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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7화 (37/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7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검은 필요 없다니. 설마 저런 말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석해도 저를 내치는 말이라 허망하고 황망한데,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뭣보다 예전이었다면 그 무슨 말씀이냐, 저가 다 잘못하였다, 제발 곁에만 있게 해 달라,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겠으나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이미 죽은 3황자의 몸에 칼이라도 꽂으면 이 지독한 마음이 가라앉을까. 이화는 처연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무륜이 흠칫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을 때, 이화가 말했다.

“폐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결심을 세운 이화는 순식간에 제 마음을 갈무리했다. 연약하던 마음이 단단한 성벽처럼 변했다. 과연 저는 확실히 여율령의 아들이라, 이화는 자조했다.

“신 여이화. 지엄하신 폐하의 뜻을 받들어 위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밀영군 두엇이 기어이 서까래에서 떨어졌다. 당황하긴 내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저것이 감히 황상을 상대로 저잣거리의 연애 기법을 시험하나 했다. 그만큼 지금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하나 그들이 아무리 황망해도 황제보다 황망하랴. 무륜은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심지어 이 중요한 순간에 평소보다 더 맹해진 이화가 불길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또 자중하는 마음으로 한동안 수도를 떠나 한적한 곳에 내려가 있을까 합니다.”

사임으로 모자라 제 발로 귀양까지 가겠다는 뜻이었다. 무륜의 뇌 중에 있던 끈 하나가 뚝 하고 끊겼다.

“지금, 네 지금 뭐라 했느냐.”

“위사장직을……”

“물러나? 자중을 해? 누구 마음대로!”

무륜은 이화에 대해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안다 자부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이화의 감정은 충절에 기반한 맹목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돌을 보고 이건 떡이니 삼키라 하면 몽휼은 ‘이건 돌입니다’ 하겠지만, 이화는 일단 삼키고 볼 것이다. 나중에 그것이 돌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군요’ 하고 말 이였다. 그런 이화가, 지금 저에게 뭐라 하였나.

“폐하?”

파란의 원흉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륜의 속이 거꾸로 뒤집혔다.

“이유를 말해봐라.”

이화의 눈이 황망함으로 크게 뜨였다. 이화만이 아니다. 사태를 지켜보던 이 모두가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검이 필요 없다고 바로 조금 전에 말한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륜은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그런다고 쉽게 물러날 녀석이었으면 북궁에서 날 그리 설득하지도 못했겠지. 아니면 무어냐. 북궁에서 날 붙잡고 늘어놓았던 말은 다 거짓이었더냐?”

“그는 절대 아닙니다!”

“하면 왜냐.”

이화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말이 있을 리가.

무륜은 그런 이화의 모습에서 그가 진심임을 알았다.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아니, 물론 중요했지만 분노에 눈이 가려진 무륜에겐 이화가 자신을 떠나려 했다는 사실만이 강렬하게 와 박혔다.

“위수혁 게 있느냐.”

“예, 폐하.”

보랑에 서서 상황을 주시하던 위수혁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위사장 여이화를 당장 지하 뇌옥에 구금하라.”

그 말을 들은 순간, 이화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무륜의 모순된 행태에 대한 의문도, 난데없는 구금에 대한 혼란도 아니었다. 천태백산 정상의 비석 앞에서 여율령과 나눴던 대화였다.

‘연정에 빠진 사내가 어찌 변할지는 상선도 모르는 것이다.’

“내 따로 명할 때까지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도록.”

“명 받잡습니다.”

이화는 뒤늦게 깨달았다. 여율령의 충고는 그가 아닌 무륜을 일컬음이었다.

‘아아…….’

짙게 드리웠던 안개가 단번에 걷혔다. 흐릿하던 무륜의 마음이 깨끗한 물처럼 들여다보였다. 그의 마음도 제 마음과 같았다. 꼭 같은 마음이었다.

이화는 들이닥친 금군들에 의해 제압되어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화가 잘못했다 하면 바로 금군을 물리려 했던 무륜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뭐냐. 왜 아무 말이 없어. 진심이냐? 진정 위사장 자릴 무르고 도성을…… 나를 떠나려는 게야?’

이화의 발언으로 정수리까지 올라왔던 열이 급격하게 식었다. 이제 무륜의 안엔 북쪽 설원 같은 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말릴 줄 알았던 황제가 아무 말이 없자, 눈치를 보던 금군들은 이화를 계속 끌고 갔다. 비틀비틀하던 이화의 걸음이 보랑 끝자락에서 엇갈려 접질렸다. 그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온 신경이 혹 날아올지 모를 황제의 저지에 쏠려 있던 터라 금군들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그들이 엎드린 자세 그대로 옹송그린 이화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는 저항 없이 훅 딸려 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무심하고 고운 낯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심지어 운다.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를 본 위수혁이 기함하고, 금군들은 흠칫했다. 무언의 말이 그들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적어도 금군과 밀영군 중, 위사장을 향한 황제의 총애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당에서 있었던 일을 직접 본 이들이 너만 알라며 알음알음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전한 까닭이다.

