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3화 (23/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3화

“흑월! 막아!!”

마지막 무사의 목을 베어내며 이화가 소리쳤다. 흑월이 새까만 비조가 되어 달렸다. 곧게 뻗은 손이 조약돌을 향했다. 그러나 흑월의 손톱 끝을 스친 그것은, 기어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푸확!

독무였다.

숨을 멈춘 둘이 동시에 동굴 안쪽으로 되돌아갔다. 먼저 도착한 흑월이 무륜을 안아 들자 이화가 뒤돌아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동굴 가장 안쪽에서 입구까지 하얀 길이 뚫렸다. 두 사람이 빛살처럼 밖으로 쏘아져 나왔다.

둘은 곧바로 근처의 계곡으로 내달렸다. 며칠간 내린 폭우로 흙탕물이 거센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둘은 무륜과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빠져나왔다.

“전하. 전하!”

푹 젖은 무륜의 눈꺼풀이 얕게 떨렸다.

“전하, 눈 좀 떠보십시오.”

그를 본 이화가 무륜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차마 세게 흔들지 못하는 손이 온갖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독을 마신 건지 아닌지. 마셨다면 얼마나 들이켰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화는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제발. 전하…….”

그 애원을 들었을까. 무륜이 겨우 눈을 떴다.

됐다. 이제 됐다. 안도한 것도 잠시였다. 미간을 찌푸린 무륜이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돌아봤다. 어지러운지 고개를 흔들곤 다시 눈을 깜박였다.

“……이화?”

“예, 전하. 저 여기 있습니다.”

그의 고개가 이화를 향했다. 하지만 시선은 애매하게 비켜났다.

“큰일이군.”

그의 어조는 여상했다. 너무 여상해서 이화는 그다음에 이어진 말을 저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 * *

상황은 좋지 않았다.

독에 대해 알게 된 건 하나였다. 호흡기로 침투하는 것으로, 숨만 쉬지 않는다면 중독될 염려는 없다. 그 외엔 백지였다. 영구적인지, 일시적인지. 해독법은 있는지. 지금 여기선 알아낼 수 없었다.

이화가 무륜의 곁을 지키는 동안, 흑월이 동굴로 되돌아가 이화의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혹시 모르니 계곡물에 한번 헹군 후 갖춰 입으며, 이화는 이제까지의 일을 무륜에게 보고했다.

“이미 있는 곳을 들켰다면 더 머뭇거릴 틈이 없다.”

그 말엔 이화도 동의했다.

“몽휼과 위중혁은 무사하겠지. 그래도 합류는 포기한다. 우린 이대로 하늘비석을 향한다. 어차피 정상이 머지않았어.”

이어진 말엔 동의할 수 없었다.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정상엔 금군과 밀영군이 있다. 3성의 수장들도 마찬가지야. 특히 여율령 그자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엿새 안에 당도했을 터. 그러니 가장먼저 도착하는 것이 곧 가장 안전한 길이 될 것이다.”

“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있을 것입니다. 규율을 저버렸다면 그 세력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암묵단이 그 사실을 적발하고 놈들을 정리하길 기다리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여율령은 유능하다. 어쩌면 벌써 눈치채고 정리를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화의 설득에도 무륜은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에 2황자가 어부지리를 하면, 우린 명분도 목숨도 잃을 것이다.”

무륜은 이런 짓을 벌인 것이 3황자라 확신했다. 그는 이미 시험의 시작부터 탈락했다.

불리한 상황이긴 하나, 본인은 이길 가능성이 충분하다 보는 2황자가 벌이기엔 너무 도박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세력의 주인이 자신임을 들키지 않으면 상관없다 생각했겠지.’

그야말로 3황자다운,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아마 2황자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일이 꼬였다. 이제 가장 유리한 것은 자신들이 아닌, 2황자였다. 2황자가 하늘비석을 만지면 이화는 몰라도 무륜은 반드시 죽는다. 그를 뒤늦게 깨달은 이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륜이 옳았다. 새로운 세력에 너무 놀라 2황자에 대한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는 도중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화가 명을 따르겠다 대답하려는데, 그 입술의 달싹임을 보지 못한 무륜이 말했다.

“하나 만약 네가 정히 눈먼 나를 데리고 가는 길이 험할 것 같아 두렵다면, 여기까지만 해도 된다. 넌 충분히 잘해주었어.”

이화의 머리에서 팽팽히 당겨진 끈 하나가 툭 끊겼다.

“……지금 저더러 죽는 것이 두려우면 당신을 포기하라,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무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줄곧 이화를 보고 있던 흑월이 흠칫했다. 분노한 이화의 낯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정수리가 절절 끓었다. 이런 울화통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럴 리 없잖습니까!”

