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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4화 (34/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4화

우르릉. 콰르릉.

불살라진 궁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렸다. 궤짝 안에서 우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무너진 잔해와 불타고 남은 잿더미에 고여 있다.

망연자실한 무륜은 그대로 앞으로 엎드려졌다. 설운 울음이 입안을 맴돌았다. 회한의 눈물이 흔적만 남은 황자궁의 기둥에 스며들었다.

상실과 비탄에 의해, 그는 반강제로 성장했다.

무륜은 스스로를 학대에 가깝게 담금질했다. 단단한 외관을 완성하고, 검을 갈고닦아 완벽한 무장이 됐다. 아직 여물지 못했던 몸도 순식간에 장성하여 대장부의 풍모를 보였다.

그러나 잿더미 위에 놓고 온 마음만은 조금도 자라지 못했다. 그 어린 마음이 꿈에서 이화를 찾고 있었다.

이화야. 이화야, 네 어디 있느냐. 너는 내 위사장이지 않느냐. 항시 내 옆에 있어야 할 이가 왜 예 없느냐. 어딜 갔는지 몰라도 재게 돌아오거라. 내 기다리다 지치노라.

그런 마음이 꿈결에 전해졌음인가. 엎드린 무륜의 앞에 흑피 단화가 단정히 와 섰다.

‘전하.’

무륜의 고개가 확 들렸다. 환한 낯의 이화가 바로 보였다. 목련 같은 내 임이 거기 있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무륜이 이화의 손을 잡았다. 주변이 회까닥 뒤집혔다. 그는 어느새 북궁의 광실에서 이화와 마주 앉아 있었다. 분명 자신이 이화의 손을 잡았거늘, 그새 위치가 상반되어 이화가 제 손을 잡고 있었다.

그걸 본 무륜은 지금이 언제인지 알았다. 이화를 밀어내기 위한 문답을 나누던 자리였다. 무륜의 심이 철렁했다.

내가 미쳤구나.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을까. 뭣 모른 채 저 좋다고 어리바리하니 왔으면 그대로 낚아채 삼킬 것이지. 진실은 개뿔. 막말로 그때 제게 질린 이화가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으면…….

무륜은 더 생각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안다. 확인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확인하는 도중 직감했다. 눈앞의 사내가 곧 제 안에서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란 걸.

이화가 선문답에 곤란해하고 있을 때, 무륜은 돌아갈 수 없는 징검다리 앞에 서 있었다. 돌아갈 수 없기에, 백번 천번 확인해 보고 건너야 하는 다리였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시 한번 변했다. 무륜은 어느새 광실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물 위로 옮겨졌다. 정확히는 돌로 만들어진 징검다리의 시작점이었다.

가만히 발치를 보던 무륜이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징검다리의 첫 돌인 줄 알았던 것은 사실 마지막 돌이었다. 무수히 펼쳐진 저 돌들이 사실 이미 다 밟고 지나온 것들이었다. 자신은 강 건너편에서 뒤를 돌아봤을 뿐임을, 무륜은 뒤늦게 깨달았다.

“……하.”

잠에서 깨어난 무륜은 허탈하게 웃었다.

웃다가 곧, 게 누구 없느냐 사람을 찾았다. 태감 영감이 예 있다며 읍했다. 무륜은 이화에 대해 물었다. 언제나 송구스러움을 감추지 않으며 ‘그는 사당에 잘 있노라’ 하던 태감 영감이 오늘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다른 대답을 내놨다.

“곧 돌아온다는 기별이 있었나이다.”

무륜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그러냐.”

……실은 덤덤한 척하는 거였다. 무륜은 시비에게 창을 열라 했다. 격자창이 열리고, 청명한 새벽하늘이 창의 반을 채웠다.

“그렇구나.”

아직 아침에 삼켜지지 않은 별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 *

6월 하순. 마침내 5황자를 황제로 만든 그의 일등 공신들이 환궁하는 날이 되었다. 갈 때와 달리 말과 마차를 통해 오는지라, 장히 서둘렀음에도 열흘이 소비됐다.

황제는 체모도 잊고 아침나절부터 정문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순찰하던 금군에게 딱 걸렸다.

바닥에 읍한 금군은 예 어쩐 일이시냐 여쭈었고, 황제는 대답할 말이 없어 침묵했다. 평신하란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온 이유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대체 어찌 이러시나. 혹 내가 나도 모르는 새 황상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있던가.’

금군의 머릿속에 지옥 불이 번져갈 때, 소식을 들은 금군대장 위수혁이 본궁에서부터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식은땀으로 푹 젖은 채 부복한 금군과 뒷짐을 진 채 슬렁거리는 무륜만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위사장이 어느 문으로 온다는 건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예 있으면 엇갈릴 수 있으니 본궁에서 기다리시지요. 위사장은 곧장 본궁으로 온다 하였습니다.”

무륜은 두 말 않고 본궁으로 향했다.

애초에 그들이 돌아오면 논공행상을 위해 대전에서 맞이해야 한다. 하나, 위수혁은 융통성 있게 그 부분은 쏙 뺐다. 의관 정제를 비롯한 나머지 자잘한 것은 내관을 비롯한 궁인들이 준비해 줄 것이다.

