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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5화 (35/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5화

문을 지키는 관리는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손이 발발 떨렸다. 그럴 만했다. 도성 관리인으로 임하고 30년. 그로서도 이런 입성 심사는 처음이었다.

개인적으론 까마득한 상사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란 곧 그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상서령.

사임했다곤 하나 아직 그 영향력이 병부 곳곳에 스며 있으며 금국 제일검을 논할 때 꼭 이름이 거론되는 전 금군대장 위중혁.

황제가 선황의 명으로 전장을 쏘다닐 때부터 옆을 지킨 그림자 몽휼.

그리고 상서령의 외아들이며 올봄에 황제의 위사장이 된 여이화.

전부 이번 황위 쟁탈전의 일등 공신이었다. 뒤로 후광이 비치는 개선장군 넷이 옹기종기 입성을 요구했다.

삼 년 전 5황자가 야차 같은 모습으로 환궁했던 일 이후, 이렇게 떨기는 처음이었다. 다행히 속으론 얼마나 떨든 몸에 밴 습관은 자연스럽게 공무를 수행했다. 상서령, 몽휼, 위중혁까지는 무리 없이 통과했다. 문제는 여이화였다.

“이제 그만 가셔도…….”

“보통 검문을 이렇게 간단하게 끝내나? 이건 약식도 아니고 그냥 통과시키는 거나 진배없잖나.”

진배없는 게 아니라 그냥 통과시키는 게 맞다.

“이 성벽 너머는 도성이다. 그게 무슨 뜻인 줄 아나. 여기가 황제 폐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뜻이다.”

아니다. 최후의 보루는 황궁의 외벽과 그를 둘러싼 금군이었다.

이화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위중혁이 말을 거들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나도 다시 하지. 고작 이름만으로 신분이 증명될 리 없잖은가.”

몽휼이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그가 도병으로 위중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눈썹을 휙 올린 위중혁이 검 손잡이를 쥐었다.

“뭐냐. 지금 해보자는 건가?”

미친놈아. 아니야…….

보는 눈이 몇인데 예서 다툴까. 잘못하면 공무집행방해죄로 전 금군대장과 현 황제의 그림자가 나란히 지하 뇌옥에 끌려가게 된다. 농담으로라도 사양이었다.

몽휼이 한탄했다.

“나오는 게 한숨뿐이군. 검에 대해선 한 손가락 안에 들겠고 머리도 꽤 좋은 편인데, 대체 눈치는 어디다 팔아먹는 겐가. 엿 바꿔 먹었나?”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내 눈치는 기민하다.”

기민 같은 소리 하네. 눈치라곤 약에 쓰려도 없는 놈이.

촌극을 보다 못한 여율령이 나섰다. 고아한 섭선이 촥 펼쳐졌다.

“그리 늦장을 부릴 거라면 나는 먼저 가서 폐하를 뵈마. 하나부터 열까지 드릴 말씀이 참 많아서 말이지. 네 오길 기다리다 네가 해야 할 말까지 내가 다 해버릴지도 모르겠구나.”

여율령은 어떻게든 황궁으로 가는 걸 늦춰보려는 이화의 속내를 간파했다. 그의 뒤편으로 꼬리를 바짝 세운 백사가 사아악! 포효하는 형상이 보이는 듯했다. 이화는 백사 앞의 병아리가 되어 쭈그러들었다.

둘을 번갈아 본 성문 관리는 신속히 통과 도장을 찍었다. 관리 짬밥이 아깝지 않았다.

남은 모르겠고 저는 다시 검사받아야겠다며 버티는 위중혁과 그의 멱살을 쥐고 이 멍청한 투구벌레 자식이! 라고 외치는 몽휼을 두고 여율령과 이화는 먼저 도성을 밟았다.

여율령이 나직이 말했다.

“정 마음에 결심이 덜 섰으면 그냥 예서 떠나거라.”

“그는…… 아닙니다.”

“그러냐.”

여율령은 더 묻지 않았다. 정확히는 더 물을 수 없었다. 그다음 순간, 범상치 않은 기세를 흩뿌리는 그림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이화가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곤 멈칫했다. 황궁에서부터 날아온 밀영군이었다.

“밀영군? 어째서 여기에…….”

마찬가지로 이화를 확인한 그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밀영군은 가타부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더니 재빨리 이화의 팔을 양옆에서 한 짝씩 꿰어 찼다.

“응?”

그리고 그대로 낚아채 황궁으로 날랐다.

“으어어?!”

여율령이 이마에 손 그늘을 만들었다.

“대낮에 코도 베어가는 것이 금성이라지만, 설마 아들을 채갈 줄은 미처 몰랐구나.”

모르긴 개뿔!

“알고 있었지요? 상서령?!”

이미 한참 멀어진 이화가 악을 썼다. 여율령이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섭선을 살랑살랑 부쳤다.

“전혀 몰랐다.”

눈이 휘둥그레져 달려온 위중혁과 몽휼이 여율령을 지나쳐 이화를 쫓았다.

“……고 하면 망설이겠지.”

탁. 섭선이 접혔다. 그의 눈은 이제 점으로 변한 이화와 그가 어디 무작스러운 놈에게 납치된 줄 알고 기함하여 쫓아가는 두 무사에게 닿아 있었다.

* * *

대전에 들자마자 이화의 시야는 무륜으로 가득 찼다. 황제만 입을 수 있는 붉은 비단에 황룡이 수놓아진 용포가 참으로 잘 어울렸다.

저리 훤칠한 대장부가 내 사모하는 임이었다. 부끄럼도 모르고 심장이 널을 뛰었다.

