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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6화 (36/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6화

한편, 심경이 복잡하긴 무륜도 마찬가지였다.

만나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막상 이화를 보자 제 안에 옹송그리고 있던 욕망이 가장 먼저 기지개를 켰다. 이미 그와 제 마음의 결이 다름을 알고 있는지라 더 그랬다.

하나 열화처럼 들끓는 속을 진정시킬 방법을, 무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내 너를 사모하고 있노라 고백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화가 보일 반응은 뻔했다. ‘당신의 뜻이 그러시다면’ 하고 제 마음이야 어떻든 받아들여 주겠지.

소맷자락 안에 숨겨진 무륜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는 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그보다 더 온전하고 완벽했다. 위중혁을 욕할 처지가 아니다. 저 또한 참으로 미련하고 답답한 사내였다.

그렇게 생각한 무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슬쩍 들고 저를 보는 이화에게 무륜은 다정히도 웃었다.

그에게 저를 대단한 자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설마 본인조차 모르던 일면마저 알게 하는 재주까지 있었을 줄이야.

‘여태 무감각하게 산 것은 욕심을 낼 대상이 없었을 뿐이라 그랬구나.’

처음 깨닫게 된 욕망은 거대한 짐승과 같았다. 까닥하다가는 자신을 집어삼킬 만큼 크고, 음험하고, 진득했다.

무륜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짐승은 난폭하고 거대해도 멍청하진 않았다. 진정 원하는 것을 온전히 얻기 위해서라면 내심을 갉아먹으며 인내할 줄도 알았다.

‘그러니 네가 나 좋다고 하지 않는 한, 이 마음은 홀로 남겨둘 것이다.’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이화를 빤히 보며 무륜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화가 알게 된다면 기함하여 도망칠 종류의 상상이었다.

동시에 무륜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세상의 주인이라 불리는 금국 황제의 자리에 앉았음에도, 정작 가장 원하는 것은 손에 넣지 못해 이런 망상이나 하고 있다니.

‘아니다. 생각해 보면 반절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결이야 바꾸면 되는 것. 내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으니, 저 순진한 녀석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륜은 나머지 반을 손에 넣기 위해 지금부터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어째 예전보다 거리를 두는 것 같구나. 안 본 새 내가 어색해졌더냐? 아니면 황제가 되었다고 이제 와 날 멀리할 참이더냐?”

서운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상처받은 이가 애써 상처받지 않은 척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화는 당치도 않다 소리치려 했으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무륜은 어색해하는 자신을 두고 농을 한 것이겠지만, 이미 떠날 마음을 먹고 있던지라 심장이 철렁한 탓이다.

눈꺼풀 하나, 손끝의 움직임 하나까지 이화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무륜은 심상치 않은 그의 반응을 바로 알아차렸다. 무륜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진정으로 그러한 생각을 했던 것이냐.”

옥음에 서리가 꼈다.

이화는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다시금 숙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이냐. 설령 떠날 때 떠나더라도 저런 오해를 산 채로 가는 것은 사양이다.

“결단코 아닙니다. 그저 폐하의 헌앙하신 풍모에 감탄하여…….”

급하게 말하다 보니 숨겨야 할 내심까지 죄 뱉어버렸다. 아뿔싸. 이화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 생각했더냐.”

어느새 좌대에서 내려온 무륜이 이화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지켜보던 밀영군의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저, 저!’

‘하늘 같은 무릎을 바닥에 대시다니!’

아주 서까래며 기둥 뒤며 난리가 났다.

구석에 없는 듯 선 내관들도 속이 바짝 타긴 매한가지였다. 세상에 어느 황제가 신하에게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한쪽이든 두 쪽이든 일단 꿇었음에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안절부절못하는 밀영군과 달리 내관들은 겉으론 고요했다. 나름 황궁 물을 먹은 그들은 엎드린 이화를 보다 유심히 살폈다.

이미 황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노래를 불러댄 참이라 그 총애가 드높음은 알고 있었다. 하나, 그마저도 예상에 한참 못 미친 평가였음을 지금 절감했다.

‘어쩌면 이미 성총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폐하께선 일찍이 병부에 계셨던 분. 혈기 왕성한 사내놈들이 넘쳐나는 부대에서 있는 일이야 뻔할 뻔 자고. 위에서도 눈 가리고 아웅 하니, 게서 뭔가 물들어 오셨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예 있는 사람 중 내관의 오해가 가장 깊었다. 물론 그것이 그냥 오해로 남을지 아닐지는 앞으로 무륜의 행보에 달려 있지만.

“고개 좀 들어봐라.”

황제가 아닌, 나리의 목소리였다. 당과를 쥐여주며 어르고 달래던 바로 그 옥음. 이화는 홀린 듯 웅크렸던 몸을 피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무륜은 순진한 어린애를 꾀는 나쁜 어른처럼 웃었다.

“평신(平身)하라. 아니, 아예 편히 있거라. 북궁에서처럼 말이다.”

북궁이라는 말이 나오자 굳었던 어깨가 눈에 띄게 풀어졌다.

