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8화 (28/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8화

열흘 만에 본 위중혁은 무언가 바뀐 것 같았다. 하나 정확히 무엇이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단한 팔과 품에 안겨 보랑을 되돌아갔다. 여태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는지 몽휼이 우리를 발견했다. 이윽고 그의 턱이 툭 떨어졌다.

반응이 좀 과한 것 같은데. 같은 것을 생각한 듯 위중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몽휼이 그런 위중혁을 확 노려봤다.

‘너 미쳤냐.’

‘이 소금쟁이는 왜 또 시비야.’

‘네가 미친 짓을 하니까 그렇지, 이 미친놈아!’

무언으로 오가는 말이 눈에 훤히 보였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찰나, 위중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무륜이 없다. 그 말인즉, 두 사람이 칼부림을 해도 말릴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다급하게 몽휼을 불렀다.

“몽휼.”

“예, 위사장.”

“쇠한 몸으로 찬 바람을 쐬어서 그런가, 영 기운이 없는데 이만 들어가도 괜찮을까.”

“물론입니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다행히 나를 향해선 바로 태도가 돌변했다. 문을 연 그가 읍하여 섰다. 위중혁은 그런 몽휼의 정수리를 노려보다 옷자락 쌩하니 휘날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탁.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영춘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위중혁이 나를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병자라고 꽤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심지어 베개도 받쳐주고, 신도 벗겨주고, 이불까지 끌어 올려 목까지 덮어줬다.

금군대장의 시중이라니. 병자도 꽤 할 만하다 생각했을 때, 할 일을 다 끝냈는지 위중혁이 의자를 끌어다 침상 옆에 앉았다.

가는 거 아니었나. 왜 자리를 잡으시나. 말똥한 눈으로 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제 무릎을 툭툭 두드리다가, 멀쩡한 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어떻게 봐도 할 말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위중혁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몽휼에게 하대하는 건가?”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라고 하면 시비 거는 것처럼 보이겠지.

“전하께서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넌 종 5품에 황자인 자신을 호위하는 위사장이고, 몽휼은 품계고 신분이고 없는 그림자라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렸다.

“갑자기 웬 존대입니까.”

“방금 듣고 깨달았습니다. 위계상으로는 이게 맞습니다. 금군대장은 사임했으니 전 이제 일개 무인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간 말로는 사임했다 하면서 계속 금군대장인 듯 행세했죠.”

“그…….”

“당하라는 말은 부정했으면서, 위사장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였습니다. 그걸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

우직함에도 정도가 있다. 이쯤 되면 우직이 아니라 벽창호였다.

“그냥 이전처럼 하대해 주십시오. 전 그게 편합니다.”

“아니요. 위계란 곧 원칙입니다. 편하고자 임의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다시 금군대장직을 하사받을 때까진 계속 존대하겠습니다. 위사장께서도 하대하십시오.”

“아니-”

“또, 맡은 바 직분을 생각해 경솔한 발언은 삼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위사장이라 함은 주군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는 자. 언행은 물론이고 옷매무새를 신경 쓰는 것 또한 의무에 들어갑니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훈계까지 당했다.

차라리 영춘이 나았다. 그 위중혁의 존대라니. 거기다 나보고는 하대를 하라니.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다. 그랬다간 이 자리에서 하룻밤은 조언을 빙자한 교육을 할 분위기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럴 때 할 말은 하나다.

“바람을 쐐서 그런가, 갑자기 영 기운이 없군. 이만 쉬고 싶으니 나가 주십…… 줍…… 주시게.”

중간에 혀가 두 번이나 꼬였다.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됐다. 위중혁이 실책이라는 듯 말했다.

“제가 배려 없이 너무 오래 있었군요. 쉬십시오.”

그러곤 곧바로 척 일어나 절도 있게 문을 향했다. 나는 위중혁의 등을 보며 겨우 안도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상기했다. 방문 앞에 아직 몽휼이 있다는 것을.

“다, 당하!”

위중혁은 돌아보지 않았다. 등짝에 ‘나는 당하가 아니다’라는 글자가 어른거렸다.

“위중혁!”

겨우 걸음을 멈춘 그가 문가에서 나를 돌아봤다.

“몽휼과 싸우지 마십시오. 주먹질하면 안 됩니다. 칼부림은 더더욱 안 됩니다.”

“……위사장께선 대체 저를 어찌 생각하시는…… 아니, 아닙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이마에 솟은 혈관을 꾹 누르며 위중혁이 방을 나섰다.

긴장하느라 몰랐는데 정말로 몸이 으슬으슬하긴 했다. 기운이 탁 풀리자 시야가 흐릿해졌다.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깨어난 건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해는 중천이었고 옆엔 아무도 없었다. 입었던 흑의 장포가 어느새 다시 의자에 걸쳐져 있는 것을 빼면 딱히 변한 것도 없었다.

