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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2화 (42/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2화

외부의 통로와 뜰에는 일찌감치 등이 내걸렸다. 황상이 걸음 한단 소리에 내관과 시비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뜰에 들어선 무륜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완 손을 섞어본 일이 없었지. 몸도 찌뿌둥한데 어디 한번 겨뤄보겠느냐?”

“제가 어찌 감히 지엄하신-”

“이기면 나중에 네가 원하는 걸 아무거나 하나 들어주마.”

“-말씀 받자와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그럼 예서 잠깐만 기다려라.”

그렇게 말한 무륜은 무복을 입고 나타났다. 동곳을 꽂고 영웅건을 두른 그 모습에서 5년 전의 그가 보였다. 완벽한 ‘나리’였다.

“검은 목검으로 하자. 이것만으로도 기분을 내기엔 충분할 것이다.”

나는 어디 모자란 놈처럼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이 시작되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무륜의 검이 바로 앞까지 쇄도했을 때였다.

따악!

진검 못지않은 예기가 목검에 서려 있었다. 순식간에 세 합을 겨루고 거리를 벌렸다. 반쯤 본능에 의지해 움직였다. 눈은 의지가 되지 않았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짙은 녹음이었다.

하나 그토록 생명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조차 무륜은 독보적이었다.

따아악!

노을이 능선의 가장자리를 누르며, 홍시가 터지듯 황혼이 온 세상에 붉은색을 입혔다. 그 중후한 색은 무륜에게도 묻어났다. 새까만 눈동자가 붉은빛을 띠었다.

후웅!

그 빛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 무륜의 검끝이 내 턱 아래로 들어왔다.

“대련 중에 한눈을 팔면 쓰나.”

“송…… 구합니다.”

검을 거두었다. 내 패배였다.

“졌습니다.”

“딴생각만 안 했어도 네가 이겼을 게다.”

아니. 온전히 대련에 집중했어도 졌을 것이다. 어찌 이길 수 있을까. 어찌 감히 대련이나마 맞먹으려 들 수 있을까. 그는 영원한 나의 나리였다. 이미 다 내드려 더 드릴 게 없는데도 무언가를 바치고픈 마음이 들게 하는 분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냐. 나를 상대로 한 소원보다 더 중한 것이 무엇인지 어디 들어나 보자.”

당신을 생각했다. 하나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지라 어물거리자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그리 망설이니 궁금증이 도지는구나. 안 되겠다. 내 꼭 들어야겠으니 재게 말해보거라.”

“……노을이.”

“노을?”

“예. 노을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율령은 말했다. 넌 망설에 재주가 없으니 꼭 말해야 할 상황이 오거든 가장 중요한 진실만 오려낸 후 내밀라고. 그래서 ‘노을에 비친 당신이 아름답다 생각했다’에서 무륜만을 쏙 뺐다.

그는 영 못 믿겠다는 눈치였으나 그 이상 캐묻진 않았다.

“흠. 뭐, 됐다. 땀을 흘렸으니 씻어야겠지. 욕탕으로 가겠다.”

겨우 이것 움직이고 땀이라니. 날이 더워서 그러시나?

의아함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특급 무사쯤 되면 내력으로 체온을 조절하는 일쯤이야 쉽게 했다. 그건 얼어붙을 것처럼 추운 날은 물론이고, 오늘처럼 더운 날에도 해당된다.

‘뭐, ……땀 흘리고 싶으셨나 보지.’

하지만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곧바로 무륜을 따라붙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 동관에는 거대한 욕탕이 설치되어 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황제 단 한 사람뿐이다.

“너도 먼지를 뒤집어썼으니 씻어야지 않겠나.”

“아, 예. 그럼 씻으시는 동안 가서 씻고 오겠습니다.”

무륜이 황제가 되고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이거였다. 내가 아니어도 그를 지킬 사람이 많다는 것. 위사장이면서 위사가 단 한 명도 없던 북궁 시절과는 달랐다. 금군과 밀영군을 제하고도 따로 ‘위사’로 뽑힌 이들이 교대로 그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켰다.

그러니 마음 놓고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처소에서 잠드는 와중, 무륜이 있는 곳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도 더 이상 없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그냥 같이 씻지.”

“예?”

“어차피 욕탕은 넓으니까.”

“예?”

계속 되묻자 내 어깨에 손을 얹은 무륜이 씩 웃었다.

“황명이다.”

* * *

욕탕은 야외였다.

삼분지 일 정도는 기둥을 세우고 기와지붕을 덮어, 비가 오는 날에도 온천욕을 즐길 수 있게 해두었다. 탕은 황제 혼자 쓰는 것임에도 굉장히 넓었고, 작게 조성된 정원은 아름다웠다. 높은 벽 뒤엔 틀림없이 금군이 줄지어 서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욕탕 안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옹송그리고 있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손발이 달달 떨리는 기분이었다. 뜨끈한 물에 들어앉아 있는데 한기가 가시질 않았다.

“좋군.”

느른하게 앉은 무륜이 말했다. 태연하다 못해 여유가 묻어났다.

