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3화
시험 끝에 신수가 된 천태백호, 사월린, 진해는 각각 땅과 날씨와 바다에 대한 전권을 하사받고 신수로서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
누구보다 굳건한 힘과 영물을 통솔하는 힘을 가진 천태백호. 그는 영물들을 이끌고 땅을 달리며 무의미한 전장을 없앴다.
인간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힘과 사물을 움직이는 염력을 가진 사월린은 인세에 스며들었다. 그는 날씨를 부려 농사를 돕고, 법치하에 의해 세상이 돌아가도록 조율하며, 인간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위해 일했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재생의 힘을 부여받은 진해는 사월린이 내리는 비에 자신의 힘을 얹어 다치고 병든 이들을 치료했다.
전화(戰火)가 잦아들고 전염병이 물러났다. 세 신수는 그 후로도 각자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굽어살폈다. 오랜 평화의 시대가 이어졌다.
그 시대에 끝을 고한 건 사월린이었다. 본래 성미가 급하고 욕심이 많았던 그는 천태백호와 진해의 권능을 탐내었고, 종래엔 그 둘을 빼앗아 본인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신수가 되고자 했다.
천태백호가 그런 사월린을 막아섰다. 거대한 백호와 빙설기린의 싸움은 꼬박 열흘간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땅이 죄 가라앉으며 세상이 전부 바다가 될 위기에 처했다.
죽어가는 인간들의 신음을 보다 못한 상선이 거대한 연꽃을 내리매, 그 연꽃에 담긴 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바다에 수장되었다.
싸움은 사월린의 승리였다. 그는 남은 땅에 천태백호의 시신을 전시하듯 올려두었고, 시신은 곧 험준한 산맥으로 변하였다.
어린 진해는 겁에 질려 선계로 달려갔다. 그는 아무리 그래도 인세의 일에 저가 나설 수는 없노라 거부하는 상선에게 청하고 또 청했다. 결국, 그 정성에 감복한 상선은 선계를 버리고 진해의 등을 타 지상으로 내려왔다.
사월린은 상선에 의해 북방의 땅에 봉인됐다. 그리고 진해 또한 선계를 오가며 기력이 다해 바다에 잠들었다…… 는 권선징악적인 이야기다.
“말을 들어보니 여기 온 이후 매일 비석을 보러 오신다면서요. 코흘리개도 아는 이야기가 새삼스러울 리도 없고. 혹 북쪽 설원을 보시는 겁니까?”
“그래.”
그렇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여율령의 시선은 설원을 향해 있었다.
북쪽 땅은 죽음의 땅이었다. 풀 한 포기, 쥐새끼 한 마리 없는 메마른 땅인데 뭐 볼 게 있다고 저리 보시나.
나는 의아해하며 별생각 없이 그의 시선을 좇았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하얀 홑겹 장포를 입은 맨발의 사내를. 눈처럼 하얀 장발을 풀어 헤치고 선 그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저!”
“왜 그러느냐.”
“보고 계신 게 아닙니까? 대체 저 사내는 누굽니까. 아니, 사람이긴 한 겁니까?!”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저 영구동토에선 어떤 것도 살지 못한다. 하물며 사람이라니. 눈보라가 치는 것을 잘못 본 게지.”
그럴 리 없다. 여율령에게 향했던 고개를 홱 돌려 다시 설원을 봤으나, 방금의 사내는 홀연히 사라진 후였다. 뭐냐.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진정 내가 헛것을 본 겐가.
“만약 뭔가 봤다면 그건 사월린일 게다.”
“……사월린이요?”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여율령은 식겁한 내 되물음에 답하는 대신 영 딴소리를 했다.
“잊힌 이야기를 하나 해주마. 사실 오랜 평화의 시대에 종막을 고한 것은 사월린이 아니라 어떤 인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율령의 이야기는 내가 알던 금국의 설화와 미묘하게 달랐다.
“정확히는 사월린이 사랑한 인간이었지.”
그건 겨울처럼 추운 이야기였다.
날씨를 관장하는 사월린은 본신이 얼음과 서리로 만들어진 빙설기린이었다. 성격 또한 차갑고 냉정했다. 어떤 의미론 완벽한 지배자였다.
공사(公私)의 구분에 사(私)가 존재하지 않아 구분의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 연민이나 정상참작 같은 말은 없는 말이었다. 선인에게는 상을. 악인에게는 벌을. 사월린의 세계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오는 것처럼, 영원히 흑백일 것 같던 사월린의 세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사월린은 한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 특별할 것 없는 사내였다. 군중 속에 던져놓으면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할 만큼 평범했다. 그런 자가 어떻게 빙설기린의 마음을 송두리째 가져갔는지는 상선조차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수백 년을 눈 한 번 깜박여 보낼 수 있었던 사월린에게 백 년 남짓이 얼마나 길고도 안타까운 시간인지 알게 했다.
“수명은 신의 섭리였고 인간은 유한한 존재였다. 끝은 정해져 있었다. 그 사실을 사월린도, 그가 사랑한 인간도 알고 있었지. 그래도 멈출 순 없었다. 연정이란 그런 거니까.”
