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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2화 (32/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2화

홀로 남은 무륜은 시비를 시켜 술을 내오게 했다. 한동안 마시지 않았던 술은 황제가 마시는 것이라고 해서 별다르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별맛이 없었다.

그는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그러곤 장히도 취했다 싶자 그대로 보료에 드러누웠다. 끔벅이는 눈에 금박을 입힌 천장이 들어왔다. 제 형제들이 그리 많은 피를 흘리며 보고자 한 것이 바로 저 천장이었다.

한데 그를 보고도 무륜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고양감이나 성취감은 일절 없었다. 그저 텅 빈 가슴이 허무하고 허망해 외려 이화에 대한 그리움만 깊어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륜은 여동생의 죽음 이후 단 한 순간도 제위를 탐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무륜에게 있어 황제와 그를 상징하는 황좌는 제 사람들을 잡아먹은 괴물이었다. 실체를 농락한 허상이었으며, 사특한 피와 독이 흐르는 자리였다.

그런 무륜이 황위 쟁탈전에 발을 들인 건 순전히 이화 때문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진즉 몽휼과 함께 지한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결심을 바꾼 연유는 오직 하나. 함께하고픈 곁사람이 생긴 탓이다.

무륜은 한숨처럼 웃었다.

“곁사람이 아니지. 이런 마음을 품은 자를 그리 부를 순 없음이니.”

이화가 얼마나 자신을 생각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당장 이번 일만 봐도 그렇다. 어지간한 자들도 제 몸 바쳐 주군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마음과 이화의 마음이 같다고 볼 순 없었다. 똑같이 맹목적인 감정이라도 충심과 연정은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연정.

무륜은 이제 제 마음을 그리 부르는 데 한 치 주저함도 없었다. 은근히 짐작만 하던 마음은 창백하게 쓰러진 이화를 보는 순간 완전히 눈을 떴다.

제 안 어디에 그런 격렬함이 있었을까. 여동생을 잃었을 때도 막연하기만 했던 분노가 지옥의 겁화처럼 타올랐다. 머릿속으로 3황자를 몇 번이나 오체분시 했는지 모른다. 만약 이화가 그때의 제 머릿속을 봤다면 실망하여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지옥도였다.

“안 될 말이지.”

그래도 떠나진 못한다. 들어오기 전이었으면 모르되, 이미 들어온 후다. 위사장은 이제 결코 무를 수 없는 자리가 되었다.

무륜은 느리게 끔벅이던 눈을 감았다. 꼼지락거린 손이 다른 손의 손톱 끝을 문질렀다. 새벽의 어느 한 틈. 저와 선문답을 하던 이화가 그리했던 것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을 때, 흔히 빗물에 비유하곤 한다. ‘스며든다’는 표현을 위해서다.

무륜에게도 이화는 스며들어 온 사람이었으나, 비유하자면 빗물보단 눈에 가까웠다. 소복이 내려 쌓인 것을 보고 그래 거기 있구나 하고 말았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이미 녹아든 후였다.

척박하게 굳었던 땅. 그 흙 알갱이 하나하나에 언제 스몄는지 모를 그가 있었다.

“보고 싶다.”

이화. 이화야.

돌아오면 추상같이 화를 낼 것이다. 그리 마음먹었다. 네 목숨 초개같이 버려 나를 구한다고 내 너를 장하다 할 줄 알았느냐며, 다신 그러지 말라고 아주 혼쭐을 낼 참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초승달이 기울기 시작하자 무륜의 분노도 기울었다. 열이 식은 자리엔 그리움과 애달픔이 들어찼다.

이화가 돌아오면 그래도 처음엔 역시 야단을 칠 것이다. 하나 별다른 힘은 없을 거다. 언성을 높일 자신도 없었다. 어쩌면 말이 야단이지, 다신 그러지 말아 달라 애원으로 끝맺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러겠군.’

술기운에 기대어 잠들며 무륜은 황궁에 온 이래 처음으로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 * *

사당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몸은 완전히 회복되어 이제 지붕 위로 뛰어오르거나 내력을 운용하는 것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내가 뭐만 하면 왁왁하며 도련님 고정하시라 소리치는 암묵단만 아니었으면 수련까지 할 텐데. 아무리 구석진 곳으로 숨어도 소용없었다. 그냥 산책만 하는 거면 모를까. 슬그머니 검을 들라치면 어디선가 득달같이 나타났다.

아니, 의원이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의원이냐? 어이가 없어 따져 물어도 요지부동이라 결국 혀를 차며 가부좌를 틀고 내기를 다스리는 데 집중했다.

내가 3황자의 독에 당했음을 알게 된 후, 여율령은 곧바로 암묵단을 보내어 저택의 의원을 데려왔다. 이 시대의 신의(神醫)라 불리며, 의술로는 황궁 제일의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자다. 5황자를 진료한 의원이기도 했다.

그는 나와 여율령만 있는 자리에서 나를 진맥했다. 노쇠한 눈이 화등잔만 해지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찌 이리되셨느냐, 내 팔을 붙잡고 서럽게 울어 외려 나를 면구스럽게 했다.

