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0화
-그래도 싫어.
어린애 같은 투정이었으나 싫은 건 싫은 거였다.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 일의 효율을 따지면 보내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내 목숨이 걸린 일일지라도 일단 그를 붙들고 보게 됐다.
언제나 그가 내 소매를 잡았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흑월의 소매를 슬쩍 쥐었다. 흑월이 조금 놀란 듯 나를 보다가, 그런 내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마음이 먹먹했다. 나는 생각보다 흑월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방에는 복숭아도 없어.
머뭇거리며 이어 적은 말에 흑월이 멈칫했다.
예전, 그와 대련을 하다 말고 쉴 때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그리로 흘러간 적이 있었다. 여러 방면에서 각기 좋아하는 것이 무어냐는 주제였다.
마지막은 좋아하는 꽃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목련이라 했다. 흑월은 망설이다 복사꽃이라 했다. 연유를 묻자 복사꽃이 지면 그 자리에 복숭아가 열리기 때문이라 했다. 복숭아를 좋아하냐 물으니,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선 한자를 내 손바닥에 적었다. 좋을 호(好)였다.
그때도 복면 아래의 피부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했었지.
-그를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당연하다. 부끄러워하는 흑월은 드물었으니까. 그가 잠깐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럼 조금 늦게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상서령께서도 계속 애쓰실 테니까요. 저는 상서령을 믿습니다.
절대 날 그냥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흑월은 그리 말했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이 신뢰로 반짝였다. ……그래서 여율령이 내 손바닥에 없을 무 자를 적은 걸, 나는 말하지 않았다.
“이봐. 아까부터 쭉 지켜봤는데, 저 녀석 무슨 성총 받은 남첩이라도 되나 봐.”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청하지 않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시선을 돌리자 창살을 움켜쥔 죄수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산발에 지저분한 몰골. 피부에 아로새겨진 고문의 흔적은 덤이었다.
“그 짓을 얼마나 잘하면 나라님이 예까지 친히 왕림하셨을까 궁금하네. 거기 놈들도 다 허리짓으로 꼬신 놈들인가? 멀리서도 애지중지하는 게 보여서 아주 배알이 꼴리네그래. 누군 이런 데 처박혀도 잡을 동아줄 하나 없는 신세인데 말이지.”
낄낄거리는 음성에 내일은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노한 흑월의 손이 스윽 움직이는 걸 잡아챘다. 잘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손에 암기를 들었다. 그것도 침 형태의 가느다란 암기다.
“죄인이라도 죽이면 안 돼. 나중에 네가 곤란해져.”
하지만 도련님을 모욕했습니다. 강아지처럼 축 처져 촉촉한 눈이 나를 향했다. 순간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손을 놓을 뻔했다.
급히 내면을 채찍질했다. 정신 차려라, 여이화. 방금 이 강아지가 소리 소문 없이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아깝군. 나섰으면 상서령이랑 나란히 잡아다 벌을 줬을 텐데.”
진정 아쉽다는 목소리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한 시진은 금방이었다. 방금 간 것 같았던 무륜이 되돌아왔다. 그의 지척에 선 위수혁은 내게 눈인사를 하더니 근처의 뇌옥을 봤다. 짙은 연민이 어린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나를 모욕했던 죄인은 어느새 감옥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굴어도 황제는 무서운 모양이다.
“위수혁.”
하나 때는 이미 늦었다. 위수혁이 손짓하자 금군 두엇이 다가가 뇌옥을 열었다.
“어…… 어어, 뭐야. 아니, 잠…….”
멍석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 억, 하던 신음도 오래지 않아 잠잠해졌다. 임무를 마친 금군들은 다시 신속하게 자리에 복귀했다. 힐긋 시선을 내렸다. 금군의 바짓단을 수놓은 저것이 매화꽃은 아닐 것이다.
“이 뇌옥이다. 열 수 있겠나.”
금군들이 워낙 거한인지라 뒤에 선 작달막한 노인네의 모습이 뒤늦게 보였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굽신거렸다.
“무, 물론입니다. 지금 바로 열겠습니다.”
아무리 지엄한 황제 폐하의 어전이라지만 저렇게까지 겁먹을 일인가 했는데, 그의 시선이 금군의 바짓단에 닿아 있는 것을 보고 이해했다.
“아. 그리고 확인해 봤는데, 합금이어야 할 열쇠가 일반 쇠로 만들어졌더군?”
땡그랑. 노인네의 손에 들린 장비가 차가운 지하 뇌옥의 바닥에 떨어졌다.
“상서령. 게서 나오거든 한 쌍이어야 할 자물쇠와 열쇠에서 열쇠만 쇠로 만들며 뒷돈 빼먹은 새끼가 누군지부터 찾아내게. 벌은 그다음일세. 나라의 돈을 먹었으면 피로 뱉어야지.”
장인의 손은 이제 숫제 벌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이 자물쇠와 열쇠를 만든 장인이라고 했다. 하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음은 당연지사. 면전에서 널 조져 버리겠다는 황제의 선언을 들었다. 저리 떠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왜 그러고 있나. 어서 열라지 않아. 금보다 귀한 내 시간이 낭비되고 있군.”