거기까지 들으니 문득 지금 내 상황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여율령이 또 뭔가 돌려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나.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여느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 미리 정해져 있는 줄 알았던 끝은 전혀 예기치 못한 때에 예기치 못한 형태로 찾아왔다.”
비극의 서막은 언제나 비슷했다.
사월린이 제 역할을 다하느라 하늘에서 날씨를 부리던 때, 도적 떼가 마을을 덮쳤다. 사내는 도적을 피해 도망하다 죽었다. 인간에겐 제법 흔한 죽음이었다. 모두가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사월린만 빼고.
“사내가 죽기 전. 사월린은 그의 죽음을 무던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잠깐 아프고 힘들겠지만, 그 또한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내가 어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사월린은 인정하지 못했다. 날씨가 뒤틀리며 온 세상에 한파가 몰아쳤다. 비와 우박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꽂혔다. 수백 개의 마을이 물에 쓸려 나갔다. 벼락이 떨어진 숲은 전부 잿더미로 변했다.
세상을 지탱하는 신수의 분노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너도 알던 대로 천태백호가 나섰다. 진해는 겁에 질려 옹송그리고 있었다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그때 이미 상선을 모시러 선계로 올라간 참이었지.”
“듣다 보니 느낀 건데, 하나부터 열까지 원래 내용이랑 다르군요.”
“같은 부분도 있다.”
“어디가요.”
“둘이 열흘이나 치열한 전투를 했다는 부분.”
결과는 사월린의 승리였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천태백호가 죽자 그의 힘으로 지탱하던 세상의 땅이 전부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하계에 도착한 상선이 연꽃으로 땅을 받치지 않았다면, 아마 모든 인간이 절멸하고 세상은 끝장났을 것이다.
“그래서 연 대륙은 연(蓮) 대륙이고, 그 형태도 원형에 가깝다.”
가라앉은 땅은 전부 바다의 차지가 됐다. 본래 호수만 하던 바다는 세상의 대부분을 덮을 만큼 넓어졌다. 심지어 커진 힘을 감당 못 해 마구 요동치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걸 통제하기 위해 어린 흑룡은 강제로 성장해야 했고, 그 여파로 벌써 수천 년간 긴 잠에 빠져 있다.
“일종의 성장통이지.”
여율령이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들을수록 묘했다. 처음엔 그래도 설화를 이야기해 주듯 하던 여율령의 말투가 종래엔 옆집의 난장판을 말하는 것처럼 바뀐 까닭이다.
“분노한 상선은 사월린을 잡아다 북쪽에 던져놓고 죽은 천태백호의 시신으로 결계를 만들어 그를 북쪽 땅에 가뒀다.”
여율령이 섭선으로 앞을 가리켰다. 눈보라가 치는 혹한의 땅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땅에 말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돌아가려는 고개를 간신히 붙들었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인간의 혼을 구슬에 가둬 북방의 땅 어딘가에 던져뒀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속절없이 여율령을 향해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는 여전히 냉정한 무표정으로 설원 어디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인간에겐 죄가 없지. 하지만 사월린은 너무 큰 죄를 지었어. 무수한 생명이 죽었다. 거기에 포함된 건 인간만이 아니야. 그 생명의 무게만큼 사월린의 벌도 무거워졌다. 그래서 상선은 그에게 가장 잔혹한 형벌을 내렸다.”
얼어붙은 정인의 혼을 찾아 설원을 헤매는 사월린. 나도 모르게 잠깐 그에게 이입했다 그만 아연해졌다. 나라면 견딜 수 없었으리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월린은 손톱보다 작은 구슬을 찾아 북방을 헤매고 있다. 하얀 홑겹의 장포를 입고. 긴 백발을 풀어 헤친 채로.”
홑겹의 장포. 풀어 헤친 긴 백발. 아까 내가 본 그대로였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오한이 일었다.
“네가 뭔가 보았다면 아직도 구슬을 찾고 있는 사월린이겠지.”
“노, 농은 그만두십시오.”
양팔로 몸을 감쌌다. 내력을 끌어 올려도 안에서부터 추위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먼저 들어가려 했다. 여율령이 그런 나를 붙들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다 했다. 나는 얼른 들어가려고 어서 하문하시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다.
“네 마음은 아직도 고요하느냐?”
나는 차마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여율령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넘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불변하였느냐?”
몸통을 감싼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아니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율령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더더욱 떠나야 합니다.”
“정히 그러하다면 여기서 바로 떠나거라. 황궁으론 가지 말고. 사월린에 대해 방금 듣지 않았느냐. 연정에 빠진 사내가 어찌 변할지는 상선도 모르는 것이다.”
“제가 결국 떠나지 못할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여율령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했다.
“그래.”
* * *
그날도 무륜은 불면에 시달렸다. 뒤척이다 겨우 선잠이 들면 오래된 악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암살자와 대치 중인 무륜을 발견한 가신. 그는 그대로 무륜을 데리고 도망쳐 나왔다. 불길이 확 치솟은 직후였다.
무륜은 안 된다, 저기 내 여동생이 있다, 내 방 자개함에 내 수연이가 있노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남은 것은 잿더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