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0화
“차를 아무리 검사해 봤자 나오는 게 있을 리가. 주전자째로 마셔도 아무 이상 없다. 그것만 먹으면 그저 향이 좀 특이한 차일 뿐이니까.”
“미치셨습니까. 어떻게, 어찌 그리 위험한 짓을!”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 시험을 치렀을 때의 가장 큰 수혜자가 누구일지만 생각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인 것을.”
“처음부터 5황자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셨습니까.”
“처음부터는 아니다.”
“그럼 언제부터…….”
“글쎄. 정확히 언제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만. 구체적인 계획을 떠올린 게 언제냐고 묻는다면 답해줄 수 있겠구나.”
섭선이 탁 접혔다. 추위로 인해 발갛게 변한 귓불과 뺨을 한 여율령이 몸을 틀어 나와 마주했다.
“네가 5황자의 위사장이 되겠답시고 황제의 면전에 읍했을 때다.”
순수하게 드러난 마음에 숨이 막혔다.
“너는 나를 어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네가 내 집에 왔을 때부터 너는 내 아들이었다.”
수십, 수백 겹의 허물에 덮여 있던 뱀이 겨우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뱀은 나였다. 편견과 경계심으로 가리어진 눈이 그제야 뜨였다.
여율령이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쌌다.
“예서 울면 뺨이 다 얼어붙을 게다. 울지 말렴.”
그러고 도리질 치는 나를 보며 ‘덩치만 컸지 아직 애구나’ 했다. 나는 그대로 여율령에게 이끌려 저택으로 돌아왔다.
찬 바람에 얼어붙은 여율령과 뺨에 얼음을 붙인 날 본 암묵단원들이 기함했다. 그들이 당장 모포란 모포는 다 가져와 둘러주고, 물을 끓여 목간을 마련한다, 화톳불을 지핀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난리 통 속에도 여율령은 느른하게 웃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에도 오히려 그 속내가 훤히 짐작되어 비로소 ‘나는 저 사람의 아들이었구나’ 하였다.
* * *
멍한 눈에 초점이 없었다.
침상에 누운 이화는 엊그제 여율령과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여율령이 어떠했더라.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했었지? 돌이켜 봐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깨어난 지 닷새째. 시험이 끝나고 벌써 보름이 지났다.
금군과 밀영군은 조금씩 나누어 행장을 꾸리더니 어제저녁 무렵엔 전부 이 사당을 떠났다. 남은 건 여율령과 휘하 암묵단 몇 명, 이화의 상처를 돌봐주는 의원 하나, 그리고 몽휼과 위중혁뿐이었다.
이화는 끙 하곤 몸을 모로 돌렸다. 여율령이 어찌나 좋은 약을 쓰는지 상처는 하루가 다르게 아물어갔다. 몰래 내력을 끌어 올려도 괜찮을 정도였다.
하지만 저는 이제 괜찮으니 이만 환궁하시라 해도, 위중혁은 들어먹질 않았다. 몽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황자 전하께 명을 받았고, 그에 변동이 없으니 여기 있는 것이 맞다 했다.
황명을 들먹이는데 더 뭐라 할까. 결국 이화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 후론 침상과 한 몸이 됐다. 여율령에게 거둬진 후 이렇게 게으르게 생활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머리에 털 나고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엔 새벽부터 잔가지를 주워 땔감을 만들거나 풀뿌리를 캐 왔다. 몸이 아프면 나가서 동냥질이라도 해야 했다. 아니면 그대로 굶는 수밖에 없었다.
침상 위에서 이화는 몸을 옹송그렸다. 좁고 음습하고 냄새나는 초가집엔 항상 죽음이 우두커니 서서 저를 굽어봤다.
빛도 들지 않는 삶을 과연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무륜은 그 질문에 답을 주는 대신, 이화의 삶을 빛 가운데로 이끌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던 이화에게 생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그렇게 따뜻한 곳에서 자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살갗을 스치는 보드라운 옷. 혀에서 녹아내리는 단맛. 색색으로 반짝거리던 장난감까지. 그는 이화가 보던 세상의 색을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정작 무륜은 그때의 일에 대해 말하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행위였던 까닭이다. 이화는 그것이 내심 속상했다. 저에겐 보물 같은 나날이, 그에겐 그저 잊고 싶은 흠결인 것 같아서.
‘내가 자개함에서 나가던 순간을 기꺼워하면서도, 자개함 자체는 아직도 악몽으로 남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이화는 이불을 어깨 위로 바짝 끌어 올렸다.
옆에 무륜이 없으면 이화는 자개함으로 되돌아갔다. 몸은 예 있어도 마음이 그만 끌려가고 마는 것이다. 어둡고, 좁고, 덜컹거리는 자개함의 안은 매 순간이 고통이라 여리고 약해진 정신이 갈기갈기 찢기었다.
이대로 잠들면 필시 악몽과 마주할 터. 한숨을 쉰 이화는 결국 침상을 박찼다. 흑의 장포를 걸치고 보랑을 내달려 밖으로 나왔다. 흑피로 만든 신이 하얀 눈을 밟았다.
하아. 새하얀 입김이 뺨을 스쳤다.
