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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3화 (43/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3화

“들어봐라. 내 올해는 축제가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렇잖나. 일단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게 다 세금이고, 짐이 차후 봐야 할 문부(文簿)란 말이지. 그래서 먼저 가신 아버지와 형님께 처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었는데.”

이젠 만인지상이시라고 언행에 거침이 없다. 잠자코 듣고 있던 위수혁과 몽휼의 어깨가 움칠움칠했다. 몽휼은 그나마 나았다. 이런 분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위수혁은 선황과 죽은 황태자에 대한 말이 나오자 그만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음험한 마음을 품고 욕탕에 끌어들인 벌인가. 안 들었으면 좋았을 말만 잔뜩 들었지 뭔가. 게다가 손가락 하나 대보지도 못했고. 하여간 손해만 잔뜩 봤어.”

마음의 결을 바꾸려면 우선 이화가 자신을 보는 시선을 바꿔야 한다. 경외를 정욕으로. 그런 단순한 계산이었다. 한데 외려 영향을 받은 건 자신 쪽이었다. 무륜이 혀를 찼다.

“저…… 폐하.”

“뭔가.”

“소인, 아둔하여 폐하께서 무얼 하문하시는지 모르겠나이다.”

“그러하냐. 하면 내 친절하게 알려주마. 축제를 대신할 만한 게 뭐가 있는지 말해보거라.”

몽휼이 손을 들었다.

“그래, 몽휼.”

“먼저 일의 목적을 말해주시면 속하들도 더 구체적인 답을 내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위사장 여이화가 축제를 좋아한다더군.”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 그리고 축제를 좋아하는 여이화. 그것만으로도 몽휼은 이 일의 모든 인과관계를 파악했다.

“예? 위사장이 왜…… 윽!”

위씨 가문의 핏줄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위수혁의 옆구리도 꾹 찔러줬다.

“사냥 놀이는 어떠십니까.”

“사냥 놀이?”

“민가에서 주로 하는 놀이입니다. 본래 귀족가에서 여흥으로 즐기던 것이 약식화되어 민가에 정착하고, 반대로 귀족들 사이에선 사라졌습니다. 가문 사이의 친목을 다질 때나 하는 만큼 판이 컸고, 그때마다 구색을 맞추기 귀찮았거든요.”

무륜의 기색이 나쁘지 않자 몽휼은 눈치껏 놀이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실은 아이들이 아니라 머리가 좀 큰 것들이 즐기는 것인데, 활과 덫으로 하는 진짜 사냥은 아니옵고…….”

무륜은 바로 흥미를 보였다.

“그거 재밌어 보이는군. 이화도 좋아하겠어.”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추억은 더 좋은 추억으로 덮어야 하는 법이지.”

뭔지 모르지만 그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몽휼은 현명하게 침묵했다.

* * *

지한국과 남방 5국에서 서한이 도착했다. 날에 맞춰 사절을 보내겠다는 말과 함께 그 왕족의 이름을 적었다. 남방 5국은 고만고만했다. 4황자. 8황자. 얼씨구, 12황녀.

“잘못하면 연회장이 아니라 어린애들 놀이판이 되겠군.”

의외인 건 지한국이었다.

“태자가 직접 사절로 온다고?”

밀영군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몽휼이 흠칫하여 튀어나왔다.

“타낙한, 그자가 온단 말입니까?!”

“어이쿠, 깜짝이야!”

보고를 올리던 무록관(無祿官)의 서감(書監)이 자지러졌다. 무륜은 몽휼을 흰 눈으로 보면서도 서감과 내관들에게 모다 물러가라 하였다.

“위수혁. 금군과 밀영군을 데리고 멀리 가라. 열 장 이상은 떨어지도록.”

“하나, 폐하.”

“위사들도 마찬가지다. 이화야, 다 데리고 물러나 있으려무나. 내 몽휼과 독대할 일이 있다.”

똑같은 말인데도 후자에만 봄바람이 불었다. 결국 황명에 버티지 못한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고, 집무실엔 무륜과 몽휼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서한을 주고받은 게 언제였지?”

“폐하께서 예 남겠다고 하신 후에 망명은 관두겠다며 보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무륜은 북궁에 있을 적, 지한국으로의 망명을 준비했다. 그때 연줄이 되어준 사내. 지한국 공주였던 어머니의 질자이자, 제겐 사촌 형이 되는 자가 바로 지한국의 태자, 타낙한이었다.

“태자라는 자가 산보나 나올 심산으로 예까지 걸음 할 리는 없고. 속셈이 무어라 생각하느냐.”

“글쎄요. 우둔한 속하의 머리로는 잘…… 상서령에게 조언을 구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미쳤느냐? 싫다.”

정무와는 달랐다. 상서령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그를 부려먹는 것엔 어느 정도 대의명분이 있었다. 하나, 이건 다르다. 황제가 아닌 무륜으로서 개인적인 도움을 청하는 것에 가까웠다.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닌 한에야 그 인간에게 손 벌릴까 보냐.

‘……라고 생각하고 계시겠지.’