담담하게 방법이 있느냐 묻는 여율령에게 그는 드높아진 울음으로 답했다. 여율령이 한숨을 쉬며 암묵단 듣는다 조용히 하라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의원은 그 길로 돌려보내졌다. 그를 옮기는 암묵단원의 등은 모르긴 몰라도 눈물, 콧물로 푹 젖었을 것이다.

“저리 보내도 되는 겁니까.”

“맹해 보여도 강단 있는 노인네다. 함부로 입을 놀리진 않을 테니 안심하거라.”

여율령은 내가 염려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 대답했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로써 내 죽음을 아는 자는 둘로 늘었다.

“폐하껜 말할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마주 잡은 손을 꽉 얽어 쥐었다.

“말을 하는 것이 옳은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아니잖느냐. 그보단 네가 어쩌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거라.”

여율령은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겨진 나는 망연히 생각했다.

처음, 중독된 것을 알고 죽음을 직감했을 때. 숨기기만 잘 숨긴다면 마지막까지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겨 불행 중에 안도했다. 무륜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한 생각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내가 당신을 구하고 죽노라고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입술을 꾹 물고 마른세수를 했다. 비녀의 끝이 검은 것을 확인했을 때 그토록 서글펐던 연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얼핏 귀에 상엿소리가 들렸다. 없는 상여를 지고 떠나던 황태자의 수하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떠날 순간을 알았던 그들처럼, 나는 지금이 내가 떠나야 할 순간임을 알았다.

외로워질 것이다. 꽃 같은 내 주군이 떠올라 매일 밤 가슴앓이를 할 것이다. 자는 날보다 잠들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을 것이고, 곁을 스치는 훤칠한 사내가 있다면 필히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름드리나무가 선 격자창 앞에선 언제나 그 너머에 있을 무륜을 그리게 될 터였다.

“흐…… 하.”

오는 줄 알았던 봄은 결국 오지 않았다. 세상의 계절은 봄을 지나 한여름에 접어드는데, 내 마음만 여태 엄동설한이다.

입으로는 푸슬푸슬 웃고 눈으로는 울었다. 어찌하길 바라냐고?

알리고 싶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당신을 더 보지 못하는 건 미치도록 두렵다. 그러니 저 좀 살려 달라. 제발 살려 달라, 처연히 매달리고 싶었다. 위로받고 쓰다듬받고 싶었다. 다 큰 후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지엄한 품에 안겨 잔뜩 어리광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마음으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화살을 쏜 건 3황자의 사람이었다. 독도 3황자의 독이다. 그러니 내가 죽는 것도 3황자 때문이다. 그런 정론은 무륜의 마음에 조금의 위안도 되지 못할 터.

그는 절망할 것이고, 자책할 것이다. 틀림없이 슬퍼하겠지. 그러니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모르게 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륜만큼은 내가 죽는다는 것조차 몰라야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아프고 괴로운 건 다 제 안에 묻을 겁니다.”

* * *

나는 눈이 붕어가 되도록 울었으나, 우는 것은 그 하루로 끝냈다. 다음 날, 나는 여율령을 다시 찾아갔다.

“떠날 테냐?”

여지없이 비석을 보고 있던 여율령이 물었다.

“아니요. 마지막으로 주군 얼굴은 보고 가렵니다.”

“못 떠나게 될 것이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도 가야지요. 지금이 제가 떠나야 할 순간이니까요.”

황태자의 수하들을 향해선 냉정하게 떠날 순간이라 평했던 여율령이 역정을 냈다.

“네가 무슨 죽을 자리 찾아가는 짐승이더냐?”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이십니까. 다 오해십니다. 이래 봬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방으로 가 방법을 찾을 겁니다.”

“방법이라면 예 있어도 내가 어련히 찾아줄 것을.”

“무륜 옆에서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어 그렇습니다.”

무륜. 혼자 있을 때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던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낯설어야 마땅할 주군의 본명이 날 때부터 내 것이었던 양 익숙했다.

“쯧쯧.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 하지 말거라. 다른 데선 그렇게 영민하면서 어째 표정에 대한 것만은 늘질 않을꼬.”

면박은 줬지만 어쨌든 그는 내 결정을 존중했다. 그는 바로 암묵단을 시켜 여장을 꾸렸다. 사당에 대한 정리도 포함이라 출발 예정일은 모레가 됐다.

그다음 날에도 여율령은 비석 앞에 있었다. 그에게 이 비석을 좋아하느냐 묻자, 그는 비석보다 여기 담긴 이야기가 좋다 했다.

이야기? 눈을 가늘게 떴다. 여태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비석에 깨알 같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비석 앞에 선 여율령이 섭선으로 나를 불렀다. 계단을 밟아 올라가자 이번엔 한발 앞서 비석을 돌아 뒤편으로 갔다. 항상 비석 앞에 서 있다더니. 실상은 비석이 아니라 저 북방의 땅을 보고 서 있었던 모양이다.

“비석에 적힌 건 상선과 세 신수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아’ 하고 관심을 껐다. 금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유명한 일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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