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1화
북궁에 유폐되어 생사여탈권을 빼앗겼던 5황자는 없다. 남은 건 적법한 절차에 따라 황위를 계승한 이 나라의 만인지상뿐. 면류관만 쓰지 않았지, 무륜은 이미 황제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황제나 된 후에 말씀하시라니! 아무리 상서령이라 해도 방금 발언은 선을 넘었다. 아주 넘었다. 황족 모독죄를 적용해도 하등 무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금군이 서둘러 떨어뜨린 창을 쥐었다. 밀영군도 몸을 추스르고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들은 무륜의 입에서 추상같은 황명이 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암묵단은 태연했다. 그들 대부분이 시험의 감시자로 이동 경로에 포진했고, 소수는 아예 멀찍이서 황자들을 지켜봤다. 다시 말해, 여차여차한 걸 전부 봤다는 뜻이다.
애초에 황궁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자들, 혹은 높으신 고관대작 나리 밑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기민한 눈치는 기본 소양이었다. 위중혁이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을 뿐.
즉, 그들은 5황자의 내심을 단번에 간파했다. 소리 없는 풍악이 그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흑월 정도는 아니지만 암묵단원 대부분이 이화를 좋아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이화는 철혈의 백사 같은 주인이 물어 온 비루먹은 병아리였다. 어찌나 맹한지 이걸 어떻게 키우나 싶었다.
그런데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 호랑이가 물어 온 건 여지없는 호랑이 새끼였다.
성장세가 심상치 않다 싶더니 3년 차에 이미 흑월과 견줄 실력을 쌓았다. 그에게 붙은 교육 선생들은 죄 입을 모아 도련님을 칭양하기 바빴다.
암묵단원들은 지옥의 악귀 같은 모습으로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이화만 생각하면 복면 밑으로 해죽 웃었다. 짐승들이 왜 공동육아를 하는지, 그들은 이화를 돌보며 알게 됐다. 심지어 병아리가 이미 장닭이 되었는데도 애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나를 건드리는 건 괜찮아. 상서령도 뭐, 죽지만 않으면 괜찮아. 우리보다 더 괴물 같은 면모가 있으신 분이니. 하지만 우리 도련님은 안 돼. 건드리면 죽는 거야. 그냥 죽는 것도 아니야. 아주 살과 뼈를 정성스럽게 분리해 죽일 테다.
물론 5황자에게 정신 팔린 이화는 이러한 속사정 같은 건 꿈에도 몰랐다. 반대로 암묵단원들은 이화의 안쓰러운 옛이야기는 물론이고, 그의 애틋한 마음까지 죄 알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병아리. 이러다 마음에 병나면 안 되는데!
그들은 새끼 싸고도는 어미처럼 이화 주변을 맴돌았다. 그가 5황자의 위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시커먼 암살자들이 돌아가며 정화수를 떠 놓고 빌었다.
천지신명이시여. 그들 중 으뜸인 상선이시여. 부디 우리 도련님 좀 굽어살펴 주소서. 상선 보시기에 영 탐탁잖은 악인이 있거든 몰래 밤손님으로 가서 쓱싹하겠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악인에 가까운 이들이 그리 빌었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음인가. 무사히 5황자에게 받아들여진 걸 확인했을 땐 저들끼리 모여 간소하게 축배도 들고, 여씨 가문의 사당에 술과 공물까지 바쳤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냥 곁사람이 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음까지 훔치신 게 아닌가! 얼씨구나, 지화자다.
암묵단원들은 살벌하게 굳은 금군과 밀영군을 픽 비웃어주곤 총총 자리를 떴다. 금군과 밀영군은 혼란에 빠졌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암묵단원의 뒤꽁무니를 좇았다.
뭐지. 함정인가. 저리 가는 척하고 동료를 모아 되돌아올 셈인가.
돌아오긴 개뿔. 가서 마저 축배나 들 참이었다. 골골대던 도련님도 무사히 깨어난 마당이다. 이제 그들이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가 무엄한 상서령을 처벌한다? 충분히 있을 법하다. 하지만 황제가 ‘이화의 양아버지’를 벌한다? 그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여율령을 구속하라는 황명과 그로 인해 암묵단이 검을 빼 대응하는 최악의 사태까지 상정하고 있었다.
암묵단(暗黙單). 일생을 여율령의 그림자에서 살아가는 살인귀의 집단. 금국의 무인 중 그 어둡고 묵묵한 이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밤손님으로 맞이한다면 직부사자마저 미리 장부에 이름을 쓰고, 이승차사가 머저리 같은 것들이라 혀를 차며 마중 나간다고 했다.
소수 정예이나 그 개개인의 무력은 금군이나 밀영군보다 뛰어난 이들. 연 대륙 모든 곳에 눈과 귀를 두고, 또 모든 곳에 검끝이 닿는 자들. 금국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암과 묵의 그림자. 그게 바로 암묵단이었다.
그런 암묵단원을 상대하는 데 아무 피해 없이 제압하기란 불가능할 터. 자리에 있던 모든 금군과 밀영군은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 한데 정작 주인을 지켜야 할 암묵단원들은 소 닭 보듯 설렁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멍청하게 굳은 그들을 향해 추상같은 옥음이 날아들었다.
‘게 있느냐.’
‘예, 폐하.’
위중혁이 금군대장을 사임한 후, 임시로 대장직을 맡은 위수혁이 읍했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위중혁의 동생이었다.
