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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1화 (21/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1화

나는 천천히 그의 손바닥에 글귀를 적었다. 움칠한 흑월의 손가락이 슬쩍 안으로 곱았다. 혀도 입도 멀쩡하면서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흑월이 값싼 동정이라 역정을 낼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 순간엔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왜 알리지 않았어.’

‘-혹 도련님께서 저어하실까 말씀드리지 못하였나이다.’

‘-무얼 저어해.’

‘-제 혀가 없는 것을요.’

나는 말을 잃었다. 손도 더 움직일 수 없어 흑월의 손만 붙들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곡해했는지 흑월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손을 빼고자 움직거렸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시간을 끌수록 오해의 골은 깊어질 터. 나는 아무 말이든 해야 했다.

‘-접문할 때 아쉽긴 하겠구나.’

……정말로 아무 말이었다. 흑월은 말린 명태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새 글을 적어 내려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흑월이 내 손을 뿌리치고 훌쩍 물러났다. 예상보다 과한 반응이었다.

‘흑월?’

잘못 본 줄 알았다. 복면 틈새로 드러난 피부가 불그스름했다. 그를 빤히 들여다보자 흑월이 코끝에 걸친 복면을 아예 이마까지 올리고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하면 눈이 안 보이지 않아.’

‘…….’

‘흑월? 진짜 갔나?’

그렇게 도망간 흑월은 일주일 동안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여율령에게 갔다. 그에게 자세한 내막을 듣고 난 후, 이번엔 다른 의미로 흑월을 찾지 못했다. 미안하고 안쓰러운 옛 추억이었다. 그 일로 나는 흑월에게 마음의 빚이 생겼다.

뭘 그깟 일로 빚까지야…… 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제 혀가 없는 것을 내가 저어할까.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하고 주저했을 그의 심경을 다 헤아릴 수 없기에, 그는 내 빚이 되기에 충분했다.

스윽. 옆에 나타난 흑월이 내 옷자락을 쥐어 당긴 것과 무륜이 날 부른 건 거의 동시였다.

“이화.”

“예, 전하.”

임무 중에 다른 생각을 하다니. 위중혁에게 한 소리 듣고도 아직 정신 못 차렸다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흑월의 손이 소매에서 손목으로 옮겨왔다. 언제나 힘이 됐던 그의 위로도 지금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륜이 잠깐 생각하고 말했다.

“벌써 닷새째의 강행군이다. 몸과 마음이 흐트러지는 건 당연해. 오히려 초행이고 첫 임무에 이 정도까지 따라온 것을 자랑으로 여겨도 좋다. 나는 네 나이에 그런 신기가 가능한 자는 알지 못하니.”

담담한 어조였다.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았다. 자책으로 무너지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심장의 박동도 바뀌었다. 평소보다 불규칙적이고, 어쩐지 거칠었으며, 묘한 아릿함이 느껴졌다.

“과분한 칭양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황자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나서서 후려치는 놈이 있었던 탓인가. 영 주눅이 들었구나.”

무륜이 서늘한 눈으로 위중혁을 봤다. 위중혁이 흠칫했다.

착각일까. 무륜은 심사가 단단히 틀어진 짐승 같았고, 위중혁은 짐승의 꼬리를 밟은 무지한 생쥐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려야 한다고.

“아닙니다.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치곤 목소리에 힘이 없는 것을. 하는 수 없지. 내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마. 몽휼은 네 나이 때 사람을 죽이고 이틀 밤을 악몽에 시달리다 결국 실금을 했다.”

두 번째로 날아온 돌은, 돌이 아니고 바위였다. 그 아래 깔려 납작 개구리가 된 몽휼이 구석에 찌그러졌다.

아니, 난 왜……. 난 가만히 있었는데……. 게다가 아주 조금이었습니다. 실금이랄 것도 아니었다고요……. 꿍얼거리는 목소리에서 설움이 뚝뚝 떨어졌다.

“위중혁은 어릴 적부터 천재라고 치켜세워져 자란 탓에 세상에서 본인이 제일 잘난 줄 알았다. 실제로 대적할 상대가 거의 없기도 했지. 그 상태로 첫 임무에 나섰다가 겨우 목숨만 붙어 돌아왔다. 아마 우물가에서 혼자 몰래 울었지?”

“전하가 그걸 어찌……! 아, 아니, 그보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이제 와 꺼내십니까.”

제 부모가 죽어도 ‘그렇군’ 하고 애도를 표할 것 같던 인간이 말까지 더듬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나는 무륜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심복. 다른 하나는 실력도 직위도 금국 제일인 무장. 그 틈새에 끼어 알게 모르게 경직되었던 마음마저 풀어져 버렸다. 비 내린 북부의 냉기 어린 공기 속에서도 나는 봄을 느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무륜이 저런 이야길 꺼낸 연유였다. 자신을 생각해 준 그 마음이 기꺼웠다.

“전하.”

“그래.”

“이제 정말로 괜찮아졌나이다.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송구할 것 없고, 괜찮아졌다면 그걸로 되었다.”