나는 그가 정말 나와 같은 마음일까 의심했다. 나라면 저럴 수 없다. 지금도 혹 아랫도리가 반응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노을은 좋아하나?”

“예? 아, 예. 좋아삽니다.”

첫 대답은 쇳소리가 났다. 심지어 다음 말은 헛나와서 ‘좋아’를 사버렸다. 무륜이 낮게 웃었다.

“그럼 살면서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노을은 어떤 노을이었나.”

낭만이 있는 질문이었다. 반면 내 대답은 세속적이었다.

“축제 때 본 것이었습니다. 마침 딱 이맘때군요.”

“아, ‘수련제’ 말이군. 확실히 이쯤이었지.”

그가 흠, 하곤 말했다.

“하면 축제도 좋아하는군.”

“예, 좋아합니다.”

냉큼 대답했다. 도성에서 하는 큰 축제는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래 봤자 일 년에 두 번 정도지만. 하나는 한여름 밤의 ‘수련제’였고, 다른 하나는 초겨울의 ‘위난제’였다.

“축제가 있는 거리에 한 발자국만 디뎌도 다른 공기가 느껴집니다. 사방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려오죠. 부정적인 감정은 거의 없습니다.”

그곳은 별천지였다.

“축제잖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며 우울하고 슬픈 일은 묻어두고 오늘만큼은 즐기자며 웃습니다. 경비병들이 웬만한 문제는 유야무야 넘기는 것도 그 분위기를 지키기 위해서죠.”

머리 위를 가로지른 색색의 천. 모든 집에 내걸린 노을빛 등. 어른들의 다리 사이를 내달리는 아이들과 그들이 내는 웃음소리.

“그 분위기가, 어찌 그리 좋던지요.”

그때를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잠깐 말이 없던 무륜이 물었다.

“축제는 상서령과?”

“아뇨. 흑월이 데려가 줬습니다.”

“……이런 개새…….”

……방금 뭐야? 욕한 거야? 무륜이 욕을 했어?

“그거 유감이구나.”

충격에 멍해진 내게 무륜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했다. 여상한 낯이었다. 나는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는 축제가 없다. 올해만이 아니라 앞으로 2년은 더 없을 예정이지. 성황께서 서거하셨으니.”

“아아.”

“왜. 아쉬우냐?”

“아쉽다기보다 조금 쓸쓸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를 축제였으니까.

그렇구나. 수련제도 위난제도 없구나. 가만히 흔들리는 수면으로 시선을 내리자 옆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욕이더니 이번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감에 놀랐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분명 아까 봤을 땐 저만치 있었던 것을. 내가 움직인 것은 아니니 그가 다가온 것이렷다.

“항상 둘이 갔나?”

“예?”

“축제 말이다. 항상 그 시커먼 놈과 갔느냐고.”

“아뇨. 가끔은 암묵단도 함께였습니다.”

“암묵…….”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무륜의 눈동자가 방황했다.

“그놈들이랑 축제를 보러 갔다고?”

“예. 말도 마십시오. 엿 뽑기에서 잉어를 뽑겠다고 죽치고 앉아서 주변이 울음바다가 되질 않나. 활로 쏘아 과녁을 맞히면 상품을 주는 곳이 있었는데, 화살 대신 암기로 하면 안 되냐고 주인장을 으르질 않나.”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그 역시도 꽤나 즐거웠나 보군.”

“예, 참으로 좋았습니다.”

내가 겪은 축제는 여율령의 비호 아래서 경험한 것이었다. 처음엔 이제 막 살이 오르고 건강해질 무렵, 흑월이 제안하여 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여전히 주눅 들고, 저택의 식솔 눈치를 보고 했었는데.

그때의 나는 처음 본 축제에 넋이 나가 다 잊고 놀았다. 흑월은 내가 가자는 대로 가고, 하자는 대로 하고, 먹고 싶다는 건 다 사 줬다. 그렇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다 지쳐 흑월의 품에 안겨 돌아왔을 때, 내 방문이 열리자마자 옆방에서 동복이가 달려 나왔다.

왜 이리 늦으셨냐며 걱정 많이 했다 조잘거리는 동복이의 뒤로 그 밑의 식솔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었지.

‘도련님, 이제 오셨습니까.’

‘어찌 이리 늦으셨어요.’

‘흑월 님이 같이 가셨으니 위험할 건 없었겠지만 몸이 축나셔요.’

나를 기다려 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울듯이 웃고, 웃는 듯 또 울었다. 마음에 꽃물이 드는 기분이었다.

촤아악.

과거를 돌이키는데 문득 들려온 물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굳었다. 거대한 용이 대가리를 쳐들고 있었다. 뭐지 저건.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무륜의 다리 사이라면 그의 그것이 있어야 할 텐데 대체 왜…….

“열이 오르는군. 먼저 나가볼 테니 느긋하게 있다 오거라.”

왜 진짜 몽둥이가 있어?

그대로 굳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터벅터벅 걸어간 무륜이 문 앞에 다다르자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여닫이문을 열었다.

스슥- 탁, 하고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촤르륵. 물이 쏟아지고 드러난 맨살이 온통 붉었다. 손등으로 뺨을 눌렀다. 방금 본 장대한 용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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