“지, 지, 지금 열겠습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목간통에 들어갔다 나온 수준이었다.
끼익- 마침내 뇌옥의 문이 열렸다. 이제 볼일은 끝났다는 듯 무륜이 장인을 퍽 차서 옆으로 굴렸다. 노인이 어이쿠 하며 뇌옥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죄도 없는 이를 어찌 치십니까, 폐하.”
“그 죄를 지금부터 네가 찾아내야지.”
여율령의 등에서는 용이, 무륜의 등에서는 호랑이가 보였다. 용호상박이란 이런 것인가. 슬금슬금 물러나 흑월과 꼭 붙어 섰다.
“이화.”
그러자마자 무륜이 나를 불렀다. 생각하기에 앞서 몸이 움직였다. 그 앞으로 한달음에 다가가 부복했다.
“예, 폐하.”
“위사장직을 사임하겠다는 뜻은 받아들여 주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놀라서 허락도 없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아차 하고 다시 숙였다.
“하나, 아주 그만두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 일전의 일도 있고, 직함에서 오는 부담감도 이해한다. 그러니 잠깐만 위사장직을 거두어주겠다. 단, 네가 ‘여이화’로 있는 건 이때가 마지막이다.”
그 후에는 싫든 좋든, 마지막까지 내 위사장으로 있어야 한다고. 다 하지 못한 뒷말이 들려왔다. 삽시간에 목이 멨다.
“휴가라고 생각해도 좋아. 푹 쉬다 오거라.”
“기한은 얼마나 주시렵니까.”
내가 아니라 여율령이 물었다.
“일주…… 아니, 나흘.”
줄었다. 찰나의 순간에 틀림없이 줄어들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를 입 밖에 낸 건 여율령뿐이었다.
“일반 병졸의 휴가도 아니고, 나흘이 뭡니까 나흘이.”
원래도 아슬아슬하게 발언 수위를 넘나들던 여율령이었으나 방금은 누가 봐도 명백히 선을 넘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륜의 입에서 노호가 터졌다.
“진정 목이 잘려봐야 정신을 차릴 인사로군. 상서령, 네놈 눈엔 내가 아직도 북궁에 처박힌 5황자로 보이는가?”
지엄한 황상의 분기탱천한 외침에 금군들은 아까와 달리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기세가 장히도 살벌한지라 나도 모르게 아무것도 없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러다 희게 질렸다.
만약 무륜이 여율령을 죽이려 든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흑월이 그런 내 손목을 쥐어 지탱해 줬다. 담담한 시선을 마주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래. 그럴 리 없다. 다소 과한 처벌까진 하더라도, 무륜은 여율령을 죽이지 않을 거다. 정확히는 죽일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에야 나는 상황을 바로 볼 수 있었다. 그의 분노를 면전에서 받은 여율령은 태연했다.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나를 힐긋 보곤 입을 열었다.
“제 목을 치는 건 쉽습니다. 하나 향후 폐하께서 정사를 보시다 난관에 봉착할 때면, 필히 절 떠올리며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잘난 혀를 놀리는가. 실로 오만하고 방만한 인사로다.”
“그만한 신분과 재력과 능력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한 여율령이 무륜과 내게만 보일 각도에서 입을 벙긋거렸다.
‘그리고 장인어른인지 시아버지인지 몰라도 어쨌든 사돈어른이 될 사람인데, 이 정도 언사는 봐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미친. 아니, 진짜로 미친.
너무 어이가 없어 턱이 툭 떨어졌다. 무륜의 시선이 여율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 또 지금 각도에선 내 표정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여율령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짓으로만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다. 이 정도로 네 마음을 아실 것 같았으면 진작 알아차리셨겠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지하 뇌옥을 채웠던 황제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무륜이 용포 자락을 휘날리며 뇌옥을 나섰다.
“남은 이야기는 나가서 마저 하지. 이리 음습한 곳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것 하등 없느니.”
마치 배부른 호랑이처럼 슬렁거리며 뇌옥을 나섰다.
검을 갈무리한 채 뒤따르는 금군들은 어리둥절했다. 짐작 가는 건 상서령뿐이었다. 뭘 어쨌는지 몰라도 황제의 분기를 단숨에 누르다니. 과연 백년 묵은 구렁이다. 그들은 속으로만 감탄했다.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나는 웃을 수 없었다.
한숨을 삼키며 슬쩍 손에 쥔 작은 목각함을 여율령에게 건넸다. 그가 함을 품에 넣어 갈무리했다. 그걸로 됐다. 처분을 하든 해독제를 위한 것에 쓰든,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할 터였다.
* * *
나흘은 짧았다. 그동안 나는 여율령의 저택으로 돌아와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일가식솔이 다 몰려들어 내 의중을 물어댔다.
“도련님, 누운 자리는 어떠세요.”
“음. 좋다.”
“당과와 식혜는 어떠세요. 도련님 오신다고 주방에서 산처럼 만들었어요.”
“음. 그도 좋지.”
“덥진 않으세요? 부채 부치리까?”
“음. 그래.”
잠깐 들른 여율령은 복돼지처럼 방을 뒹굴뒹굴하는 날 한심하게 보다 돌아갔다. 섭선 너머로 혀 차는 소리는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