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8화
‘역시 그 열흘 때문인가.’
5년 전의 열흘. 그때의 이화는 정말로 한 줌밖에 되지 않았다. 자개함에서 막 꺼냈을 땐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실제로 처음 상태를 살핀 의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한 시진마다 미음을 흘려 넣고, 솜이불로 꽁꽁 싸매고, 팔다리를 주물러 살려낸 것이 바로 무륜이었다.
곧 죽을 것처럼 창백하던 뺨에 혈색이 돌아왔다. 간절한 마음이 상선께 닿았는지 아이는 사흘 만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때부터 갓 태어난 새가 처음 본 것을 따르듯 무륜을 따랐다.
돌아보면 언제나 간절한 시선이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있노라면 뽀짝뽀짝 다가와 양팔을 벌렸다. 순식간에 마음이 물러졌다. 그에 엉거주춤 안아 올리면, 아이는 온몸으로 당신이 좋다 외쳤다.
백 리 길을 쉼 없이 달려도 평이하던 무륜의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 소리 없이 당황한 그의 어깨에 스르륵 이화의 뺨이 내려왔다. 솟구친 심장이 이번엔 바닥까지 떨어졌다. 감겼던 무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륜은 목석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기억과 현실이 겹쳤다.
눈만 굴린 그가 제 어깨에 기대어 잠든 이화를 내려다봤다. 하얀 얼굴에 모닥불의 불빛이 아른아른했다. 완전히 잠들었다. 그걸 알아차린 무륜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항상 어리게 보긴 하지만 이화는 뛰어난 무인이었다. 여기까지 무리 없이 따라온 것이 그 증거였다. 아니, 체력만 놓고 보자면 다섯 중 제일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세상모르고 잠든 것은, 저를 믿어서겠지.
“…….”
무륜은 문득 지금 번을 서는 건 저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절대 저 멍청한 대벌레들을 믿어서 이리 무방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기를 품은 눈동자가 새까만 대벌레 둘을 봤다. 난데없는 주군의 살기 어린 시선에 대벌레들이 흠칫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올린 무륜이 이화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래도 이화는 깨지 않았다. 이번엔 아예 그를 옆으로 눕히고 머리를 제 무릎에 얹었다.
손끝에 스친 머리칼이 사라락 떨어졌다. 보이는 것과 꼭 같은 보드라움이라 무륜은 감탄했다. 오묘한 진회색의 머리칼은 햇살 아래선 은사처럼 빛났다. 그보다 짙은 색의 눈은 동경(銅鏡)을 닮았다. 맑은 거울처럼 한 점 흐림조차 없을진대, 정작 비추어 내는 것은 실제와 달랐다.
원한을 품은 자가 못해도 기백은 될 여율령은 믿음직한 후원자였고, 일개 그림자인 흑월은 의지가 되는 의형이었다. 자개함은 크기가 크든 작든 쳐다보기도 싫은 흉한 것이었다.
검은 의지를 관철할 가장 좋은 수단. 말린 신이화는 은밀한 편지. 당과는 옛 기억의 책갈피. 흐드러지게 핀 목련 가지는 몇 안 되는 어머니와의 추억.
그리고 무륜은, 이화의 전부였다.
이화의 세상을 다 합쳐도 무륜 한 사람만 못했다. 올곧게 바라보는 시선이 맹목적이라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 마음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크기도 가늠할 수 없다.
그것이 부담스러운 한편, 우월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동시에 가슴 저변에서 음습한 소유욕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거였군.’
열흘은 계기였을 뿐이다.
겨우 편애의 이유를 깨달은 무륜이 흐릿하게 웃었다. 정확히는 편애가 아니었다. 가진 애정의 종류가 다른데 그게 어떻게 ‘편애’가 되겠나.
이미 답이 뻔히 나와 있는 것을 고민하였다. 배운 것 많고 아는 게 많으면 뭐 하나. 세상 둔자가 예 있었구나.
조용히 나타난 흑월이 죽어가는 모닥불에 나무를 밀어 넣었다. 해가 지고 공기가 한층 차가워졌다. 무륜이 제 망토를 벗어 이화의 몸을 둘둘 감싸 다시 눕혔다. 축 늘어진 이화는 미동도 아니 했다. 아랫목에서 녹은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무륜이 배부른 짐승처럼 웃었다. 그래, 이제 보니 네 말이 다 옳구나.
“추운 자가 화톳불을 찾는 법이지.”
<3장 동경(銅鏡) 완결>
사실 몽휼과 위중혁의 충돌은 예견된 일이었다. 몽휼은 선황의 충견이었던 위중혁이 마뜩잖았고, 위중혁은 은근히 이를 드러내는 몽휼이 가소로웠다.
하나 아무리 그런 둘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무륜의 앞에서 검을 뽑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과거, 무륜이 황명으로 군을 이끌었던 시기의 어떤 암묵적 규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무륜의 군대. 개중에서도 실력 있고 성깔 있는 이들이 모인 무륜의 직속 부대에서 이런 다툼은 제법 흔한 일이었다. 해결법도 정해져 있었다. 삐걱거리는 관계를 안고 가느니, 차라리 한 번 터뜨리는 거였다. 단, 반드시 무륜이 지켜보는 앞에서 검을 맞대야 했다.
여태 무륜을 모셨던 몽휼은 당연히 알고 있었고, 과거 오랑캐 토벌 때 잠깐 힘을 보탰던 위중혁도 해결법의 존재를 알았다.
