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0화
지나가는 말처럼, 별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다. 하지만 흑월의 사정은 저리 말해도 좋을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무례히 굴지 마십시오.”
최대한 평이하게 말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목소리에 날이 섰다. 내내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해 온 탓일까. 위중혁이 의외라는 듯 나를 봤다. 동시에 ‘감히’라는 그의 생각이 차가워진 표정에서 드러났다.
“그렇다면 미리 알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냥 입 다물면 누가 어떻게 알지? 게다가 우린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저것이 벙어리인지, 그냥 성격이 모난 놈인지는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전자의 경우 미리 언질이라도 줬어야 했다는 거다.”
위중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신속한 의사소통은 이런 임무의 기본이다. 하물며 우리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이냐. 불안 요소는 하나라도 더 줄여야 하는 길이다. 이 자리의 모두가 목숨을 걸고 가는 여정이란 말이다.”
입은 있으되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다 맞았다. 명명백백한 내 잘못이었다. 흑월이 가만히 있는데 내가 나서서 그의 치부를 드러내는 건 아니라 생각하여 아무 말 않고 있었다. 흑월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어찌 이리 어리석을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데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분하고 답답했다. 그러나 그보다 미안함이 더 컸다. 내 어리석음에 흑월까지 싸잡혀 욕을 먹은 까닭이다.
“학습 능력이 다섯 살짜리보다 못하군.”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위중혁이 놀라 무륜을 돌아봤다.
“전하, 이것은 다툼이 아니라-”
“위중혁. 검.”
무륜은 듣지 않았다. 위중혁은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무륜에게 다급히 고했다.
“전하, 아닙니다. 이는 제 잘못이 맞습니다.”
하나 무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위중혁을 향해 물었다.
“위중혁. 일전에 상서령으로부터 서신 하나 받지 않았더냐?”
위중혁이 멈칫했다. 무륜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 서신, 어찌했느냐.”
“보지 않고 태웠습니다.”
무슨 저주 인형이냐!
“그래 놓고 언질은 무슨.”
“…….”
그런 내용이었을 줄 몰랐다는 건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위중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무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말로 이화의 잘못이라 하여도 마찬가지다. 실수를 했다면 보다 경험이 많은 자로서 현명하게 이끌어주는 게 마땅한 것을. 화풀이나 다름없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할 연유가 무엇이냐.”
“…….”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모두가 목숨을 건 중요한 여정이다. 그걸 그렇게 잘 아는 놈이 몽휼과 그리 몽니를 내며 싸웠다더냐?”
가만히 있다 돌을 맞은 몽휼이 이쪽을 보았다. 얼굴에 억울함이 조랑조랑 달려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나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어제 전하가 보는 앞에서 둘은 검까지 뽑지 않았나. 이제 보니 똥 묻은 개였다. 나는 짜게 식은 얼굴로 위중혁을 봤다.
그가 묵묵히 밖으로 나갔다. 질척한 땅에 검끝이 박혔다. 대벌레 한 마리가 빗속에 거꾸로 섰다.
남은 자들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시급한 회의를 했다. 위중혁도 빗속에서 말을 더했다. 내용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갈 것이며, 만일의 사태를 상정한 것들이 주가 되었다.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이 대화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어쩔 수 없군. 바로 출발한다. 목표는 이틀. 그 안에 하늘비석에 닿는다.”
* * *
수백(獸伯)은 짐승의 우두머리라 해서 수백이다.
먼 옛날, 그것이 아직 금국 내의 소수민족을 일컫는 말이었던 시절. 그들은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뛰어난 기감과 내력,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짐승의 머리를 건드리지 마라. 수백의 지척에 사는 이들 사이에 널리 퍼진 말이었다.
그들은 워낙 폐쇄적이라 영역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딱히 문제도 없다. 그러다 가끔 괴이쩍은 자가 태어나 정계로 진출이라도 하면 대장군쯤은 능히 꿰찼다.
조용하고 얌전한 괴물. 연 대륙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든 계속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갔을 이들이었다.
하지만 금국은 역사가 긴 만큼 무수한 황제가 있었고, 그중 어떤 자는 옹졸한 겁쟁이였다. 그에게 수백은 어느 날 돌변하여 자신을 집어삼킬 한 처마 밑의 괴물이었다.
황제는 군세를 일으켰다. 수백의 민족은 긴 시간을 항쟁하며 서서히 남하했고, 그 과정에서 민족 외의 사람과 피를 섞었다. 과거의 영광은 퇴색되었으나 대신 그 힘은 얕고 넓게 퍼져, 새로운 국가를 세울 힘과 토대가 되어주었다.
오늘날, 남방 5국 중 하나인 수백인은 기본적인 무골을 타고났다.
그들은 무에 한해선 조금만 노력해도 보통 사람 두 배의 성장세를 보였다. 그리고 천 명 중 한 명. 잠들었던 조상의 핏줄을 타고난 자가 난다. 또, 그들 열이 덤벼도 이기지 못할 자가 만 명 중의 한 명꼴로 났다.