그들은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밀랍의 입을 가졌지만, 그들 자신의 선에는 안일하고 관대한 면이 있었다. 금군 밖으로만 말이 안 나가면 되지. 밀영군끼리만 알면 되지. 그렇게 황제의 모든 지밀 군사가 ‘위사장 성총 받은 설’에 대해 알게 됐다.

임시 금군대장 위수혁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미쳤냐. 돌았냐. 이분이 어떤 분인데 똑바로 안 해?!’

‘죄송하지 말입니다. 시정하지 말입니다.’

‘오냐. 지하 뇌옥까지 잘 모셔라.’

‘행선지가 지하 뇌옥인데 어떻게 잘 모십니까.’

‘지하 뇌옥 중에서도 입구에서 가까운 방들은 제법 깨끗하잖아. 그리고 압송도 좀 살살 하란 말이다, 이 눈치 없는 것들아.’

‘대장한테 눈치 없단 말을 듣다니. 인생 헛살았지 말입니다.’

입을 비틀어 웃은 위수혁이 도병으로 금군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나고, 이화의 팔을 잡은 금군들의 손길이 다소 느슨해졌다.

이화는 그런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딱히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왜 하필 지금이냐는 거였다.

넘치고 흔들리고 변해 버린 마음이, 그 간절한 홀 마음이 실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이 왜……. 왜 첫눈도 보지 못할 몸이 되어버린 지금이란 말인가.

원망할 대상은 없다. 남은 건 끝없는 한탄뿐이다. 이화는 뇌옥에 들어갈 때까지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였다.

<5장 같은 마음 완결>



기침은 없었다. 속이 조금 후끈하더니 무언가 울컥하고 치달았다. 이화는 입에 고인 것을 무명천에 뱉어냈다. 붉은 피가 매화처럼 수를 놓았다. 이번이 두 번째 각혈이었다.

핏자국을 물끄러미 보던 이화는 그를 탁자 위의 목각함에 넣었다. 달칵. 물고기 모양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작게 지하 뇌옥을 울렸다.

6장 첫눈의 고백

이화가 갇힌 지하 뇌옥은 황궁의 여러 감옥 중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곳이었다. 특히, 일단 들어가면 멀쩡히 살아 나올 수 없는 곳으로 유명했다.

무륜이 이화를 지하 뇌옥에 가둔 것은 다분히 의도된 일이었다. 그곳에 갇힌 것들은 대역죄인이거나, 고문 끝에 죽일 예정인 놈들뿐이었다.

물론 이화는 대역죄인이 아니다. 고문도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다만 무륜은 제 분노가 이만큼이나 크다는 걸 이화에게 알리고 싶었다. 거기에 ‘감히 그런 말을 해?’라는 마음에서 나온 토라짐과 심술이 더해졌다.

음습하다 못해 한여름에도 한기가 도는 곳. 그곳에서 고문으로 인한 통증에 밤잠 설치는 죄인의 신음을 듣다 보면 뉘우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분노로 광실에 들어앉아 보랑 한 번 내다보지 않을 적만 해도 무륜은 그렇게 생각했다. 뇌옥으로 끌려가는 중에 이화가 서럽게 울었다는 걸 전해 듣기 전까진.

“뭐라? 그걸 왜 이제 고하느냐?!”

그때 알았으면 그 아이가 지하 뇌옥 문턱을 밟기도 전에 데려왔을 텐데!

하지만 위수혁의 보고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갇히고도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하셨습니다. 탈수가 염려되는 상황이라 제 재량으로 물과 영건을 넣어 드렸습니다.”

“그건…… 잘했다.”

위수혁은 위씨 가문 내에선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위씨 가문 내의 일로, 위중혁 같은 놈들과 비교했을 때다. 기민한 눈치가 필수인 황궁에선 그리 내세울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이 인간이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황궁 기준으론 판단할 수 없는 일례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혹자는 그런 위수혁을 보고 혀를 차며 차라리 위중혁이 낫다고도 했다. 눈치가 있는지 없는지 하나만 할 것이지, 있다 없다 하니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탓이다.

그리고 지금은 없는 쪽인 위수혁이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덧붙였다. 지하 뇌옥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보고해야 한다는, 아주 이성적이고 금군대장다운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물을 건네며 위사장직에 대한 사임을 무르시겠느냐고 은근히 여쭈었는데, 그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쾅!

무륜의 주먹이 책상을 내려쳤다. 연적이 넘어지고 벼루가 뒤집히며 신료들이 올린 상소가 엉망이 됐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관들이 차분히 정리하는 사이, 무륜은 뒷짐을 진 채 광실을 왔다 갔다 했다.

“이화의 상태는 어떻더냐.”

“좋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심적인 충격이 커 보이셨습니다.”

그럴 만하다. 지하 뇌옥이 어떤 곳이던가. 황궁에 몸담은 자 중 그 악명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런 곳으로 끌려갔으니 혹 저를 아주 내쳤나, 그리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무륜은 뒤늦게 식겁했다.

‘정말 오해했으면 어쩌지? 설마 탈진하도록 운 것이 내가 저를 아예 내쳤다고 생각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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