위를 올려다봤다. 밤하늘은 오색찬란한 별로 가득했다. 거대한 이무기 같은 은하수가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경이로운 빛무리를 보고 있자니 무륜이 생각났다. 생각나니 보고 싶어졌다.
“……보고 싶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생각만 하던 것을 뱉으니 그에 가슴에 사무쳤다. 고작 보름을 못 보았다고 마음이 시렸다. 이런 것을 어떻게 5년이나 버텼을까.
‘이해하고 납득해서 그랬겠지.’
이화는 제가 묻고 제가 답을 내렸다.
그때 자신은 비쩍 곯은 천것이었고, 그는 천자의 아드님이었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저는 그의 위사장이었고,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곳이 자신의 자리였다.
그런데 어찌해 자신만이 이곳에 남아 있나. 계절마저 다를 만큼 이리 멀고 높은 곳에.
“…….”
이화는 한도 끝도 없이 뻗어 나가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이제 보니 유배형은 외진 곳으로 가서 반성하라고 보내는 형이 아니었다. 연모하는 임 그리다 가슴앓이해 죽으라고 보내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면, 지금 나의 처지가 유배형과 다를 게 무엇이냐.’
무륜이 알았다면 기함했을 생각을 하며 이화는 안으로 되돌아왔다.
쓸데없는 생각일랑 말자. 까닭 없이 우울해질 뿐이다. 앞으로 두어 밤만 더 자면 몸도 다 나을 것인즉, 그럼 더 지체할 것 없이 산을 내려가 황궁으로 갈 것이다.
그렇게 기운을 내려 애써봐도 소용없었다. 몸도 마음도 말린 시래기처럼 시들했다.
이화가 제 밥그릇 빼앗긴 강아지처럼 시무룩하여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을 때, 황궁에 있는 무륜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되돌아온 황궁은 이미 푸르른 여름이었다. 복사꽃이 지고 장미가 만개했다. 뜰에는 온갖 풀벌레가 뛰어다녔다. 바로 보름 전에 찬비를 맞고 눈밭을 뒹굴었던 것이 다 거짓말 같았다.
무륜은 환궁하고 하루 만에 즉위식을 치렀다.
제국 최대의 행사를 날치기로 해치웠음에도 고관대작 중 누구 하나 반대를 못 했다. 여기엔 차마 웃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어차피 시험이 끝나면 누가 됐든 승자가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럼 일시적이나마 정세도 안정될 터. 그래서 기다리는 자들은 마음에도 업무에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어깨가 장히 벌어지고, 득의만만하여 환궁할 줄 알았던 무륜이 그대로 사당에 눌러앉은 것이다. 심지어 돌아올 생각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없어 보여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전서구가 천태백산을 향했으나, 대부분이 만년설의 추위를 이기지 못해 중턱쯤에 다 떨어져 죽었다. 회수 담당으로 낙점된 건 암묵단원들이었다. 그들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나뭇가지에 걸린 전서구의 사체에서 전서만 빼 5황자에게 전했다.
5황자는 그를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암묵단원들이 뭐라 하지 못한 것은 그가 이제 금국의 황제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륜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목석처럼 의식불명인 이화의 머리맡만 지키고 서 있었다. 이미 잔뜩 지쳐서 한계가 가까운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몽휼과 위중혁이 제발 좀 쉬시라, 저들이 옆을 지키겠다 하여도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결국 나흘째에 쓰러져 사당에 있는 모든 이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고도 닷새째 눈을 떠선 곧바로 이화에게 가시는지라, 금군과 밀영군이 눈앞에 엎드려 제발 옥체 보중하시라 간언해도 소용없었다.
그때, 여율령이 샐샐거리는 웃음을 달고 등장했으니. 수세기 전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신비로운 저택에서 섭선을 살랑거리는 백의 서생의 모습은 그 자체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람보단 신수나 신선을 보는 듯했다.
위중혁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여율령은 사람이 아니라 천년은 묵은 이무기였으니까.
‘전하, 제 아들 이화는 말입니다. 귀하디귀하게 키운 금지옥엽입니다. 여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이며 이 상서령의 외동아들이기도 하지요.’
이 자리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뉘 있을까. 무륜은 당연한 소릴 거창하게 꺼내는 여율령을 가늘어진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나라의 황제쯤 되지 않으면 장가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때마침 옆을 지나던 암묵단원 하나가 미끄러지고, 번을 서던 금군이 들고 있던 창을 떨어뜨리고, 지붕에 올라 있던 밀영군이 11월 까치밥처럼 떨어져 내렸다.
태연한 건 단둘뿐. 말을 꺼낸 여율령과 그를 들은 무륜이었다. 무륜이 팔짱을 끼며 태연히 대꾸했다.
‘그럼 내가 황제의 자리에 앉으면, 네 아들을 내 비빈으로 맞이해도 반대하지 않겠군.’
‘이 여율령의 아들을 데려가는 것이니 보통 지참금으론 안 될 것입니다.’
‘지참금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반대하겠다는 뜻인가. 뭐, 상관없다.’
‘그 전에 황제나 되고 말씀하시지요. 참고로 기한은 닷새 드리겠습니다. 닷새 안에 면류관을 쓰지 못하면 이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지요.’
닷새면 지금 당장 출발해도 빠듯한 기한이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여율령이 미쳤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