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6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 전하를 지켰으니 외려 치하받아 마땅한 일인 것을. 장하다.”
너무나 위중혁다운 말이라 웃음이 났다. 또, 고작 일주일 안 것으로 ‘위중혁답다’는 것을 감히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것 같아 영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병사들의 유대감이 강해지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같은 목적으로 같은 고생을 하면 거리감도 줄어드는 거군요.”
“시답잖은 소릴.”
“제 상처는 어떻습니까.”
“좋진 않다. 치명상이랄 것은 없지만 출혈이 너무 많아. 당장 처치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
“그렇습니까.”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마음이 평온했다.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전할 말이 있다면 내게 해라.”
무륜에게 전할 말이라니. 그런 걸 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기엔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았다. 바다를 두 손에 다 담으라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당과.”
그래서 나는 대신 작은 바람을 전하기로 했다.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라면, 제 무덤에 손수 당과를 놓아 달라 전해주십시오.”
잔뜩 무게를 잡고 있던 위중혁의 낯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그만큼 내 말이 이 상황에 맞지 않았던 거겠지. 이해는 했다. 자신을 기리는 비를 세워 달라, 야사는 물론이고 후대에 길이 남도록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겨 달라. 주인의 목숨을 대신해 죽은 충성스러운 심복이 할 만한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나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정말 그거면 되나?”
“예. 그거면 됩니다.”
“그래. 알겠다.”
위중혁이 나를 안아 들어 바위 틈새로 옮겼다. 모로 눕히고 망토를 벗어 내 위에 덮어줬다. 그러고도 내 어깨를 짚은 손은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어서 가십시오. 당신이 있을 곳은 전하의 옆입니다.”
“안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그의 손가락이 그나마 멀쩡한 어깨를 꾹 쥐었다. 어린애의 팔을 쥐듯, 차마 힘을 주지 못하고 쥐는 손길에서 그의 심경을 읽었다.
“네가 있을 곳도 전하의 옆이다. 그를 잊지 말아라.”
“냉정하게 마지막 말을 가져가신 분이 하실 말은 아니군요.”
“그게 무장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주군을 지키고 수하를 이끄는 무사들의 머리 된 자가 냉정하지 않으면 어찌할까.”
“그럼 끝까지 냉정하셔야죠. 어이 이러십니까.”
“……몽휼 그자는 생각이 단순하고, 경박한 면모가 있고, 행동거지도 귀한 분의 수족답지 않게 가볍지.”
갑자기 몽휼의 험담이 시작됐다. 이 상황에 뭔 개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위중혁은 여전히 진지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선 주군을 가장 오래 모신 자이기도 하다. 그런 자가 줄곧 자네를 신경 써왔지. 방금 같은 상황에서조차 걸음을 망설일 만큼. 그 망설임은 결국 주군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
“나는 태어나길 둔하게 태어나 아직도 큰 그림이 보이질 않아. 해도 여정을 함께하며 하나는 깨달은 바가 있지. 방금 상황에서 자네의 부상이 드러나고, 그대로 놓고 간다 하였으면 전하께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셨을 거라는 것.”
눈자위가 화끈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이미 너덜거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울지 않아야 한다.
하나 위중혁의 말보다는, 정말로 그랬을지 모를 무륜이 떠올라 단단히 굳힌 마음이 다시 물러졌다.
‘넘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게.’
다 틀렸다.
‘……안 돼.’
지금은 불가능했다. 당장 5년 전 자개함인지 궤짝인지에서 만났던 죽음이 머리맡을 알짱거리고 있는데 어떻게 덮어놓고 평온한 수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간 ‘상서령의 아들’, ‘여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이름으로 억눌러 둔 비루한 평민 소년의 진심이 몸을 뒤틀며 울음을 터뜨렸다.
“두고 가는 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부디 살아남아 주게.”
이미 잔뜩 흔들려 버린 마음 때문일까. 앞에 있는 건 위중혁인데, 내 귀엔 꼭 무륜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하늘비석을 향하고 있을 그가.
“물론입니다. 삶을 그리 쉽게 포기하진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서 암묵단을 기다릴 겁니다. 상서령이 이 사태를 그냥 두고 보실 리 만무하잖습니까.”
그러니 내 걱정은 그만두고 가십시오. 가서 제 몫까지 그분을 지켜주십시오.
위중혁은 내 시선에 남은 뜻을 읽었다. 그의 손길이 어깨를 떠났다. 기척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미련 두지 않는 걸음마저 우직한 호랑이 같은 것이, 실로 위중혁다웠다.
“헉, 하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력을 끌어 올릴 수 없는지라 체온은 삽시간에 떨어졌다. 그래도 추운 줄 몰랐다. 숨이 너무 옅어 이젠 입김도 나오지 않았다.
아냐. 이래선 안 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아…….’
감았던 눈을 억지로 떴다. 탁 트인 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방금까지 저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만 같다. 어디 얽매이는 것도 없이 자유롭게 날다가, 잠깐 날개를 접고 바위산에 내려앉은 매가 된 기분이었다.