무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당황한 그가 ‘이화……?’ 하고 불렀으나 이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전하의 의견에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수행했을 겁니다. 압니다. 제 의견에도 안전하단 보장 따윈 없죠. 하지만 저는 겁쟁이라 어떻게든 당신의 목숨이 안전한 방법을 택하려고 한 겁니다. 2황자는 잊고 있었던 것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시야가 흐려진다 싶더니 봇물처럼 터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울 생각은 없었다. 하나 눈물은 머리보다 가슴에 가까운 것이었다. 또, 가슴은 머리와 달리 의지만으로 통제되는 곳이 아니었다.

흑월이 펄쩍 뛰었다. 검을 든 그는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슬금슬금 다가가 나머지 손으로 이화의 옷자락을 잡았다.

“설마 지금 우느냐?”

“울지 않습니다.”

“흑월이라 했지. 지금 이화가 울고 있다면 내 어깨에 손을 얹게.”

이화가 눈을 부릅뜨고 흑월을 노려봤다. 가재는 게 편이다. 흑월은 미동도 없이 주변을 경계했으나 무륜은 속지 않았다. 그가 혀를 차며 확신했다.

“우는군.”

“그래서요? 다 전하 때문이니 더 말 마십시오.”

이화가 살쾡이처럼 말했다. 당황한 무륜이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이화는 냉정함을 되찾았다.

“당장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

“비석에 손 얹으시면 잔소리도 한 바가지 할 겁니다.”

“손 얹고 나면 나는 이제 황제나 다름없는데도 말이냐.”

“불경죄로 경을 치더라도 할 겁니다.”

“그래. 내 나를 황제로 만든 공을 감안하여 선처해 주마.”

이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눈은 울고 있으니 꽤나 볼썽사납겠지. 무륜이 보지 못해 이것만은 다행이다. 이화는 그리 생각했지만 그를 목도한 흑월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흑월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집 나간 마음 한 조각이 되돌아온 것을 느꼈다.

“하늘비석까지 곧장 가겠습니다.”

이화가 무륜의 몸을 안아 들었다.

“나를 업고 천으로 묶는 편이 낫지 않느냐. 이런 방법이면 네 양손이 전부 묶인다.”

“전하께서 다친 곳이 다른 곳이었다면 그리했겠으나, 눈이지 않습니까. 화살이나 암기가 날아오면 너무 무방비하게 노출되십니다.”

“제길. 하필 눈을.”

하필이 아니었다. 상대도 그걸 알기에 이런 독을 쓴 것이다.

“너무 심려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사히 하늘비석까지 모시겠습니다.”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부탁하마.”

“전하는 지고한 분이십니다. 부탁이 아니라 명을 하셔야지요.”

“안다. 하지만 네겐 부탁을 하고 싶구나.”

이화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의 심장 소리가 아까보다 커진 것을 무륜은 알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무륜은 생각했다.

‘나는 황제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위해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곁사람이 된 보람이 있었다, 네가 그리 말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주군이 될 것이다.’

멀리, 천태백 산맥의 가장자리로 해가 뜨고 있었다. 약 사흘 하고도 반나절. 내리 쏟아붓던 폭우가 겨우 그쳤다. 훗날 ‘격전의 팔 일’로 기록될 황위 쟁탈전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 * *

“하아……. 하아.”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달리며 속으로만 혀를 찼다. 초조함을 티 내선 안 되었으므로.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상황까지 모를까. 애초에 모를 수가 없다. 그러니 다 알면서도 침묵하는 무륜의 심경을 헤아려서라도, 나는 태연해야 했다.

“저쪽이다!”

“놓쳐선 안 된다!”

추격자들이 바로 뒤까지 바짝 따라붙었다. 해가 머리 위로 떠오르기도 전, 우리는 적과 조우했다. 눈에 익지 않은 차림새의 일류 무사들. 3황자의 외부 세력이었다.

가능한 교전을 피하며 산 위로 내달렸다. 이미 중턱까지 왔으나 깎아지른 듯한 경사와 험한 산세, 희박해지는 공기가 발을 붙들었다.

아냐. 할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먼저 비석에 손을 얹게 해드리겠다고 맹세했잖나. 그런데 뭐야. 왜 아까보다 느려졌어? 정신 차려, 여이화. 네 ‘쓸모’를 기억해.

나를 붙든 무륜의 손에서 슬쩍 힘이 풀렸다. 그가 내게 집중한 것처럼 나도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알 수 있던 변화였다.

“이화.”

“안 들립니다.”

“듣고 있지 않나.”

“죄송합니다.”

“왜 사과하지?”

“지금은 어떤 명을 하셔도 따를 수 없으니 미리 용서를 구한 겁니다.”

“생각도 판단도 하지 않는 물건이 되겠다더니.”

“그 말이 왜 여기서 나옵니까.”

“여기서 안 나오면 어디서 나올까. 팔다리 달린 화톳불이 주인 의사도 무시하고 멋대로 날뛰고 있는데.”

무륜과 말을 나눌수록 숨이 가빠왔다. 대신 초조하던 내심은 조금 진정됐다. 나도 모르는 새 느슨해졌던 팔에 힘을 주며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올려다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