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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9화 (19/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9화

“어, 어, 어떻게…….”

“본인이 버러지인 줄 모르는 버러지가 감히 나더러 버러지라 하다니. 3년도 짧은 시간은 아닌 모양이야?”

아. 버러지라고 불린 게 거슬리셨구나. 하긴 이리저리 구르고 유폐되긴 했어도 황자는 황자. 어디서 저런 험한 말을 들어보셨을까.

“아악!”

“크헉!”

나머지 둘이 몽휼과 위중혁의 검에 유명을 달리했다. 하얗게 질린 무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더 볼 필요도 없었다.

한발 먼저 정리를 시작한 흑월을 따라 시체를 치우고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몽휼과 위중혁도 거들었다. 그들은 전투 중 누구보다 합이 잘 맞았다. 실로 의외였다.

그들이 같은 시체에 손을 댔다. 멈칫한 둘이 고개를 들었고,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 비슷한 장면을 나는 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읽었다. 흑월이 빌려준 민담집(民譚集)에서.

달도 뜨지 않은 초하룻날의 연당. 가문을 감춘 무사와 신분을 속인 공주가 만났다. 정략혼을 앞둔 공주는 차마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헤어짐을 고했다.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그 뜻이 내 뜻이라. 과묵하고 우직한 무사는 슬퍼하는 공주를 더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무사에게 노리개를 건넸다. 내 어미가 준 노리개입니다. 그분께서 내 행복을 빌며 내게 주신 것이니, 나 역시 당신의 행복을 빌며 당신께 드리렵니다. 그렇게 중요하고, 귀하고, 아주 소중한 노리개를 어이없게도 떨어뜨려 두 사람이 동시에 잡는 장면.

“…….”

물론 이곳은 험준한 산속이고, 주인공 둘은 흑의 무복을 입은 시커먼 사내들이며, 주우려 한 것도 피를 철철 흘리는 시체지만, 그래도 맥락은 비슷하-

“네놈은 사사건건 방해로군.”

“허! 누가 할 소리!”

-지 않군.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혹 저대로 칼부림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 이전에 겪은 게 있는 탓인지, 팩 돌아선 각자 다른 시체를 처리하러 갔다.

한숨을 쉬며 둘이 버리고 떠난 시체를 치웠다. 어차피 같은 주군을 섬기는 몸. 좀 좋게 지낼 수는 없는 걸까.

힐금거리며 위중혁을 봤다. 몽휼에 대해선 아직 아는 바가 적어 뭐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위중혁은 달랐다. 내가 아는 금군대장은 저런 사람이 아니었다. 과묵하고 진중한데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젠체하진 않는. 딱 민담집의 무사 같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위중혁이 말했다.

“……소금쟁이 같은 놈.”

“뭐야? 이 무식한 투구벌레 같은 게!”

왜 저러는 걸까 대체. 금세 또 툭탁거리는 두 사람을 흐린 눈으로 보았다.

내 기분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흑월이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저택에서 하던 것처럼 약한 어리광을 부렸다.

“응. 그래. 역시 너밖에 없어.”

고양이처럼 그의 손에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화!”

벼락같은 부름이었다. 놀라서 돌아보자 아까 그놈을 오체분시(五體分屍) 한 무륜이 나를 보고 있었다. ‘버러지’의 여파가 남은 걸까. 아니면 습격 자체에 기분이 상한 걸까. 원흉이 되는 놈은 죽었는데, 어째 아까보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뭐지. 나 아까 싸울 때 실수했나. 헉, 보법이 한 발 샌 것을 보신 걸까?’

그의 검으로서 맞이하는 첫 전투였다. 진정하려 해도 마음이 들뜨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은 발에서 드러났다.

해도 다른 큰 실수는 없었는데. 설마 기본도 안 된 녀석이라고 실망하셨을까. 이제 와서 곁사람으로 받아준다 하신 걸 무르진 않겠지?

“전하, 뭔가 하명하실 일이라도…….”

안절부절못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양손이 절로 모이며 공손해졌다. 말끝이 목 안쪽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무륜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철렁했다. 대체 무슨 반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륜이 큼흠, 목을 가다듬었다. 다시 나를 본 그는 평소의 무륜이었다.

아, 그냥 기침이 나셨던 것뿐이구나. 나는 안심했다.

“그리 열심히 할 필요 없다. 시체는 대충 수풀에 던져 놔라.”

무륜이 하늘을 보았다.

“곧 비가 올 거다. 좀 더 서두르지.”

그의 말대로 다시 출발하기 무섭게 비가 쏟아졌다. 폭포수 아래 선 것처럼 쏟아붓는 폭우였다. 우거진 나뭇잎도 소용이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라, 결국 넓은 바위 밑에 난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무륜이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몽휼과 위중혁은 잽싸게 그 양옆을 차지했다. 자연히 나와 흑월이 가장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공간이 좁아 내 발끝과 흑월의 어깨가 살짝 비어져 나갔다.

그래도 이만한 곳을 찾은 게 어디냐. 흑린 누에의 천 덕에 실상 젖은 곳은 적었다. 거기다 내력을 숨 쉬듯 운용할 줄 아는 수준이 되면 체온 조절쯤은 쉽게 했다. 이 일행 중 그를 못 할 자는 없었다.

