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9화
“손 이리 주거라.”
말은 달라고 하면서 여율령은 얼굴을 짚고 있던 이화의 손을 휙 가져갔다. 그러곤 손바닥에 슥슥 글귀를 적기 시작했다. 오스스 소름이 돋은 이화가 손을 뺐다.
“뭡니까.”
“갑옷 입은 꺽다리들이 저리 서 있으니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있나.”
일류 무인으로 구성된 금군을 저리 말할 수 있는 건 아마 황제나 여율령 정도뿐일 터였다. 졸지에 꺽다리가 된 금군이 눈을 부라렸다.
이화는 여율령과 그 뒤편의 금군들을 보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줬다. 흑월도 쥐고 있던 손에 제 할 말을 적었다. 양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안 봐도 뻔하다. 대뜸 위사장을 관둔다는 소리를 했으니 네가 예 갇혀 있겠지.
-다 들었습니다. 3황자의 독에 당하셨다면서요.
고개를 확 튼 이화가 여율령을 봤다.
“흑월에게 말하셨습니까?”
“내가 말한 게 아니다.”
여율령이 아니면 말할 사람은 한 명뿐이다. 이화의 중독을 알고 있는 또 한 사람. 여씨 가문의 의원. 눈을 치뜬 이화가 여율령의 손을 낚아챘다.
-그 노인네. 입 무거울 거라면서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실제로도 그랬지. 하지만 널 아끼는 마음이 내 예상보다 더 지극했던 모양이야. 흑월이 네 용태를 다그쳐 묻자마자 울음이 터졌다더군. 덕분에 더 숨길 수 없었다더라.
“음. 그렇게 되었다.”
어이가 없는 한편, 뜻하지도 않은 사람이 그리 생각해 준 것에 기분이 묘해졌다. 이화는 한숨을 안으로 삼켰다. 이미 알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흑월이 마지막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화가 여율령과 대화하는 사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던 흑월이 그의 손을 다시 슬쩍 잡았다.
-제가 반드시 해독법을 찾을 것입니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이 어둡게 빛났다. 굳은 결심을 한 자의 눈이었다. 안에 맺힌 목숨과 맹약이 이화에게도 보였다.
“그래, 든든하구나. 하면 너만 믿으마.”
흑월은 이화의 손을 양손으로 그러쥐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던 말을 마저 하마.”
-우선 한 가지 그나마 위안이 될 소식이 있다. 네 피는 독이 되지 않는다. 체액도 마찬가지다.
이화는 바로 알아들었다. 저로 인한 2차 중독은 없을 거란 뜻이었다. 오직 대상에게만 해를 끼치는 독. 3황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 독을 만들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또 네가 위사장직을 사임하는 이유를 황상이 궁금해하고 있다. 나는 오늘 너를 설득하겠다며 이 자리에 온 것이고. 이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있느냐?
이화는 말이 없었다. 그도 며칠 고민해 봤으나 명쾌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면 내가 생각한 방법을 들어보겠느냐?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여율령이 이어 글귀를 썼다.
-우선 황상께는 접때 들은 말이 충격이라 순간 욱하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둘러대거라.
-그분이 무슨 말을 한 줄 알고 그리 말하십니까.
-그쯤이야 안 봐도 뻔하지. 네 부상을 책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셨으리라.
진정 귀신이었다.
-각혈의 주기는 얼마나 되느냐.
-주에 한 번 정돕니다.
-그럼 아직은 괜찮다. 감추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니. 우선은 위사장직에 얌전히 복귀하거라. 그러다 황상께서 완전히 마음을 놓으시면, 그때 내 너를 조용히 빼돌려 주마.
글귀를 적던 이화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도망이 아닙니까.
-맞다. 하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도망이 아니면 넌 여길 나갈 방법이 없다. 겉으론 유야무야 넘어간 척하셔도, 황상께선 필시 오늘 일을 기억에 남겨두실 테니까.
잠깐 망설인 여율령이 말을 이어갔다.
-차라리 그냥 털어놓음은 어떠하냐. 숨기려는 연유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이화는 여율령의 손가락을 잡아 그가 다음 말을 적지 못하게 막았다.
-지금 시점에 제가 살아날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1할 미만이다.
-망설이군요. 제가 당신을 한두 해 봅니까.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여율령의 손이 허공을 헤맸다. 제 손에 섭선이 없음을 확인한 그가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그의 손톱이 이화의 손바닥에 지붕을 그렸다. 그 밑에 격자창이 만들어지고, 다시 그 밑에 네 개의 점이 찍혔다. 무(無). 없다는 뜻을 가진 한자가 찍힌 손을 이화는 굳게 말아 쥐었다.
“보약을 지어 주마. 달여 마시거라. 일전의 부상이 온전히 다 낫지 않았잖느냐.”
그때 입은 외상은 완벽하게 나았다. 그를 아는 여율령이 이렇게 말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화는 어렵잖게 속뜻을 읽어냈다.
아직 손쓸 도리가 없다곤 하나, 해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일. 게다가 남방의 독에 대한 지식을 가진 여율령이다. 기본적인 해약을 조합해 줄 테니, 그걸 보약처럼 눈속임하여 마시라는 뜻이었다.
“언제부터 그리 좋은 아비였다고?”
추상같은 옥음이 창살을 넘어왔다. 무륜이 뇌옥의 입구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이화와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난 여율령이 먼저 읍했다.
“이 나라의 홍복을 뵙습니다.”
“집어치워.”
여율령을 뒤따라 인사를 하려던 이화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아래로 숙인 그의 낯이 창백해졌다. 흑월이 그런 이화를 걱정스레 보며 버릇처럼 그 소매를 살짝 쥐었다. 무륜의 기세가 한층 살벌해졌다.