땅에 닿은 귀로 무수한 발소리가 들렸다. 화살을 쏘아댄 무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반대편에서도 기척이 느껴졌다. 풀잎을 밟는 것처럼 가볍고 조용한 발소리에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 꽤 대조적이었고, 익숙하기도 했다.
“이, 이것들은 뭐야!”
“집행관의 개들이다!”
“그래 봤자 일개 무사 집단인…… 커헉!”
암묵단이 일개 무사 집단이라. 어리석긴. 그리 어리석으니 다 썩은 끈 따위를 잡은 것이겠지만. 입가로 픽 웃음이 나왔다.
매는 늘어뜨렸던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기절할 땐 다들 아래로 까무룩 떨어진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새파란 하늘이 내 몸을 감쌌다. 시원한 바람이 깃털 구석구석을 스쳤다. 뭔가 난다기보다 둥실거리며 옮겨지는 기분에 가까웠지만, 아무튼 그랬다.
“뭐가 좋다고 웃느냐. 미련한 것.”
바람결에 여율령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4장 당과 완결>
긴 꿈을 꾸었다. 너무 길어서 중간에 내용이 몇 번이나 바뀌고, 이게 과연 끝나긴 하는가 싶을 만큼 길고 긴 꿈이었다.
처음엔 내가 태어난 마을에 서 있었다. 손발은 작아지고 몸뚱이는 비루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토굴 같은 집에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런데 둘째 형을 부르니 사라지고, 넷째를 부르니 또 사라졌다. 첫째 형과 막내도 부르면 사라질까. 결국 입을 다물었다.
곧 행장을 꾸려 나온 첫째 형이 막내를 훌쩍 업어 끈으로 질끈 묶었다. 두 사람은 멀리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 나는 혼자 남았다.
그다음엔 거대하고 흰 짐승이 되어 산을 지키는 꿈. 키가 칠 척은 되는 그림자 괴물과 싸우는 꿈. 몽휼과 위중혁이 누가 진정한 무륜의 수족인지 가린다며 시합을 하다 갑자기 서로 얼싸안는 꿈. 아무튼 전부 개꿈이었다.
마지막엔 매가 되어 나는 꿈을 한참 꿨다.
자유로웠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창공을 나는 기분은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땅에 두 다리를 딛고 있을 땐 실없다 픽 웃었던 상상은, 나를 연 대륙 너머의 바다까지 데려다주었다.
섬 하나 없는 망망대해.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어딜 둘러봐도 청명한 푸른색인 세상이었다. 나는 상기되어 계속 날다가 발치에서 기이한 인기척을 느꼈다.
그것은 바다 깊숙한 곳에 있었다. 마치 거대한 구렁이가 집 마루 밑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들어갈까? 하지만 매는 물속에서 숨을 못 쉬는데. 아니다. 어차피 꿈인 것을. 망설임 없이 바닷속으로 몸을 날렸다.
아래로. 아래로. 기이한 기척을 쫓아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점점 빛이 멀어졌다. 물고기인지 요괴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괴이한 해산물들이 옆을 지났다.
그것은 바다의 바닥에 있었다.
‘이건……!’
빛 한 점 없는 바닥에서 그것의 비늘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루 밑 구렁이라는 비유가 완전히 틀리진 않았다. 다만, 까마득한 상위 호환이었다.
심해엔 거대한 흑룡이 잠들어 있었다. 그저 상상일 뿐인데 위압감이 엄청났다. 그러나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보고 있었을까. 흑룡이 눈을 떴다. 새까만 비늘 사이로 날카로운 눈매와 황금을 닮은 샛노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천태백호? 당신입니까?
긴 꼬리가 슬렁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을 낮게 흐르던 해류가 멎었다.
-아니지. 그분은 이미…… 쯧, 내 너무 오래 잠들어서 그런가. 영 혼몽하군.
밤처럼 새까만 꼬리가 바닥을 철썩 내려쳤다. 그 순간 몸이 퉁, 하고 튕겨 나왔다.
위로 솟구친 몸이 왔던 길을 순식간에 되돌아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해. 대륙과 바다의 경계. 내륙의 험준한 산세가 휘리릭 시야를 지나더니 어느새 천태백산 꼭대기의 사당이었다.
“아.”
“어?”
정확히는 사당 어딘가의 방에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눈을 뜨자 영춘이 놋대야의 물에 영건을 적시다 놀라 떨어뜨렸다. 철퍽 튄 물은 고스란히 내 얼굴로 쏟아졌다.
“으풉.”
“어헉!”
기겁한 영춘이 새 영건을 찾아 허둥거리다 결국 제 옷소매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얼굴에 벅벅 문질러지는 까칠한 천의 감촉에 겨우 정신이 좀 들었다. 그래, 화살을 맞았지.
“영춘아, 시험은 어떻게 됐-”
“도련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상서령께,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전하부터, 아니, 흑월이 먼저인가?!”
뭔가 횡설수설하는데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잠깐 기다리시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가는 김에 시험 결과만 알려주고 가지. 한숨을 폭 쉬며 침상 위에 손을 떨어뜨렸다. 사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