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4화
까마득한 최고봉이 구름 사이에 가렸다. 마음은 훨훨 날아 저 꼭대기에 닿고도 남는데, 몸은 진흙을 두른 듯 무거웠다. 처음 내달릴 때보다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약 일주일에 걸쳐 쌓인 피로가 육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기도 했다. 믿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으니까.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편으론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이렇게는 절대 무륜을 저곳까지 데려가지 못할 것이라고.
마음을 한 점으로 모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쳐냈다. 대신 가장 중요한 목적을 상기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뭐지?
‘모든 일행이 무사한 채로 가장 먼저 하늘비석에 닿는 것.’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게 불가능하다면, 내가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하는 건 무엇이지?
자문할 필요도 없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흑월!”
내 부름에 사위를 경계하던 흑월이 바로 달려왔다.
“이제부턴 네가 5황자 전하를 맡아라. 내가 어떻게든 뒤를 막아볼 테니 그사이에 전하를 모시고 산을 올라. 이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그리 많지 않으니 너 혼자서도 충분할 거다.”
흑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답지 않게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무륜도 반대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너 혼자 뒤에 남겠다는 건가?”
“지금으로선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전하, 부디 윤허하여 주십시오.”
“절대 안 된다.”
“그럼 셋 다 죽습니다. 전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기감까지 죽은 것은 아니다. 대강의 상황을 짐작한 무륜이 침묵했다. 흑월은 내 등에 손가락으로 글귀를 적기 시작했다.
-제가 남겠습니다.
“안 돼.”
-도련님의 보법과 체력은 저보다 뛰어나십니다.
“그래도 안 돼.”
5황자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흑월에겐 마음의 빚이 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누군가 여기 남아야 한다 해도, 그게 흑월은 아니었다.
무륜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미 흑월과 내가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대의를 생각하십시오. 뭔가 아셨기에 그런 말씀을 꺼내신 것 아닙니까. 가져가는 것이 있으면, 두고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게 너는 아니었어.”
혀와 잇새로 눌린 말을 뱉었다.
“그게 너는 아니었다고.”
-전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아.”
-그럼 도련님을 두고 가는 저는 괜찮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
손바닥을 펼친 흑월이 내 등을 두드렸다. 처음 여율령의 저택으로 오던 날, 내 엉덩이를 두드렸던 것과 꼭 같은 손길이었다.
-정 위험하다 싶으면 몸을 빼겠습니다. 저도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정말이지?”
-예. 약조하겠습니다.
잠깐 벌어졌던 거리가 다시 좁혀들었다. 사정거리에 들어서기 무섭게 뒤편에서 눈먼 화살이 날아왔다.
-가십시오.
검을 휘둘러 살을 쳐낸 흑월이 뒤를 향해 뛰었다.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남은 건 그가 등에 남긴 마지막 말뿐이었다.
-뜻을 관철하는 것은 주인의 역할. 그런 주인의 뒤를 지키는 것이 그림자의 역할. 그리고 저는, 그림자입니다.
* * *
여율령은 시험이 시작된 지 일곱째 날 아침에 천태백산의 꼭대기를 밟았다. 정확히는 암묵단원 중 발이 빠른 자의 등에 업혀 올라왔다.
만년설을 밟을 때까지만 해도 여율령은 작히나 여유로웠다. 산을 오르는 길에도 그는 꾸준히 보고를 받았다.
‘이 계절에, 그것도 천태백산에 폭우라니.’
가볍게 혀를 찼지만 그뿐이었다. 문제는 없다. 다소 지체되긴 했어도 그는 예상한 날, 예상한 시간에 맞춰 정확히 도착했다.
3황자는 시작부터 낙오나 다름없이 뒤처졌다. 그나마 2황자가 간신히 선두에 따라붙긴 했으나 차이를 좁히긴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5황자의 일행이 그를 두고 볼 리 없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오늘 오전 나절에 도착하겠군. 아니면 벌써 하늘비석에 손을 얹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느긋하게 도착했는데, 정상에 깔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색이 된 중서령과 문하시중이 상선을 모시는 사당에서 튀어나왔다.
여율령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시위한 금군과 밀영군에게 시선을 주었다. 안 그래도 잘 벼린 칼 같은 자들이 근처만 가도 베일 듯한 예기를 두르고 있었다.
“상서령!”
시커먼 그림자들이 사당의 담벼락을 훌쩍 넘어 달려왔다. 그들이 눈밭에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어찌 된 일이냐.”
“3황자가 외부에서 세력을 끌어들였습니다.”
“심지어 당당하게 시험 구역을 쏘다니며 2황자와 5황자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다른 암묵단들이 그를 제지하기 위해 내려가 있는 상태입니다.”
여율령은 처음에 제 귀가 고산병으로 이상해진 줄 알았다.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지만 이렇게까지 멍청한 사람이 실존한다는 걸, 지성의 결정체인 여율령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세한 현장 상황을 고해라.”