역시 예상했던 바가 맞았다. 이화는 아니라 했지만 황좌에 앉은 자신이 영 어색하게 느껴졌음이라. 흠. 생각해 보니 괘씸한지고. 앉은 자리가 변했다고 홀랑 변해 버릴 위인으로 본 게 아닌가.

무륜은 자글자글 끓어오른 속내를 멀끔히 숨겼다. 대신 세상 다정하고 온화한 윗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여태 덜 펴진 이화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움찔하는 손가락을 손안에 두고 이리저리 굴리며 무륜이 물었다.

“내가 불편하느냐.”

부러 ‘짐’이라는 말도 쏙 뺐다.

“그러지 마라. 내 이제 막 보위에 올라 이 넓고 삭막한 황궁에 의지할 이 몇 없음이니. 그중 하나인 네가 나를 저어하면 내가 누구에게 기댈까.”

그야말로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요, 금군과 밀영군을 비롯해 그를 섬기는 모든 대소신료가 기함할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내관과 밀영군의 눈이 이화에게 쏠렸다. 어서 아니라고 해. 황망한 말씀 거두시라 고하란 말이다.

하나 영민한 와중에도 맹함을 잃지 않는 이화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외려 아까보다 더 크게 놀라 후드득 떨어지는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설마 무륜이 저가 떠나려 함을 아는 것인가. 제 이름이 직부사자의 명부첩에 이미 적혔다는 것도 아는 게 아닌가.

쿵덕거리는 심장을 추스르느라 대답할 여력이 없는 것을, 무륜이 알 턱이 없었다.

“어이해 대답이 없느냐.”

예쁜 정수리였다. 무륜은 그 정수리를 열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체 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런 반응일까. 목련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이화를 봤을 때도 이런 생각은 안 했거늘.

그만큼 오늘의 이화는 어딘가 이상했다. 처음엔 용포를 입은 제 모습이 낯설어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과한 반응이었다.

“그렇군. 네 죄를 네가 아는구나.”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화는 이제 더 떨어질 심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코 속이려고 속인 것은 아닙니다.”

덜덜 떨며 결국 토로하는 말에 무륜의 오해는 확신으로 굳었다.

“그랬겠지. 해도 내 눈이 안 보인다고 대놓고 망설을 해?”

“저는 그저 폐하께서…… 예?”

“나중에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던 널 보는 내 심정이 어떠했는지 아느냐? 그 참담함을 생각이나 했느냐?”

“…….”

“필히 안 했을 것이다. 했다면 네 몸을 그리 함부로 내던지진 못했을 터. 누가 네게 그리하라 하더냐. 네 목숨 바쳐 황제가 되었다고 한들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할 줄 알았느냐!”

말하다 보니 그때의 심경이 되살아나 과하게 흥분했다. 무륜은 오도카니 굳은 이화를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그가 얼른 표정을 풀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화는 무사했다. 화도 그리움에 묻혀 불식된 지 오래다. 아니었으면 몽휼도 위중혁도 도성을 밟는 순간, 그대로 손 맞잡고 지하 뇌옥행이었다. 그랬으면 자초지종이야 어떻든 일등 공신 둘을 팽했다며 무륜도 추문을 피하지 못했으리라.

저도 모르는 사이 사람 여럿 살린 이화였지만, 그의 마음엔 추가 달렸다.

전부 무륜이 말한 대로였다. 그땐 그저 무륜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하기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같은 상황이 온대도 그는 역시 같은 선택을 할 터. 빈말로라도 다신 그러지 않겠다, 그리 말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앞으론 같은 상황이 온대도 그 자리에 있는 건 그가 아닐 것이다.

이화는 먹먹한 가슴으로 침묵했다.

“공을 세웠으면 상을 내리는 것이 마땅한 일. 보는 눈들도 있고 하여 비단과 말을 내렸지만, 마음 같아선 근신이라도 명하고 싶었다. 지금은 좀 잠잠해졌으나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땐 위사장직을 거둘 생각도 하였다.”

욱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무륜은 진정 그런 생각도 했었다. 이화가 중상을 입은 이유가 저 때문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 이참에 아예 꽁꽁 싸매어 후궁전에라도 넣어둘까, 그거 좋은 생각이라며 제 안의 짐승이 으르렁 울음을 토했다.

‘아니. 아니 될 말이지.’

길고 마디진 손이 짐승을 쓸어 달랬다. 그건 하수 중의 하수요, 피치 못할 상황에 쓸 최악의 수였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절대 쓰지 않는다는 선택은 없었다.

몸을 일으킨 무륜이 다시 좌대로 가 앉았다. 손짓 하나 몸가짐 하나까지 신경 써 근엄한 자태를 만들어낸 그가 말했다.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검은 필요 없다.”

음. 실로 지엄한 황제의 모습이로다.

무륜은 속으로 자화자찬했다. 뒷짐 진 손에는 어느새 당근…… 아니, 당과도 들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그는 이화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렇게 무륜이 언제 당과를 내밀지 재고 있을 때, 이화의 머리통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구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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