무륜은 시종일관 근엄했다. 마치 날 때부터 황제였다는 듯 사소한 말과 행동에서도 아득한 위엄이 묻어났다.

논공행상은 착착 진행됐다. 몽휼과 위중혁은 충신의 표본과 같은 모습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상서령은 집행관으로 수고했다며 가장 큰 상을 받았다.

집행관은 이용당했다. 소문에는 발이 없다고, 사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아는 대소신료들이 침음을 삼켰다. 태연한 건 상서령 본인뿐이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느른한 미소를 띤 채 입으로만 감읍하다 고할 따름이었다.

신료들이 복잡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대체 5황자가 황제가 될 줄 어떻게 알고 줄을 댄 거랍니까.’

‘저 구렁이가 이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까지 가진 게 아닙니까.’

‘혜안은 무슨. 안 것이 아니라 만든 것이지요.’

바쁘게 오고 가던 무언의 대화가 뚝 끊겼다.

만든 것. 그 의미를 되새기자 발밑에서 입을 쩍 벌린 괴물이 보였다. 식은땀을 쭉쭉 뽑은 신료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실로 무서운 말이었다. 심지어 이미 황제는 바뀌고 그 제위를 위협할 이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더 말해 무엇 할까.

마지막으로 위사장 이화에게 비단과 군마와 금자를 하사한 후, 논공행상의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무륜이 가장 먼저 광실을 나섰다. 남은 신료들은 파벌별로 모여 담소를 나눴다. 말이 담소지, 다들 혀에 칼을 물고 있었다. 그런 것엔 일절 관심이 없는 이화는 곧장 광실을 벗어났다.

보랑으로 나온 그의 어깨를 누군가 툭 건드렸다. 안면 없는 사내였는데, 허리에 황제의 직인이 박힌 검을 차고 있었다.

‘아, 나 없는 새 새로 뽑은 위사구나.’

태도가 공손한 것도 자신이 위사장임을 아는 까닭이리라. 그걸 인지하고 사내를 다시 보니 가슴이 뜨끔하고 홧홧했다. 이화는 어리둥절해 제 가슴을 짚었다. 중독 때문인가? 하지만 고통은 없다 하였는데?

위사는 황상께서 당신을 찾으신다 했다. 그를 본 여율령이 말했다.

“난 이만 저택으로 가보마. 귀환한 후로 내내 흑월 혼자 지키고 있었다 해서 마음이 쓰인다.”

이화는 그제야 흑월의 존재를 인지하고 경악했다. 분명 무륜과 함께 떠난 것을 들었다. 몽휼도 위중혁도 아니고, 하필 데면데면하던 흑월이라 이상하게 여겼는데 언제부턴가 온 정신이 무륜에게 집중되어 그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술 취하면 부모를 못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면 부모도 배신하는 법이지.”

“상서령!”

흔한 관용어인데 명색이 ‘아버지’인 여율령이 말하자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여율령이 낄낄거리며 천박하게 웃었다. 그러곤 섭선을 흔들더니 제 갈 길을 갔다.

이화는 위사를 따라 본궁의 보랑을 가로질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이 북궁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세 걸음마다 놓인 장식품은 나라의 귀보였고, 침소의 목전부턴 바닥에 비단이 깔려 있었다.

“왔느냐.”

문 앞에서 도착을 고하자 가장 먼저 날아온 말이었다. 묵묵한 어조지만 이화는 저 말에서 ‘어서 오라’는 반가움을 읽었다. 이화는 속으로만 ‘예. 저 왔습니다’ 하였다. 마음이 간질거려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들거라.”

“예, 폐하.”

폐하라는 부름이 입에 익지 않으면 어쩌나, 오는 길에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호칭은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이전에 부르던 ‘전하’보다도 지금이 부르기 편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 이름이 올바른 주인을 찾아간 까닭인지도 모른다.

이화는 가까이서 본 황제의 자태에 넋을 놓았다. 원래도 훤칠하고 잘생긴 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은 그 헌앙한 풍모가 실로 천신과 같았다. 저분이 용포의 주인이 아니라면, 세상에 용포를 입을 사람은 아무도 없음이다.

“마음에 드느냐?”

“예?”

“네가 입혀준 용포 아니더냐.”

“그 무슨 황망한 말씀이십니까. 거두어주십시오.”

무륜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가타부타 덧붙이는 말도 없었다. 대신 제가 말을 걸자마자 넙죽 엎드린 이화의 정수리만 빤히 쳐다봤다.

이화는 긴장하여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안 그래도 이미 제법 당황한 참이었다.

원래도 높으신 분인 건 알았다. 5년 전엔 언감생심, 만날 생각도 못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천것의 때를 빼고 겉으로나마 그럴듯한 모양새를 만들었다.

마침내 황궁의 담장을 지날 신분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북궁에 유폐되어 있었다. 예전의 찬란하던 광휘는 간데없었다. 잘생기고 술 취한 범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분명 그리 평했을 첫인상이었다.

그래서 이화는 그를 지엄하고 높으신 분으로 보면서도, 한편으론 별다른 거리감 없이 대할 수 있었다. 구관조처럼 조잘거리고 스스럼없이 곁에 다가섰다. 전부 과거의 나리를 기억하는 무의식의 발로였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 했던가. 원래도 높으신 분이 저리 의관 정제하고 화려한 방, 그것도 가장 높은 자리에 앉자 생경함이 고개를 들었다. 분명 얼굴은 내가 아는 그분인데,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지라 이화는 복잡한 심경을 감출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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