황제의 뒤를 따르며 위수혁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금군대장이 된 후에야 무륜을 직접 만나 볼 수 있었다. 해도 새 주인이 마냥 낯선 것은 아니었다. 5황자에 대한 건 형인 위중혁으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위중혁이 드물게 약주를 하는 날은, 곧 5황자 무륜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날이었다.

그의 이야기 속 무륜은 천하의 호걸이자 다시없을 성군이었다. 서늘한 예기를 품은 눈, 묵직한 분위기, 검을 들고 말을 달려 남방 오랑캐들의 목을 베는 장면은 어린 위수혁의 심장을 뛰게 했다.

“게 누구 있느냐.”

“예, 폐하.”

태감 영감이 답했다.

“위사장 일행은 어디쯤 왔다더냐.”

그는 똑같은 질문을 일다경 전에 하였다. 또 그 일다경 전에도, 한 식경 전에도 했다. 창틀의 그림자가 손톱만큼 움직일라치면 날아오는 질문에 위수혁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과묵하고 고고하며 위엄 있는 군황.

“왜 여태 거기밖에 못 왔다더냐. 비루먹은 말을 타고 오나.”

위엄이…….

“좀 전에 금성 앞이라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지금쯤이면 도성 문지기에게 검문받고 있을 것이옵니다.”

“검문? 지금 짐의 위사장을 검문한단 말이냐?”

고고함이…….

“원칙은 원칙인지라……. 물론 형식이니 금방 끝날 겁니다. 어떤 간 큰 문지기가 상서령과 위사장을 붙들고 있겠습니까.”

“혹시 모를 일이지. 안 되겠다. 밀영군 게 있느냐?”

“예, 폐하.”

황제의 은밀한 그림자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태감 영감은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밑의 내관이나 시비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아는 밀영군은 붓 대신 검을 든 직부사자나 다름없었다.

금군이 견고한 방패라면 밀영군은 아주 잘 듣는 검이었다. 황제의 명이라면 상대가 갓난애든 노인이든 베길 주저하지 않는 살인귀들.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절명한다는 유언비어가 시대마다 한 번씩은 돌았다.

궁인들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재게 가서 위사장 데려와라.”

그리고 무륜은 그런 밀영군을 이화의 마중을 위한 전서구쯤으로 썼다.

“명을 받듭니다.”

내용이 뭐가 됐든 무륜의 입에서 나온 이상, 그는 지엄한 황명이었다. 광실을 메웠던 살기 어린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감 영감은 더 하명하실 일이 없다면 이만 물러가겠다 읍했다. 문을 나선 그가 몰래 한숨지었다. 이미 늙은 몸이 잠깐 새 아주 폭삭 삭아버린 듯했다.

안에 남은 위수혁은 망부석이 됐다. 그는 제가 듣고 자란 5황자와 무려 밀영군을 마중용으로 보내 놓고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이는 황제를 연결하려 갖은 애를 썼다.

그런 위수혁의 속을 알 리도 없고 관심도 없는 무륜은 애가 닳아 혀를 찼다. 그는 문지기 앞에 선 이화를 상상했다. 뻘뻘 땀을 흘리는 문지기의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 들여 대답하고 섰을 모습이 눈에 훤했다.

‘처음 만났을 땐 마냥 영민한 줄 알았건만, 겪으니 보기보다 맹한 구석이 있었지.’

이화는 궁인들의 비웃음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었다. 아예 들리지도 않는 거였다. 성격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했다. 감정은 여러모로 미숙했다. 심지어 그 결도 세세하지 못해서 호와 불호의 양방향으로 넓게 나뉘었을 뿐이었다.

몸만 큰 어린애. 혹은 뭣도 모르고 주인만 따르는 강아지. 부당한 일을 당해도 부당한 줄 모르거나 설령 알아도 본인 일이면 그냥 넘길 사람. 그게 무륜이 아는 이화였다.

한데 그런 녀석이 선명한 예기를 품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무륜이 얽힌 일에서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불안과 초조가 말끔하게 가셨다.

무륜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여율령도 함께라니 금세 끝내고 오겠지.’

그러곤 너그럽고 여유로운 군주인 척하며 새로 구한 섭선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시비들이 저희가 파초선을 부쳐 드리겠노라 기함했으나 무륜이 들어먹을 턱이 없었다.

“완연한 여름이로구나.”

처음 만난 것이 눈도 녹지 않은 초봄이었지. 생각이 자연스레 다시금 이화에게로 흘렀다.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으매, 무륜은 저도 꽤나 뻔뻔한 구석이 있음을 새삼 알게 됐다.

서로 떨어지고 한 달. 무륜은 이제 이화에 대한 애달픔이나 그리움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보고 싶다 생각했던 것이 나중엔 열병으로 변했다. 당장 그 얼굴을 못 보면 죽을 것 같았다. 하루에도 열두 번. 산과 들을 내달려 만년 설산의 사당에 이화를 보러 가는 상상을 했다.

다시 불면하게 된 이후, 그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간신히 선잠에 들었다 악몽에 소스라쳐 일어나면 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사당에 있던 이화는 이제 도성 앞에 와 있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그리움은 더 커졌다. 이화를 보고픈 욕망도 한층 강해졌다.

체모고 나발이고 당장 달려가고픈 것을 참느라 무륜은 갖은 애를 써야 했다.

그 시각, 이화는 태감 영감의 말대로 도성의 검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지엄한 황명을 받든 밀영군이 도착하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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