“암묵단 7할을 동원하여 정리하고 있으나, 수가 너무 많아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5황자와 2황자는 어떻게 됐나.”
“2황자는 소수 인원으로 묵묵히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3황자에 의한 피해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5황자는…….”
“내 그 버릇 고치라 하지 않았니, 영춘아.”
영춘이라 불린 그림자가 희게 질려 고개를 숙였다.
“말 흐리지 말고 빨리 답하거라. 너는 생각할 필요 없는 그림자다.”
“송구합니다. 5황자 일행은 현재 둘로 갈리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찢어진 후의 상황도 마냥 좋지 않습니다. 이곳을 향해 오고 있지만, 그 행색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나 진배없나이다.”
“아무리 외부 세력이 개입했다지만 고작 3황자의 수작에 5황자가 당했다고?”
“3황자 때문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며칠간 이어진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했고, 거기에 휩쓸려 부상을 입은 5황자를 3황의 손들이 덮쳤다고 합니다. 결과, 5황자는 독에 중독되어 지금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5황자를 도련님께서 홀로 안고 올라오시는 중이라고…….”
“흐음.”
보고를 다 들은 여율령이 영춘의 어깨를 섭선으로 툭툭 쳤다.
“영춘아, 앉아서 이리 등 돌려라. 아무래도 내 직접 가봐야겠다.”
“……예?”
“아드님이 이 험한 길을 올라오시는데 당연히 마중을 가야지.”
“……예?”
“왜 갑자기 귀머거리 행세를 하느냐. 업고 가자니까. 내 같은 말을 또 해야 하느냐. 무슨 그림자가 이리 생각이 많을꼬.”
“소, 송구합니다!”
영춘이 앉아서 등을 내었다. 그 위에 당당히 자리한 여율령은 자신을 업고 올라온 암묵단원을 포함, 부복하고 있던 나머지 단원들을 쭉 돌아봤다.
“너희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길 지켜라. 영춘아, 가자.”
“사, 상서령, 어딜 가십니까!”
“상서령?!”
중서령과 문하시중이 목소릴 높였지만 상서령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동장군 같은 금군과 밀영군 사이에 심약한 노인네 둘을 남겨둔 채 그대로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 * *
“미안하다.”
흑월과의 거리가 벌어지고 나무들이 점점 드문드문해졌을 때, 무륜이 말했다. 품에 안긴 그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내가 부족하여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어. 오만하고 어리석었다.”
“천재지변이 괜히 천재지변이겠습니까. 너무 자신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산사태였잖습니까.”
“그래도 예상했어야 해. 비가 그렇게 많이 온 상황, 무른 지반, 흘러내리는 토사, 넘어지고 뽑힌 작은 나무들.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도는 예측했어야 했다.”
무륜은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 그 심정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실책으로 인한 일행의 위기부터 짐덩이가 된 지금의 상황까지. 그의 기분이 수렁으로 빠져들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3년이 확실히 짧은 시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내가 이런 꼴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모다 사실이잖나. 너를 볼 면이 없다. 의지할 수 있는 주군이 되어주긴커녕 수하의 발목이나 잡고 있다니.”
내버려 두면 땅 파고 들어가 흙까지 덮을 기세였다. 어쭙잖은 위로는 관두었다. 인간성이 조금 결여되어 보이더라도 차라리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전하,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조금 무례한 언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쓸모없다고 모욕해도 달게 받겠다. 그게 사실이니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생각을 바로 말했다.
“이런 상황이지만 저는 조금 기쁩니다. 전하께선 의지가 되지 못해 슬퍼하고 계시지만, 저는 전하께서 저를 의지해 주시는 상황이 마냥 싫지만은 않습니다. 과거 전하께서 저를 구해주신 것처럼 저도 전하를 구해 드릴 기회를 얻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뒤에서 고생하고 있을 흑월에겐 조금 미안하지만요. 덧붙이며 중얼거리자 무륜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걱정되지 않나?”
“예, 괜찮습니다.”
“지금은 담담하게 말하지만 헤어질 당시엔 꽤나 절절하게 붙들지 않았나.”
“맞습니다. 흑월은 적당히를 모르거든요. 그냥 거기 내버려 뒀다면 제 목숨이 다하도록 굳건히 뒤를 지켰을 겁니다. 하지만 위험하다 판단되면 적당히 빠진다고 했고, 무사히 돌아온다는 약조도 했죠. 그러니 더는 걱정 없습니다. 그는 약조를 어길 사내가 아닙니다.”
무륜은 납득한 듯 입을 다물었다. 기분 역시 한결 괜찮아진 것 같았다.
기감을 곤두세웠다. 다행히 주변에서도, 앞으로 가는 길에서도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잘만 한다면 이대로 아무 문제 없이 정상에 도달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