‘지금 당장 여장을 꾸려라.’
‘예?’
‘환궁하겠다.’
‘뭣?! 아, 아니 송구…… 존명.’
그렇게 금군과 밀영군은 소수의 인원만을 남겨두고 제 주인을 따라 환궁했다.
도성에 다다르자 계절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었다. 등불이 곳곳을 밝히고, 궁인들은 나부죽이 엎드려 절을 했다.
무륜은 태연했지만 뒤따른 금군과 밀영군들은 도깨비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계절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만인지상이 되신 황제께서 어찌 일개 상서령의 무례한 언사를 보아 넘긴단 말인가. 암묵단의 기행이 평범해 보일 지경이었다.
……설마 사당에서 나눈 농지거리가 진심은 아니시겠지. 위사장…… 지참금…… 어허이, 아니다. 절대 아닐 것이다.
금군과 밀영군이 혼란에 빠지든 말든 무륜은 속성으로 황제가 됐다. 여율령은 혀를 간사하게 놀릴지언정 빈말을 할 자는 결코 아니었다. 해서 마음이 급했다. 기다리던 이들은 마비된 국정 때문에 그보다 더 급했던 터라 짝짜꿍이 맞았다.
무륜은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면류관을 쓰고 제 이름을 공표했다.
“이제부터 짐이 금국의 황제인 건룡제이리라.”
즉위식은 그걸로 끝이었다. 모든 대소신료와 귀족들이 엎드려 예를 표했다. 개중엔 황태자파도 있었고 소수지만 2황자와 3황자를 지지하던 이들도 있었다.
순간,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지금 엎드린 이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섬기고 있음을 알았다. 아주 얄팍한 진심이었다.
그는 신물이 나 그대로 자리를 파하고 제 궁으로 향했다. 모든 기물의 끄트머리가 황금으로 칠해진 거대한 본궁이 이제 무륜의 궁이었다.
곧바로 잠자리에 들겠다 하자 심신을 편케 해주는 향이 피워지고, 시비들이 비단 금침을 정리했다. 방의 온도는 항시 적정하게 유지됐다. 부족한 것이 없도록 수발을 드는 시비와 내관만 열을 넘었다. 북궁과는 천양지차였다.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데 정작 누우면 잠이 오지 않았다. 반평생 그를 괴롭힌 불면증이 다시 따라붙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수면 시간이 하루 두 시간이던 강행군 때나, 축축하고 지저분한 동굴에서 선잠을 잘 때는 이러지 않았다. 몸이 너무 편해서 그런가. 하루 꼬박 일해보기도 했으나 오히려 피로만 더해졌다.
무륜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땐 있고 지금은 없는 것이 무언가. 답은 금방 나왔다.
‘이화.’
그가 중상을 입고 사당에 도착했을 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아직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차갑게 식은 팔을 붙들고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화…….’
‘이화.’
‘이화!’
몽휼이 안정이 필요하다 말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는 나흘째가 아닌 바로 그날 쓰러졌을 것이다.
무륜은 의원에게 자신의 눈보다 이화를 먼저 살피게 했다. 출혈량이 많아서 그렇지, 처치도 잘되었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다는 말을 듣기까지 1분 1초가 억만년 같았다.
역설적이게도 이화를 제하면 가장 심각하다 여겼던 무륜의 눈은 따로 처치할 필요도 없었다.
약을 처방받은 후, 그 약재를 구하러 가기도 전에 시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깨끗한 물로 씻고 이틀을 더 보내자 약간 흐리긴 해도 온전히 보는 것이 가능했다.
무륜은 그때부터 내내 이화의 곁을 지켰다.
그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창백한 낯으로 누워 있는 이화가 정말로 한 송이 목련처럼 덧없고 약해 보여서. 그래서 무륜은 돌아오는 날까지 머리맡을 지켰을 뿐, 이화에겐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금군대장 게 있나.”
“예. 신 위수혁 여기 있습니다.”
“사당에서 온 소식은?”
“어제 보고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위사장은 깨어났고 순조롭게 회복 중이다. 환궁은 상처가 낫는 대로 한다 하였다. 무륜이 팔을 들어 눈을 덮었다.
‘무사하다. 이화는 무사해.’
깊은 안도감 뒤엔 분노가 무럭무럭 세를 키웠다.
‘……대체 어쩌자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정수리가 뜨끈뜨끈했다. 거짓말이라곤 전혀 못 할 것 같았는데. 어찌 그리 뻔뻔하게 자신을 속여 넘겼을까. 제때 발견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떠올릴 적마다 피가 식었다.
‘몽휼과 위중혁도 그래, 감히 제 주인을 속여? 돌아오거든 바로 지하 뇌옥행이다!’
황제의 분노에 부복한 위수혁이 찔끔했다. 그는 눈치 없기로 유명한 위씨 가문의 차남이지만 가문 내에선 꽤 비상한 축에 속했다.
황제는 제 위사장을 끔찍이 아꼈다. 일개 위사장을 향한 애정이라 하기엔 어딘가 미묘할 정도로. 위수혁은 그 미묘함의 정체를 파고들려 하는 제 머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사당에서 상서령과 주고받은 농은, 진정 농이었나.’
위수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상 가선 안 된다고 무인으로서의 감이 외쳤다. 때마침, 거하게 한숨을 쉰 황제가 손짓하여 그를 물렸다. 위수혁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읍하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