“…….”

내력을 끌어 올리는데 심상찮은 기세가 전해졌다. 동굴 밖이 아닌, 안쪽에서였다. 예상치 못한 사태 때문일까. 무륜은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드러냈다. 습격을 받았을 때보다 지금의 기분이 더 나빠 보였다.

몽휼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위사장, 예 앉으십시오.”

“예?”

“밖을 경계하는 건 밤눈 밝은 제가 하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지적할 게 한둘이 아니라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은 한낮이었다. 게다가 억수 같은 비로 인해 시계 또한 나빴다. 뭔가 알아차리려면 기감을 세워 감지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뭐지. 뭔가의 암구호인가.

이해를 못 해 우물거리자 보다 못한 그가 직접 와선 저리 가라며 떠밀었다. 얼결에 밀려나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에 무륜의 팔이 닿았다.

아까 봤을 땐 닿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도 내가 잘못 봤을까.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구나. 겨우 첫 전투 직후인데 이리 얼이 빠져서야. 반성하며 슬쩍 주군의 낯을 훔쳐봤다. 무륜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이한 신색이었다.

내심 감탄했다. 역시 오래 모신 자는 다르구나. 뭔지는 몰라도 몽휼은 그가 심기 불편했던 이유를 정확히 짚었다. 나는 언제쯤 저리할 수 있을까. 많이 부럽고 조금 속상하여 몽휼을 힐끔거렸다.

“이 상태면 2황자와 3황자도 움직일 수 없긴 마찬가지다. 빗줄기가 약해지길 기다리지.”

하지만 비는 그 후로도 하루를 꼬박 퍼부었다. 북쪽에, 그것도 이 계절에 폭우라니.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밤에는 콰르릉콰르릉 천둥 치는 소리에 산이 무너지는 소리도 섞여 간간이 들렸다. 좋지 않았다.

“산사태인가. 좋지 않은데.”

무륜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이런 때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결국 일정은 예상보다 늦어졌다. 본래 목표대로라면 도착했어야 할 닷새째. 우린 여태 동굴에 있었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조금도 잦아들지 않은 빗줄기 사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그러지?”

무륜이 물었다.

“뭔가 인기척 같은 것이 느껴져서…….”

일행을 돌아봤다. 가장 먼저 무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느끼지 못했다.”

몽휼과 위중혁도 부정했다.

“못 느꼈습니다.”

“모르겠군.”

가만히 고개를 든 흑월마저 고개를 가로젓자, 정말로 내가 잘못 느낀 것인가 긴가민가했다. 그래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묘한 찝찝함이 발목을 잡았다.

“직접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제 착각일 가능성이 크니 혼자 다녀오지요.”

“몽휼. 함께 가라.”

몽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닙니다. 쉬고 계십시오.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불허한다. 이런 경우 2인 1조가 기본이다.”

“……그렇다면 흑월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흑월이 기다렸다는 듯 스르륵 내 옆에 서자 무륜의 기세가 험악해졌다. 대체 왜…… 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륜은 흑월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아웅다웅하는 건 시커먼 대벌레 두 마리로 충분하다. 반쯤 도망치듯 밖으로 나오는데, 뒤에서 날아온 옥음이 발을 붙들었다.

“둘보단 셋이 낫겠지.”

몽휼이 ‘예, 뭐 당연히 그렇겠지요’라는 표정으로 조용히 따라붙었다. 2인 1조가 기본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라 결국 불편함을 안고 몸을 날렸다.

5리 정도 이동했을 때 이거 허탕이구나, 싶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쉼 없는 폭우로 동물들조차 제집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괜한 짓을 하였다.

또 들떠서 헛다리 짚었구나. 몽휼과 흑월에게 미안하여 이만 돌아가자 하려 했을 때였다. 둘의 안색이 일변했다.

우리는 맞춘 것처럼 순식간에 기척을 지웠다. 그대로 3리를 더 달리자 공터 위에 커다란 천 하나를 나무에 묶어 만든, 무척 단순한 비가림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아래 옹기종기 모인 열다섯 사내의 중심에 2황자가 있었다.

몽휼과 눈짓을 교환하곤 소리 없이 현장을 벗어났다. 등을 때리는 빗줄기가 한차례 거세졌다.

동굴에 돌아와 보고했다.

“벌써 여기까지 왔나. 이 빗속에 무리해서 이동했군.”

그렇다면 이쪽도 무리해서 한발 앞서가야 했다. 천막 아래로 보인 면면은 우리가 만났던 이들보다도 훨씬 지쳐 있었다. 아마 2황자의 한계에 맞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동한 후, 자리를 잡은 곳이 그 공터이리라.

“우선 잘했다, 이화. 기감이 뛰어나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무륜이 나를 한껏 추켜올렸다. 좌중의 눈들이 일제히 내게 모였다. 흑월도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남이 볼 땐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지만 저건 대견해하고 있는 거였다.

“고마워.”

흑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위중혁이 가벼이 말했다.

“말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건가. 아니면 다른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뜻을 함께한 후 날이 제법 흘렀는데 이제껏 목소리 한 번 들어보질 못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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