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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9화 (29/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9화

“몇 대째 황제였더라. 너무 오래전 황제라 잘 기억 안 나는데, 아무튼 어느 황제가 여기다 사당을 짓고 하늘비석이라며 청옥석을 깎아다 박아 놨지. 물론 그렇다고 하늘비석 이야기가 가짜인 건 아니야. 진짜는 주문강 바닥에 수장되어 있다.”

“주문강이요?”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은 위금(衛錦)강이던가.”

그렇게 말하는 여율령은 여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내용만 보자면 틀림없는 망설인데 실없이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위금강이라면 동남쪽, 위금 지방의 강 말씀이십니까. 건너갈 때 둘이면 돌아올 땐 하나지만, 건너갈 때 하나면 돌아올 때 둘이 된다는 속설이 있는.”

“그래. 그 강이 맞다.”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진짜 하늘비석이 게 있는 건 어찌 아십니까.”

“자주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세상만사를 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고.”

이젠 저 소리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그가 손을 들어준 5황자는 황제가 되어 환궁했다. 지금쯤이면 면류관을 썼으리라.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율령이 몸을 돌렸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손가락을 까닥했다. 부르는 대로 계단을 밟아 올라가자 그가 ‘무엇이냐’ 했다.

“3황자가 만들었다는 남방의 독 말입니다. 가장 오래 버틴 자가 얼마나 버텼다 하셨습니까.”

“석 달이다.”

여율령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덧붙였다.

“일류 무사였지. 네가 그보다 오래 버틴다 한들 올해 첫눈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예서 많이 봐 두거라. 여상한 어조였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화살을 맞았다 들었을 때 짐작은 했다. 확신한 건 방금 네 질문에서지. 상처에 비녀라도 꽂아봤느냐?”

진정 귀신이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표정 할 것 없다. 네가 죽지 내가 죽더냐? 너도 굳이 감출 생각은 없으니 그런 질문을 내게 한 것 아니더냐.”

맞다. 어차피 여율령을 속이는 건 처음부터 포기했다. 그래도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차라리 혀를 차고 나무랐으면 속이 편할 것을. 태연해 보이지만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화가 나 있었다.

“해독제는, 정말로 없습니까.”

“없다.”

여율령이 저리 말한다는 건 정말로 없다는 거다. 앞으로 구할 방도 또한 요원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화가 날 만도 하다. 애써 먹이고, 입히고, 키워놨더니 써먹기도 전에 절명할 팔자라. 그를 볼 면목이 없어 고개가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여율령이 비석을 돌아 그 반대편에 섰다. 앞은 절벽이었다. 비석에 낮게 둘린 쇠 울타리는 장식에 가까웠다. 심이 섬뜩하여 그 옆에 붙어 섰다.

천태백산 꼭대기에 오르면 그 너머는 깎아지른 산세가 절벽과 같았다. 또 그러한 절벽이 양옆으로 쭉 이어졌다. 위에서 보면 하얀 파도와 모래밭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처럼 보일 정경이었다. 높이를 생각하면 거대한 성곽 같기도 했다.

어쨌든 덕분에 여기선 북방의 동토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말로 능히 성 하나둘쯤 구할 수 있게 되라 했더니 결국 그새를 못 참고 네 몸으로 화살을 받았더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건 누구보다 상서령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흑월이라도 방패로 세웠어야지.”

“세상에 해도 될 말이 있고 절대 해선 안 될 말이 있습니다. 방금 상서령께서 하신 건 논할 필요도 없는 후자입니다.”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그런다.”

“그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올해를 못 넘기고 죽게 생겼는데도 말이냐.”

산 아래에는 이미 수국과 수련이 피었다. 좀 지나면 능소화도 필 것이다. 반면, 이곳엔 살을 에는 찬 바람이 몰아쳤다. 내 마음도 이곳과 같았다. 아마 티는 내지 않아도 여율령 또한 그럴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내 너를 아끼고 있었다.”

“압니다.”

“아니. 너는 모른다.”

뒷짐을 쥔 손이 으스러져라 섭선을 쥐었다.

“너는 몰라.”

할 말이 있었는데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대신 다른 말들이 목구멍을 치밀어 올랐다. 제게 받을 것이 있다 하셨잖습니까. 목적이 있어 키우신 거잖습니까. 한데 어이 그런 표정이십니까.

하얀 침묵이 그와 나 사이에 내려앉았다.

할 말은 여전히 가슴에 머물러 있다. 지금 할 말이 아님과 동시에,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이 말을 해야 마땅한 순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만 더 묻게 해주십시오.”

“무어냐.”

“줄곧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 이 주변엔 너와 나뿐이다. 금군도 밀영군도 암묵단도 없어.”

안다. 기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지금부터 할 말은 그만큼 무서운 말인 까닭이다.

“황제와 황태자의 죽음이 정말로 우연입니까?”