툭. 커다란 손이 숙인 고개에 얹혔다. 젖고 헝클어져 지저분한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다듬고 떨어져 나갔다. 있지도 않은 당과를 건네받은 기분이었다.

“여기서 잠깐 쉬지. 땅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다.”

천태백 산맥에서도 비석이 있는 산에 접어든 직후였다. 여유를 부릴 순 없으나 만약을 위한 휴식 정도는 취해도 될 시점. 무륜의 판단에 틀림은 없었다.

‘하지만…… 약간 불안하긴 하군.’

북쪽은 강수량이 적기로 유명하다. 그런 곳에 괴이쩍은 폭우가 쏟아진 게 벌써 이틀째였다. 잦아들었다 한들 빗줄기는 여전했고, 계곡이 바로 근처였다. 지반도 특히 약한 곳인지 밟는 곳마다 흙이 물렀다. 뿌리 깊은 나무들이 우거졌으나, 이미 곳곳에 휩쓸린 흔적이 있었다.

‘뭐, 전하께서 어련히 생각하셨겠지.’

무륜에 대한 나의 신뢰는 이미 정점을 찍은 상태였다. 나도 생각한 것을 그가 간과하지 않았으리라.

맹목적인 믿음은 외려 독이 되었다. 나는 이 순간의 판단을 오래지 않아 후회하게 됐다. 천하의 여율령조차 종종 실수한 적이 있음을 기억했어야 했다.

천재지변은 괜히 천재지변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위대한 자연의 현상으로 인해 빚어지는 거대한 재앙. 인력으론 어찌할 수 없기에 하늘의 재앙이요, 땅의 변화라 불린다. 2황자가 재차 보낸 다섯의 무사를 처리하는 도중 마주한 이 산사태처럼.

쿠르르릉. 쿠구구.

산이 울음을 토하는 것 같았다. 거대한 바위와 돌이 구르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렸다. 비명은 순식간에 흙에 파묻혔다. ‘피해!’라고 소리친 건 우리 중 누구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흑월이 입을 뻐끔거리며 나를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뺨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 저 상처를 입으며 복면이 찢어진 모양이다. 오랜만에 그의 민낯을 보았다.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오랜만이었다.

“……흑월.”

그의 눈이 이지러졌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난 괜찮…… 전하, 전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현기증에 주춤하다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무륜을 보았다. 황급히 그의 용태를 살폈다. 몸이 진흙에 푹 절어 있었지만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그럼 혹 내상을 입으셨나. 확인하기 위해 뻗은 손이 흑월의 손에 잡혔다.

-머리를 부딪쳐 기절하셨습니다. 큰 상처도 없고, 머리 안에 피가 고이지도 않았습니다. 조금 쉬시면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그래.”

안도하며 비로소 주변을 살폈다. 이전에 머물렀던 곳보다 크고 깊은 동굴이었다. 바위만 얹혀 있던 이전과 달리, 전체가 전부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토사도 걱정 없었다.

“이런 곳을 잘도 발견했구나. 잘했다.”

흑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안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몽휼과 당하는?”

-모릅니다. 저는 두 분을 챙기는 게 한계였습니다.

일행과 찢어졌다. 그것도 생사가 불분명하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요하지 마. 정신 차려. 모든 걸 흑월 혼자 짊어지게 할 셈이냐.’

흑월은 엄밀히 말해 무륜의 사람이 아니다. 여율령이 그의 아들인 내게 붙인 사람이었다. 본래 그의 성격이라면 방금 같은 상황에서 나 하나만 구했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그 둘이라면 무사히 몸을 피했겠지. 우선은 체력을 회복하자.”

흑월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무륜의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가만히 누워 있는 줄 알았던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어둑한 동굴 안인 데다 외상을 확인하기에 급급해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전하. 전하!”

가볍게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짚어본 피부가 차다 못해 얼음장이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라 내력을 운용하지 못한 탓이다.

“안 되겠다.”

서둘러 그의 옷을 벗기고 나 역시 옷을 벗었다. 멈칫한 흑월이 저가 하겠다 나섰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하겠다.”

내력은 제가 더 여유 있습니다. 그가 눈으로만 말했다.

“아니. 내가 한다. 지금 상황이라면 경험 많고 은밀한 기동이 가능한 네가 힘을 비축해 두는 쪽이 더 나아.”

흑월은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제 몫의 망토를 벗어 내밀었다.

“고맙다.”

무륜을 품에 안고 내력을 아낌없이 발산해 체온을 높였다. 그의 몸에 내 체온이 옮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스러운 한편 속이 말도 못하게 문드러졌다. 그 대부분은 자책이었다.

연이어 쏟아진 폭우와 길을 휩쓴 토사를 보았을 때. 또 발밑의 무른 지반을 알아차렸을 때 간언했어야 했다. 위로 가든, 아래로 일보 후퇴하든, 한시바삐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하노라고. 그러지 못한 결과가 지금이었다.

-번은 제가 먼저 서겠습니다. 먼저 눈을 붙이세요.

흑월이 벌거벗은 내 어깻죽지에 꾹꾹 글자를 눌러 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누였다. 엿새째 하루가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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