넘어지면 어찌할 것이냐. 네 체면은 폐하의 체면이기도 하다. 폐하의 유일한 그림자로서 체통을 지켜라.”
이 둔한 인사를 어찌하면 좋을꼬. 몽휼은 진정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