흑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몽휼이 아닌 암묵단원 중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묵례하곤 다시 앞을 봤다. 며칠 영춘과 함께 있어서일까. 이게 당연한 반응인데 영 낯설었다.

“상서령께선 어디 계시나.”

“하늘비석 앞에 계십니다.”

어제도 그 앞에 있었는데 오늘도? 하룻밤을 꼬박 거기 있었던 건 아닐 테고. 대체 뭘 하길래 거기 붙박인 거지. 의아해하며 보랑을 가로질렀다.

보랑을 지키던 금군들이 내게 예를 표했다. 얼결에 마주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전엔 어쩌다 그 앞을 지나면 소 닭 보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사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무시했던 터다.

물론 나한테만 그런 건 아니다. 그들은 보통 석상에 비유될 만큼 움직임도 극히 적고, 어지간한 일엔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제 같은 주인을 모신다 그건가.’

흐뭇하게 웃다가 멈칫했다.

속에서 후끈한 기운이 목으로 치달았다. 낯이 무섭게 굳었다. 입에 피비린내가 고이기 무섭게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 순간엔 그저 각혈을 들켜선 안 된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우…… 욱!”

방문을 닫자마자 손과 옷에 붉은 피를 한 바가지 쏟아냈다.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망연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방을 살폈다. 구석에 처박히다시피 한 내 짐이 보였다. 출발할 때 지니고 왔던 바로 그 짐이었다.

끈을 풀고 안에 싸 둔 것을 쏟아냈다. 물병과 육포 몇 조각. 응급 처리를 위한 도구와 약초. 그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비녀가 보였다.

예감보단 확신에 가까운 마음으로 비녀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피 묻은 손으로 잡았음에도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잡아 뜯듯 붕대를 풀었다. 동경을 찾아 탁자에 올려두고 의자에 거꾸로 앉았다. 고개를 꺾어질 듯 뒤로 돌린 후 아직 덜 아문 상처를 비녀로 쿡 찔렀다. 찌르르하니 선뜩한 아픔이 밀려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참고 바로 비녀를 확인했다.

비녀의 끝에서부터 물이 들 듯 새까만 색이 올라왔다. 변색된 부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먹이 묻은 것처럼 까맣게 물든 그곳에 죽음이라는 선명한 두 글자가 맺혀 있었다.

그때, 여율령이 무어라 했었지?

‘아주 지독한 극독이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이상 없이 일상생활이 가능한데, 가끔 피를 한 사발씩 쏟는다.’

‘문제는 해독약이 없다는 거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결국, 숨기기만 잘 숨긴다면 마지막까지 무리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거니까. 또 젊고 건강할수록 오래 버틴다고 했다. 나는 분명 오래 버틸 것이다.

“어…… 하…….”

비녀 위로 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하얀 창호지를 넘어온 햇살 때문인지 눈물은 유독 깨끗하고 맑아 보였다. 그게 눈물인지 순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떨리는 양손으로 뺨을 더듬었다. 왈칵 쏟아진 건 눈물만이 아니었다. 억누른 감정이 넘쳤다. 설움이 억누른 잇새로 새어 나왔다.

이상했다. 화살에 맞아 쓰러졌을 땐 하나도 무섭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두려워 당장에라도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손에서 시작된 떨림이 전신으로 번졌다.

입술을 달싹여 무륜을 불렀다. 하나 나오는 건 어린애 같은 울음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암묵단원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내게 와서 무슨 일이냐 묻는 그에게 고개만 내저었다.

“흐윽. 흐윽.”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또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흐으윽, 흐윽.”

끝부분이 변색된 비녀를 움켜쥔 채,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 * *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정말로 그런 자가 있다면 흑월처럼 마음이 먼 곳으로 떠났거나, 가슴께 어딘가가 망가진 사람뿐일 것이다.

나는 날 때부터 죽음이 무서운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 두려움은 자개함 사건을 겪으며 더욱 커지고 견고해졌다. 아픈 건 모르겠다. 여태 진짜 아픈 일을 겪어보지 않아 그런지 모른다. 어쨌든 아픈 것보단 역시 죽는 게 더 두려웠다.

그러다 오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또 여기 계셨습니까.”

“내가 계속 여기 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대체 예서 뭘 하시는 겁니까.”

여율령이 손을 앞으로 뻗어 반들반들한 비석의 표면을 짚었다.

“이게 하늘비석이다.”

크기는 주(州)의 경계에 세우는 영토비와 흡사했다. 다만 재질은 보통의 돌이 아닌 푸른 청옥석이다. 그게 다였다. 확실히 이만한 크기의 청옥석이라니 놀랍긴 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은 상서로움이나 영험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별거 없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예, 그렇습니다.”

“가짜라서 그런다.”

“……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