바로 흑월이 그랬다. 하지만 신이 내린 이 축복받은 자질은, 흑월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저는 상서령을 만나기 전까지 이렇게 태어나게 한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상선이 정말로 계시다면 이리할 순 없다 생각했지요.’
그 말은 흑월이 내게 한 말 중 가장 긴 것이었다.
2황자의 모친은 자신의 가문을 이용해 수백에서 조금이라도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이를 물불 가리지 않고 모았다. 매매는 점잖은 축이었다. 부모가 거부하면, 그 부모를 죽이고 아이는 납치했다.
그렇게 모은 아이들은 금국 내에 있는 비밀 양성소로 보내졌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여율령으로부터 들었다. 내가 겪은 일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긴 생지옥이었다.
약물을 사용해 아이들의 혀와 성대를 녹여 없앴다. 그 과정에서 삼분지 일이 죽어나갔다. 살아나면 더한 지옥이 아이들을 기다렸다.
그곳의 훈련은 지독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것뿐이었다. 과정을 따라가지 못하면 벌이라며 기둥에 묶어놓고 얇디얇은 꼬챙이를 하나씩 찔러 넣어 죽였다. 몇 개째에 죽는지 저들끼리 내기를 하며 낄낄거렸다고 했다.
여율령의 눈에 발각되어 와해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아이가 거기서 죽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2황자와 그 모친은 양성소가 발각되자 곧장 꼬리를 자르고 몸을 사렸다. 도망가는 것이 어찌나 재빠른지 여율령마저도 혀를 차며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때 여율령이 구한 아이들은 흑월을 포함해 고작 열 명이었다. 그중 다섯은 이미 다치고 병들었던지라 구해지고 며칠 만에 죽었다. 둘은 마음이 병들어 시름시름 앓다 죽고, 하나는 자살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흑월을 여율령이 거두어 키웠다. 그가 말하길, 흑월은 마음을 멀리 내보내 자신을 지켰다고 했다. 너무나 멀리 보내어 돌아오는 것도 오래 걸리노라고.
‘영영 오지 않으면 어쩝니까.’
‘올 것이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원한다면 이루어지는 것도 있는 게 사람이고 삶이니까. 아니면 ‘희망’이란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지.’
‘결국 상서령께서도 장담은 못 하신단 소리 아닙니까.’
‘아니. 분명 올 것이고, 심지어 그리 멀지도 않다.’
상서령은 다 아는 바가 있다는 것처럼 나를 보았다.
‘네가 흑월 때문에 이리 득달같이 나를 찾아온 것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에 속한 일이니까.’
그때 나는 이 인간이라면 정말로 다 아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것처럼’이 아니라.
회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비가 드디어 잦아들고 있었다. 바닥은 여전히 질척거리고, 계곡을 중심으로 토사가 쏟아졌으나 움직이기엔 한결 편했다.
“당하(堂下).”
“당하라 부름은 맞지 않다. 이제 금군대장도 아니니 그냥 위중혁이라 해라.”
“예, 당하.”
“…….”
위중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네가 지금 시비를 거는 것이냐.’
‘아닙니다.’
‘맞잖나.’
‘또 대벌레나 되시렵니까.’
무언의 칼이 오갔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여율령 아들 오 년이면 혀에도 제법 자신이 붙는다.
“다시 생각해 봤는데 말입니다. 당하 말씀이 다 옳습니다. 당하께선 저보다 열 살 연상에, 전 금군대장이셨고, 황궁에서 십 년을 몸 바쳐 일하신 분이지요. 그런 분의 말씀에 무슨 틀림이 있겠습니까. 다 연치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제 탓이지요.”
무륜이 이쪽을 돌아봤다. 위중혁이 흠칫했다.
“전하께서 내 잘못이라 덮으신 일이다. 그 일에 대해선 그만 말하지.”
“그럼 딱 한 마디만 더 하고 그만하겠습니다. 흑월에 대해선 두 번 다시 멋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땐 아무리 당하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지금 네가 감히.”
“예. 감히 경고하는 겁니다.”
차갑게 일갈하곤 그에게서 멀어졌다. 위중혁은 차마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분노로 어깨를 굳혔다.
안다. 내가 한 말들은 비꼬려고 한 것임과 동시에 전부 사실이기도 했다. 그에겐 잘못이 없었다. 그럼에도 위중혁에게 그리 날을 세운 것은, 그가 한 것과 같은 실수를 내가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너와 함께한 지 제법 되었는데 이제껏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넌 왜 말을 하지 않지?’
무신경한 질문이었다. 어렸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물음이기도 했다.
머뭇거린 흑월은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도 한참 망설이다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에 글귀를 적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 흑월의 행동이 마냥 설렜다. 물론 철없던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간지러움에 움츠러들던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은 건, 그가 ‘없을 무’를 적었을 때였다.
‘-소인에겐 혀가 없습니다.’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손을 붙들었다. 그러곤 흑월보다도 긴 시간을 머뭇거렸다. 나로 인해 다쳤을지 모를 그의 마음이 걱정되어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