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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8화 (38/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8화

초조함에 광실을 오가는 무륜의 걸음이 빨라졌다.

‘지금이라도 꺼내 데려와야 하나. 아니, 아니다. 마음 약해지면 아니 돼. 아직 위사장을 사임하겠다는 생각이 만만이지 않은가.’

걸음을 뚝 멈춘 그가 위수혁을 돌아봤다.

“……왜 위사장직을 사임하려는지 혹 들은 바가 있느냐?”

“그는 모르겠습니다. 여쭈어볼까요?”

“그래. 나중에 슬쩍 떠보거라. 내가 시킨 것은 비밀로 하고.”

“명심 봉행하겠습니다.”

위수혁이 물러간 후, 무륜은 정리된 책상 앞에 다시 앉아 정무를 봤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화로 가득했다. 결국 일다경도 못 가 붓을 내려놓았다.

무륜은 태감을 불렀다. 노관이 조르르 달려와 읍했다.

“이화의 뇌옥에 비단 보료를 넣으라.”

태감 영감의 눈이 빛났다. 어디 감히 위수혁에 비할쏘냐. 위수혁이 지렁이면 그는 처마 밑에 매달린 비단구렁이였다. 눈치로는 황궁 제일인 그가 은근슬쩍 말했다.

“넣는 김에 침상과 탁자 같은 것도 같이 들일까요?”

멈칫한 무륜이 잠깐 생각하는 척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생물방에서 당과랑 식혜도 가져다줘라. 어차피 저 주려 만든 것이니. 그냥 두면 상할까 저어된다.”

상하면 버리면 될 것을. 그리 생각하면서도 태감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크흠흠 헛기침을 하는 무륜에게 분부 받잡겠다 빙긋이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이화가 지하 뇌옥에 갇히고 사흘. 여율령이 무륜에게 독대를 청했다.

무륜은 분명 입막음을 했으나 여율령에겐 소용없는 짓이었다. 귀신같이 알아차린 여율령은 당당하게 이화를 만나게 해 달라 청했다.

일언지하에 거절하려던 무륜은 어제까지도 종종 우셨노라 위수혁이 고한 말이 떠올라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칠 여율령이 아니었다.

“폐하, 제가 아들 녀석을 설득해 보겠나이다.”

“네가?”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렇게 왔으니 분명 이화가 뇌옥에 갇히게 된 연유도 아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어째 이리 찝찝할까. 계속 뭔가 걸리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무륜은 자신의 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때, 어떤 가정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네놈. 이화가 이런 짓을 벌일 걸 알고 있었군.”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소신도 매우 놀란 참입니다.”

여율령이 태연히 답했다.

무륜은 확신했다. 저 새끼 알고 있었구나. 그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성질 같아선 나란히 지하 뇌옥에 넣어주고 싶었다. 하나 그는 불가능했다.

사실 위사장이었던 이화를 뇌옥에 가둔 것에도 많은 무리가 따랐다. 직위의 반환은 죄가 되지 않으니 죄목도 분명치 않다. 굳이 죄목을 붙인다면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힌 죄나 되겠다.

어느 쪽이든 지하 뇌옥에 넣을 명분은 없었다. 불문에 부치고 감췄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나중에 지하 뇌옥에서 나온 이화가 공론화라도 하는 날엔 무륜은 퍽 곤란해질 터.

‘물론, 이화라면 그리하지 않겠지.’

자글거리던 마음이 한풀 꺾인 찰나-

“아, 하지만 왜 사임하려 했는지 짐작 가는 건 있군요.”

여율령이 웃었다. 뱀 같은 웃음이었다.

방금 몰랐다고 했으면서 이유는 짐작이 간단다. 무륜은 저게 말인지 똥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여율령을 지하 뇌옥에? 아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저런 놈이랑 어찌 한 지붕 아래 있을쏘냐. 그냥 어디 먼 섬에 귀양을 보내는 것이 상책 중의 상책이리라.’

생각할수록 좋은 방법이라 무륜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니, 소신에게 맡겨주시면 멀끔하게 해결해 드리리다.”

“그 짐작 가는 일이 뭔지부터 고해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는 함부로 말할 수 없나이다. 어찌 아들의 사사로운 사정을 아비 된 자로서 왈가왈부하오리까.”

강철의 주둥이는 황제에게도 지지 않았다.

여율령은 황제가 아무리 을러도 눈 하나 깜박 않고 버텼다. 결국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무륜은 오늘부터 적당한 섬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화의 면회를 허락했다.

* * *

지하 뇌옥에 걸음 한 여율령은 이화의 감옥 앞에서 말을 잃었다. 천하의 여율령도 이런 황당무계한 풍경은 난생처음이었다.

천개가 드리워진 고급 침상. 원목의 탁자와 비단 보료가 깔린 의자. 3단의 협탁. 섬세한 난이 쳐진 물병. 그 옆의 자개가 새겨진 함에는 약과와 떡 같은 주전부리가 가득했다.

어린애 팔뚝 두께의 창살과 핏물이 말라붙은 벽면을 미루어 분명 지하 뇌옥이 맞는데, 살림살이는 황제의 침전보다 고아했다. 이화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엉덩이에 깔고 앉은 비단 보료의 존재감이 유독 선명했다.

“잘 지내는 듯해 다행이구나.”

이화는 목각함을 만지작거렸다. 자물쇠는 잉어를 닮은 물고기로, 여씨 가문의 상징이었다. 여율령이 가지고 다니는 섭선에도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다시 말해, 여기 있는 물건 중 일부는 여율령의 입김이 닿은 것들이었다. 그런 분이 저리 기함하시다니. 어이가 없는 한편, 참으로 그다웠다.