이 모든 연쇄를 지켜본 위수혁은 형이 보고 싶어졌다. 위중혁은 어서 복귀하시라는 금군들의 원성을 뒤로한 채 집에서 홀로 면벽 수련 중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으면 도성 땅을 밟은 바로 그날 잡아다 말단으로라도 금군에 넣었을 텐데.
검은 공단화가 음습하고 지저분한 뇌옥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화의 뇌옥 앞에 선 무륜이 내부를 훑었다. 서늘한 눈은 여율령과 흑월, 그리고 이화를 거쳐 안쪽에 달린 자물쇠에서 멎었다.
“짐은 말이다, 이렇게 열쇠가 넣어진 채로 부러져 잠긴 자물쇠를 보면 견딜 수가 없어.”
뭔가 이상했다. 살벌한 기세도 기세지만 그렇게 말하는 무륜은 심히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위수혁. 네 검을 다오.”
지목당한 위수혁의 심장이 철렁했다. 하나, 감히 지엄한 황제의 명을 거부할 수도 없는 일. 그는 묵묵히 검대를 풀어 검집째로 바쳤다.
무륜은 검을 받자마자 뽑아 들었다. 검집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흑월이 여율령과 이화의 앞을 막아선 것과 검을 치켜든 무륜이 창살 사이로 자물쇠를 내려친 건 거의 동시였다.
카앙!
불꽃과 함께 날카로운 소리가 뇌옥을 울렸다. 자물쇠는 멀쩡했다. 무륜은 굴하지 않고 재차 칼을 내려쳤다.
당황한 이화가 여율령을 봤다. 그의 낯이 드물게 굳어 있었다. 여율령도 예상치 못한 사태라는 뜻이다. 피가 식었다.
챙!
어서 말려야 한다 생각한 순간, 무륜의 검이 부러졌다. 조각난 날이 역으로 튕겨 나가 무륜의 옷자락을 길게 베었다.
“폐하!”
“폐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위수혁을 위시한 금군들이 일제히 뇌옥의 바닥에 부복했다.
“새 검을 가져와라.”
“폐하. 제발-”
“가져와!”
목숨을 건 위수혁의 항명에도 무륜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금군들이 우물쭈물하며 자리만 지키자 무륜은 친히 한 명을 지목했다. 지목당한 금군은 희게 질린 낯으로 검대를 풀었다.
보다 못한 이화가 읍하며 나서려는데, 내내 침묵하던 여율령이 입을 열었다.
“폐하, 날이 잘못 튀면 감옥 안쪽으로도 날아올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시선이 여율령에게 와 꽂혔다. 시선은 이내 옆으로 움직여 이화를 향했다. 찰나의 망설임을 여율령도 보고 이화도 봤다. 때는 바로 이때였다. 여율령이 얼른 말했다.
“감히 폐하의 명을 어기고 지하 뇌옥을 어지럽힌 건 제가 아닙니까. 예서 나가면 저를 벌하시고, 우선은 고정하십시오.”
“상서령의 말이 옳습니다, 폐하.”
이화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다 보는 앞에서 상서령의 편을 들자 주춤했던 무륜의 기세가 다시 타올랐다.
여율령이 한쪽 눈썹을 위로 들었다. 이 녀석이 이리 눈치 없는 녀석이 아닌데? 하지만 이어지는 이화의 말에 여율령도 무륜도 할 말을 잃었다.
“나가면 상서령을 벌하시고 부디 옥체를 보중하소서. 만에 하나라도 상하고 다치실까 염려됩니다.”
“…….”
무릎 꿇은 금군들의 어깨가 떨렸다. 웃으면 안 돼. 절대로 웃으면 안 된다. 여기서 웃으면 X되는 거야! 그냥 X도 아니고 아주 개X되는 거라고!
“하아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무륜이 말했다.
“짐을 걱정해 주는 이가 이렇게 많으니 나라의 홍복이다. 다들 일어나라.”
금군이 절도 있게 기립했다.
“몽휼에게 장인을 데려오라 시켰으니 앞으로 한 시진이면 예 도착하겠지. 그때 다시 오마. 부자간의 회포는 지금 다 풀어둬. 아마 한동안은 얼굴 마주하기도 힘들 것이야.”
황제의 으름장에도 여율령은 담담하게 읍했다.
“폐하의 은혜, 하해와 같습니다.”
* * *
무륜은 여율령과의 회포를 풀라 했지만 사실 그와 나눌 만한 대화는 다 나눈 후였다. 대신 이번엔 흑월이 내 손을 잡고 자리를 폈다.
그는 주로 내 몸 상태를 세세하게 캐물었다. 고통도 없고 진행도 더딘 독인 만큼, 초반인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노라 해도 쉽게 믿지 않았다.
-여기 일이 정리되면 잠깐 남방에 가 있을까 합니다.
-네가?
-예. 암묵단원 둘이 이미 여장을 꾸려 떠났습니다. 그래도 영 불안하여 제가 직접 가겠다고 상서령께 청했습니다.
-가지 마.
글자를 꾹꾹 눌러 썼다. 흑월이 나를 물끄러미 봤다.
-너 하나 더 간다고 달라질 게 있겠느냐.
“다르지.”
움직이는 손가락의 선으로 우리의 대화를 유추한 여율령이 대답했다.
“흑월의 실력은 암묵단 내에서도 제일이다.”
그가 가면 여러모로 일이 수월해진다는 뜻이었다. 정보 수집이든 약초의 채집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