몽휼은 한탄하면서도 대화의 주제를 흐리지 않았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준비해 주었는데, 이쪽에서 막판에 엎은 데 앙심을 품고 뭔가 요구하려 하겠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이제까지 주고받은 서한을 빌미로 뭔가 요구를 해올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뭔가 요구 사항이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군.”

“전자라면 상관없지만, 후자라면…… 좀 골치 아픕니다.”

“골치는 무슨. 뭐가 됐든 소용없는 짓이다. 이미 황위 계승권자는 다 죽었어. 내가 새로 씨를 뿌리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 지금 내가 죽으면 새로운 황가가 옹립된다. 단지 그뿐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다단할지 무륜은 모른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는 건 그가 죽은 후일 테니까.

“아니면 새 황가의 옹립 자체가 목적이라거나?”

망명 때도 그랬다. 아무리 사촌 간이라지만 상대는 지한국의 태자였다. 아무 셈속 없이 도와줬을 리 없다. 그것도 자칫 국가 간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 가며 말이다.

그때 무륜이 예상한 타낙한의 목적은 ‘금국의 5황자’라는 황통의 소유였다.

황위 계승권을 가진 자신의 존재는 생각보다 이용 가치가 높았다. 특히 금국이 아니라 타국인 지한국에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실로 역설적인 일이다.

“그렇게 되면 남방 5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근래 세력을 키운 건 지한국만이 아닙니다. 물론 성장세가 독보적이긴 합니다만.”

“그럼 전쟁?”

“그거야말로 설마요.”

연 대륙의 탄생부터 역사를 함께해 온 금국은 시간으로 지식과 부를 쌓았다. 휘청거릴지언정 결코 쓰러지는 법이 없는 거인. 그것이 대금제국이었다.

지한국은 그에 비해 모든 것이 애매했다. 크기는 금국의 반절 정도. 국력도 고만고만. 절대 강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덥석 물기엔 이가 상할 것이 걱정되는. 금국 입장에선 계륵과 같은 나라였다. 덕분에 분리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 근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남방 5국은 그들끼린 으르렁거리면서도, 금국이나 지한국이 누구 하나 건드리면 다섯이 몰려들어 이를 세웠다. 다시 말해, 남방에선 남이지만, 연 대륙에선 하나인 기묘하고도 단단한 결속을 맺고 있었다.

금국. 지한국. 남방 5국. 이 셋이 팽팽한 대립각을 세운 게 현 연 대륙의 상황이었다.

셋의 세력이 이렇게까지 비등비등한 건 연 대륙의 역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셋 중 어느 한쪽이 무너지는 건, 셋 다 바라지 않았다.

지한국 황제가 군사력에 힘을 쏟는 것이 다소 불안하나, 그들도 남방 5국을 견제할 수단을 확립하지 못하고선 함부로 금국을 침범하지 못하리라. 무륜은 확신했다.

“답이 안 나오는군.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나.”

“정보력 문제도 심각합니다. 선황이 타국에 심어놓은 간자 중 연락이 끊긴 자는 8할이 넘습니다. 아마 초저녁에 망명해 넘어갔거나, 죽었겠죠. 나머지 2할도 사실 별 쓸모가 없는 이들입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무륜이 이를 갈았다. 평생 일해도 선황으로 비롯된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을 듯한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냥 놀이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나.”

신경이 날카로울 땐 즐거운 화제로 기분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무륜에게 ‘사냥 놀이’를 소개한 사람인 만큼, 준비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몽휼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순조롭습니다. 이화 님은 아직 전혀 모르십니다.”

“잘됐군. 날은 잡혔나?”

“예. 내달 초하루입니다.”

“좋아. 차질 없이 준비해라.”

“물론입니다.”

몽휼은 머릿속으로 놀이에 참여할 인원을 정리했다. 친분이 있는 이들끼리 주로 하는 놀이인 만큼, 주로 무륜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자들로 추렸다.

일단 흑월은 뺐다. 몽휼 본신의 안녕과 황궁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남은 건 이화 님, 몽휼 자신, 위중혁. ……끝이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유능한 측근의 기지를 발휘해 빈자리에 금군과 밀영군을 밀어 넣었다.

‘뭐, 호위의 문제도 있으니까.’

몽휼은 충신의 마음으로 주인의 빈약한 인간관계를 변호했다.

문제는 위중혁이었다. 금군대장직을 사임하고 벌써 몇 달이 흘렀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도성에 돌아온 이후로 복직을 미루고 있었다. 그의 동생 위수혁이 연 닿을 만한 사람이면 죄 붙들고 ‘제발 제 형 좀 복직시켜 달라’, 애걸복걸한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위씨 가문의 한량이잖아. 그런 녀석을 굳이 놀이판에 넣을 이유가 있나?’

있다. 이번 시험에서 황제를 보필했던 것만으로도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몽휼은 그를 빼고 싶었다. 사감 때문이 아니라, 황궁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 눈치 때문이다.

‘예감이 좋지 않아. 꼭 뭔가 사고를 칠 것 같단 말이지.’

당장 금군대장직을 내려달라 청할 것 같던 인사가 갑자기 저택에 틀어박힌 것도 이상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몰라도 심히 불안했다. 그래도 역시 안 부를 순 없는 노릇. 몽휼은 한숨을 감추며 머릿속의 명단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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