“나 말고도 네 생각 지극한 분이 황궁에 또 있음을 잠깐 잊었다.”

정확히는 이 정도로 호들갑 떠는 팔불출일 줄은 몰랐음이다. 금세 여유를 되찾은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이화의 뺨이 붉어졌다.

여율령은 위수혁에게 금군을 물려달라 청했다. 위수혁이 고개를 가로젓자 여율령은 그렇군요, 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이화와 위수혁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렇게 쉽게 물러날 인사가 아닐진대.

“그렇다면 문이라도 열어주십시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라면 예서도 나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비 된 자로 자식이 딱해 그렇습니다. 마침 안에 의자도 둘이니, 앉아서 느긋하게 말 나누고자 합니다.”

위수혁이 그래도 안 된다고 하기 전, 여율령은 선수를 쳤다.

“설득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설득.

여율령이 황명으로 봉문한 지하 뇌옥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위수혁은 고민했다. 이제껏 직접 겪어본 적은 없었으나 그는 여율령을 경계하고 있었다.

형인 위중혁은 술을 마시면 처음엔 무륜에 대한 칭송의 말을 늘어놓았고, 완전히 취한 다음엔 여율령에 대한 경고를 했다. 그래서 아마 본인도 무륜에 대한 말만 한 줄 알지, 여율령에 대해 언급한 건 모를 것이다.

‘수혁아, 너도 금군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냐. 하면 내 말 새겨듣거라. 황궁에는 말이다. 어지간하면 얽혀선 안 될 사람이 있다.’

위중혁은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소리까지 잔뜩 낮춰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상서령이었다.

‘절대로 적대하지 말고, 딱히 친분도 쌓지 마라. 알겠느냐?’

그냥 소 닭 보듯 하라는 말이었다. 위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술 취한 사람의 주정이라 별로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그를 모르는 위중혁은 착한 동생이라며 위수혁의 머리를 문질러 주다, 뭘 떠올렸는지 부르르 떨고는 그대로 탁자에 엎어졌다. 축 늘어진 위중혁을 부축해 침상으로 옮긴 위수혁은 생각했다.

과거 남방에 파견되었을 때, 오랑캐 장수 수십 명에게 둘러싸이고도 외려 세 명의 목을 따 온 형님이었다. 가공할 무위를 떨치는 형님이 이렇게까지 질색하시다니. 없던 경계심이 그 순간 눈을 떴다.

“알겠습니다. 딱 일다경 만입니다.”

하나, 황제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했다. 여율령을 여기 보냈다는 것 자체가 곧 무륜이 이화의 설득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위수혁이 맞은편에 선 금군에게 고갯짓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금군이 다가와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지하 뇌옥의 자물쇠는 열쇠와 함께 특수한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녹이 슬지 않았고, 어지간한 충격으론 부술 수도 없다. 게다가 구조 또한 복잡하여, 만약 열쇠를 분실하면 만든 장인을 데려와야 하는 물건이었다.

여율령이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그가 말했다.

“흑월.”

흑월이 귀신처럼 스르륵 나타났다. 위수혁은 ‘상서령!’이라 외치면서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도주는 아니다. 그건 악수 중의 악수. 저자가 아무리 대단하다곤 하나 혼자 이 자리의 금군들을 다 막아낼 수도 없다. 하면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저자를 문안에…… 잠깐. 문안? 문 바깥이 아니라?

흑월이 무언가를 스윽 들어 보였다. 뇌옥을 닫는 자물쇠와 열쇠였다.

기함한 위수혁이 내적 비명을 질렀다. 아니, 저게 왜 저기 있어! 위수혁이 자물쇠 담당인 금군을 돌아봤다. 그는 허둥지둥하며 허리춤을 더듬고 있었다.

‘당했다.’

철컹. 안쪽에서 자물쇠를 잠근 흑월이 그대로 열쇠를 부러뜨려 버렸다.

‘……저게 저렇게 쉽게 부러질 물건이 아닐 텐데?’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절망한 위수혁의 낯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자, 그럼 폐하께서 자물쇠를 만든 장인을 데려오실 때까지 반나절은 걸릴 터이니 오랜만에 부자간의 허심탄회한 담화라도 나누자꾸나.”

형님의 말이 맞았다. 그분은 눈치는 없어도 혜안은 있으셨다. 앓는 소리를 낸 위수혁이 자물쇠 담당이었던 금군에게 현 상황을 폐하께 전하라 명했다. 안 그래도 하얗게 질렸던 금군의 낯이 시체처럼 변했다.

안 돼. 못 물러줘. 그러게 누가 열쇠 관리 그따위로 하래. 위수혁은 단호했다. 금군이 지옥으로 걸어가는 죄인처럼 뇌옥을 나섰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여이화는 딱 한 마디로 감상평을 남겼다.

“미치셨습니까.”

“걱정해 주는 건 고맙다만 나는 멀쩡하다.”

“하면 실성하셨습니까.”

“같은 말이지 않으냐. 너야말로 뇌옥에 갇히더니 며칠 새 심신이 쇠하기라도 했느냐.”

그래. 내 문과에 장원급제를 해도 저 인간을 말로 이기진 못할 것이다. 이화는 한탄하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른 빈손을 흑월이 조심스레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슬쩍 옆으로 꺾자 상심한 강아지 같은 눈이 보였다. 복면에 가린 낯이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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