해서 암묵적 합의로 검을 들었는데, 거기서 사정 모르는 이화가 끼어들었다. 결과, 둘은 한 마리 검은 대벌레가 되어 수련을 겸한 보초를 섰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내 팔이 부러져도 이 새끼보단 오래 버티리라.’
‘전 금군대장의 이름을 걸고 이자보단 늦게 땅을 딛겠다.’
몽휼과 위중혁의 낯이 진지해졌다. 물론, 유랑 기인이나 할 법한 자세라 제삼자가 보기엔 그저 웃길 따름이었다.
모닥불의 숨이 죽고 새벽 서리가 내렸다. 승자는 위중혁이었다.
4장 당과
금군대장 위중혁은 이름 높은 무인이었다. 세도가인 위씨 가문의 적장자이기도 했다. 그를 흠모하는 시선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금국 제일인을 꿈꾸는 모든 이가 그의 등을 보며 꿈을 키웠다. 출세와 일신의 안위를 원하는 자들은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얻고자 갖은 애를 썼다.
그 모든 것을 떼고 보더라도, 위중혁은 참으로 잘난 사내였다. 6척 반의 장신. 인상은 과묵했고 눈매도 사나웠지만 어쨌든 잘생겼다. 사내답고 훤칠한 얼굴이었다. 입을 다물고 서 있기만 해도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자라.
“지구력이 형편없더군.”
그런 위중혁이 깐족거렸다. 가벼운 말로 빗대고 싶진 않으나 저건 ‘깐족’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고작 몇 초 늦게 내려온 주제에. 대신 시작은 나보다 훨씬 늦었지.”
“패자가 말이 많군.”
어쨌든 이긴 것은 위중혁이라 아무래도 몽휼이 밀렸다. 그를 본인이라고 모를까. 몽휼의 기세가 한층 살벌해졌다.
“검을 맞대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거다.”
“약한 개가 짖는 법이지.”
“설마 빼는 건가? 실력으로 질까 봐 겁이 나는 게로군.”
설마 위중혁씩이나 되는 자가 저런 가벼운 도발에…….
“지금 뭐라 했지?”
걸렸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낚였다.
“못 들은 것도 아니면서 되묻기는. 아니면 늙어서 가는귀라도 먹었나.”
내가 알기로 몽휼은 스물아홉이고 위중혁은 서른이었다. 나이를 지적하는 건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다. 하지만 몽휼도 위중혁도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 김에, 서로에 대해서도 무시하면 좋을 텐데.
“이화, 안색이 좋지 않구나. 지친 것이냐?”
무륜이 내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건 난데 외려 몽휼이 흠칫하여 위중혁에게서 떨어졌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린 그가 내 눈치를 살폈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위중혁 또한 직감적으로 무언가 느낀 듯했다. 하지만 눈치라곤 약에 쓰려도 없는 사람이라, 그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인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요령껏 입을 다물고 몽휼의 뒤를 따랐다.
한숨을 폭 쉬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미운 스물아홉과 서른을 한 번만 봐주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서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슬슬 천태백산이 보입니다.”
나흘째. 연북주를 지나 주북주에 들어섰다. 천태백산이 멀리서 그 위용을 드러냈다.
무륜이 내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땅과 하늘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한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 대륙 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른,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이었다.
천태백산은 천태백 산맥 중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진 산을 말함이었다. 저곳에 우리의 목적지가 있었다.
“불청객이 왔군.”
무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다수의 살기가 날아왔다. 화살이 나무에 퍽퍽 박혔다.
“몽휼.”
몽휼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뒤로 내려갔다. 한바탕 왁왁하는 소리가 들리고, 몽휼이 연어처럼 다시 거슬러 올라왔다.
“수는?”
“열다섯입니다.”
소속은 묻지 않았다. 이렇게 따라잡았다면 대충 예상은 갔다.
“인원을 반으로 나누었나. 어리석긴.”
무륜이 뒤를 턱짓했다.
“멈춰서 잡고 간다.”
네 명의 발이 동시에 멈췄다.
시험 개시 이후 첫 전투였다. 따라붙은 이들은 예상대로 2황자의 손들이었다. 몰골은 초췌하고 눈자위는 퀭했다. 그 몰골에서 그들이 우리처럼 말을 버리고 필사적으로 쫓아온 것을 알았다. 심지어 뒤처진 만큼 더 달렸을 테니, 아마 우리보다 쉰 시간도 적었을 거다.
실로 멍청한 짓이었다. 따라잡는다고 다가 아닌 것을.
이런 미친 짓은 일류 무사라고 해서 쉬이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특급 무사는 되어야 무리가 없었다. 무륜을 포함한 여기 이 다섯처럼.
“어리석군. 그런 엉망인 상태로 우릴 어쩔 수 있을 거라 여겼나.”
“우리의 역할은 이기는 게 아니라 너희를 이곳에 잡아두는 거다!”
“2황자는 제 수하의 교육을 어찌 시키는 건가. 감히 일국의 황자에게 반말을 지껄이다니.”
“네까짓 것. 어차피 2황자 전하께서 황제의 위에 오르시면 버러지처럼 스러질 목숨이다. 우린 그분의 대업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그러니까. 그깟 목숨 바친다고 뭐가 바뀌냔 말이지.”
무륜이 뒤로 물러났다. 무사의 눈에 뒤늦게 주변이 들어왔다. 그 시점에서 남은 무사는 그를 포함해 고작 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