여율령은 ‘그걸 어찌 나한테 묻느냐’고 하지 않았다. 대신 내내 북방의 땅을 보던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황태자의 죽음은 납득이 갑니다. 2황자와 3황자는 황제가 죽기 전에 어떻게든 황태자를 죽여야 했을 테니까요.”

“…….”

“골골거리던 황제가 급사했을 때 황태자가 살아 있다면, 그는 2황자와 3황자가 뭘 해볼 새도 없이 황좌에 앉았겠죠. 명분도 세력도 가장 탄탄한 황태자를 정공법으로 이기는 건, 그 시점에서 이미 불가능합니다.”

여율령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신 계속해 보라는 듯 고요한 시선을 던졌다.

“그들에겐 ‘시험’ 또한 차선책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피하는 쪽에 가까웠을 겁니다. 불확정 요소가 크고, 자신이 가진 것을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으며, 어쨌든 서로 비슷한 조건이 되어 겨루어야 하니까요.”

여율령이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 둘은 일단 후계위만 빈다면 어떻게든 물밑 암투로 황제가 될 자신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황태자를 암살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둘이 협력을 했는지도 모르죠.”

“목적을 위한 오월동주를 했다?”

“예. 그렇다면 그 경계심 많고 대단한 황태자가 암살당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사냥 중 피를 토하고 결국 칼을 맞아 죽은 황태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처럼 말했지만 내심으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두 사람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우연히’도 황태자가 시해된 지 채 일다경이 되지 않아 황제가 죽은 겁니다.”

민가에서 일어났어도 거 참 이상타 할 일이 황궁에서 벌어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것을 우연이라 넘겼다. 평소 원체 골골거린 것도 있었지만 황제에게서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은 까닭이다.

게다가 그 이후 황궁과 민가에 어른거리던 의심은 묘할 만큼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러한 정보 조작이 가능하면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황제를 시해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내가 알기로 금국을 통틀어 단 한 명뿐이었다.

“황제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상서령.”

내내 무표정하던 여율령이 픽 하고 웃었다.

“아버지라 부르면 대답해 주마.”

“아버지.”

여율령의 눈이 크게 뜨였다. 드물게도 그의 내심이 훤히 읽혔다. 아마 내가 절대 그리 부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제안한 말일 터였다.

실제로 나는 그간 여율령이 어떤 감언이설을 해도 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아마 여율령은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틀린 결론을.

단순한 일도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그의 강점임과 동시에 유일한 약점이기도 했다. 이 경우엔 후자였고.

그는 내가 생부에게 뭔가 의미를 두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다. 자기 자식을 상단에 팔아넘긴 사내에게 무슨 미련이 있을까. 내가 그 호칭을 거부한 이유는 여율령의 얼굴 때문이었다.

실제 나이야 어떻든 그는 겉보기엔 서른 안팎이다. 다시 말해, 엄청난 동안이었다. 형에게 아버지라 부르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기분상의 문제로 영 입에 담기 껄끄러웠다. 단지 그뿐이다. 그래서 만약 그것이 대가라면 지불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무덤덤한 내 안색에서 모든 것을 읽어낸 여율령이 허탈하게 웃었다.

“속았구나. 나도 다 된 모양이야.”

“대답해 주십시오.”

섭선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곧 죽는다는데 그런 것이 궁금하더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눈이 마주쳤다. 여율령이라면 내가 확인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대답을 할까. 아니면 어영부영 대답을 피할까.

평상시의 여율령이라면 필히 대답을 피했을 거다. 하지만 시한부가 된 나를 앞에 둔 여율령이라면…….

“네가.”

내가 원하는 답을 줄 것이다.

“네가 당한 독은 3황자가 거느린 무진의 독술사들이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독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은에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지.”

“…….”

“검출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만큼 특수한 조합으로 주조한 금속이 아니면 검출해 낼 수 없다. 하면, 그런 대단한 것을 검출해 낼 수 있는 더 대단한 비녀는 누가 만들었을까?”

여율령이 한숨처럼 말했다.

“나다. 어디 가서 내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남방의 독은 제법 잘 알고 있다. 특히 무진의 독에 흥미가 있었지. 개중엔 독으로 분류되지 않는 독도 있었거든.”

“독으로 분류되지 않는 독…… 말입니까.”

“음식 중엔 따로 먹으면 별 상관없으나, 같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들이 있지. 작게는 배앓이에서 심하겐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상극의 조합. 아마 네가 당한 독도 같은 데서 착안했을 거다. 내가 만든 독도 마찬가지거든. 특징은 독이 아닌 만큼, 해독제도 없다는 거다.”

해독제가 없는 독. 실로 무서운 말이었다.

“내 독은 어떤 차를 마시기 전까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체내에 쌓일 뿐. 인체에 완벽하게 무해하지. 하지만 특수하게 조합한 차를 마시는 순간, 그때까지 쌓여 있던 것들이 일제히 독으로 변해 장기를 상하게 만든다.”

선문답 같던 말들의 끝이 한 지점을 가리켰다. 빙빙 돌아가던 말도 이내 하나로 모여 한 가지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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