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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7화 (17/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7화

뒤를 돌아본 이화의 눈에 얼빠진 면들이 들어왔다. 아주 한심했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시험’이었다. 그것도 누가 가장 먼저 하늘비석에 도달하는지를 겨루는 달리기 경주.

그런 의미에서 3황자는 시작부터 글러먹었다. 멍청함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인원이 많으면 당연히 이동은 둔해진다. 짐마차까지 준비한 것을 더 말해 무엇 할까. 3황자는 세력이 크고 탄탄한 2황자의 인원이 서른밖에 되지 않음을 봤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래도 2황자는 제법 생각했다. 인원 전부의 말이 군마로 써도 될 정도의 상등품이고, 짐도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실력도 제법인 소수 정예로 일행을 짰다.

그리고 그런 2황자의 머리 위에 나는 5황자가 있었다.

“빌어먹을. 달려라!”

먼저 정신을 차린 2황자가 말을 박찼다. 3황자는 허둥거리다 뒤늦게 수레와 짐마차를 포기했다. 그사이 5황자 일행은 황궁을 나가 성도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암묵단이 쫓았다. 여율령의 사설 조직인 그들은 이번 시험에서 ‘감시역’을 명 받았다. 그들은 5황자 일행이 튀어 나갈 줄 알았다는 듯 별 어려움 없이 따라붙었다.

“이대로 쉼 없이 간다. 다들 달리기는 자신 있나?”

무륜의 말에 ‘예. 전하!’ 하고 일치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황궁에서 천태백산의 꼭대기까진 말을 타고도 족히 열흘은 걸렸다. 5황자의 목표는 그 절반인 닷새였다. 보법에 온 힘을 쏟아부으면 가능한 시간. 처음부터 끝까지 선두를 유지하겠다는 작전이었다.

만나지 않으면 부딪힐 일도 없다. 게다가 뒤따르는 이들은 5황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초조함과 싸우다 자멸하게 될 터.

“나를 믿어다오. 나도 너희를 믿겠다.”

출발 직전까지 미세하게 어긋나던 마음들이 그 순간에 하나로 모였다.

나의 주군을. 황제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 생각은 이어졌다.

이화는 앞서가는 무륜의 등을 봤다. 여전히 넓고, 여전히 굳건했다. 세상 무엇보다 의지가 되는 등이었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던 몽휼과 위중혁도 저 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서로 손 맞잡고 적을 벨 것이다.

이화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본인은 저 둘 사이에 껴서 등만 터지고 중재에 실패했는데, 무륜은 그걸 말 한마디로 해냈다. 타고난 자질이 달랐다.

‘하긴 그의 뛰어남은 여율령도 인정했다. 더 말해 무엇 할까.’

보상으로 받은 이야기 중엔 5황자에 대한 여율령의 평가도 섞여 있었다.

‘만약 황제위에 오른다면 지엄하고 공명정대할 것이다.’

그 말을 한 게 여율령인 것을 감안하면 극찬이나 다름없었다. 이화도 그에 동의했다. 금국은 부강해지고, 백성들은 세상에 다시없을 성군이라 그를 칭송하겠지. 그렇게 혼란했던 정세가 안정되고 나면 황제의 격에 맞는 후와 비를 맞이하시…… 잘 나가던 상상이 덜걱 멈췄다.

망토 아래로 손을 넣은 이화가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생경한 아픔에 깜짝 놀랐다. 숱하게 다쳐봤지만 어느 것도 빗댈 만한 게 없었다.

“이화? 괜찮으냐?”

이화는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속력을 늦춘 무륜이 제 옆에 와 있었다. 다른 셋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흑월이 뒤늦게 무슨 일이냐, 눈으로만 걱정스레 물어왔다.

“가슴을 움켜쥐지 않았나. 어디 불편한가? 아니면 달리는 것이 너무 빨랐나?”

계속 보고 있었구나. 이화의 낯이 확 달아올랐다. 동시에 가슴의 통증과 울렁임이 심해졌다. 그 순간, 과거 여율령과 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화가 물었다. 제 마음이 만족하는 게 중요하냐고. 여율령은 웃으며 중요치 않다고 했다. 지금 당장 잔잔해 보이는 그 마음이 넘치지 않고…….

“힘들면 말해라. 괜찮다.”

흔들리지 않고-

“생각해 보면 이는 네 첫 출행이 아닌가. 긴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내 배려가 부족했어.”

불변하다면.

“이화?”

이화는 이를 사리물었다.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재빨리 안으로 감추고, 가장 강한 부분을 밖으로 꺼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조금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이제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래?”

무륜은 미심쩍다는 듯 이화를 봤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이화의 실력을 잘 아는 까닭이다.

과거, 위중혁과의 대련에서 아슬아슬하게 지다 마지막 날엔 결국 무승부를 했다 들었다. 그만하면 금국 내에서도 무위를 견줄 자가 드물었다. 심지어 나이도 이제 약관이다. 앞으로 그가 얼마큼 성장하게 될지는 무륜으로서도 기대가 되는 부분이었다.

그가 다시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러자 흑월이 기다렸다는 듯 대열을 이탈해 이화의 옆으로 왔다. 이화의 손을 잡은 그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장히도 걱정을 끼친 것 같다며, 이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열을 무너뜨리지 마라!”

무륜이 앞에서 일갈했다. 저가 이화의 옆으로 내려왔던 건 이미 없던 일이었다.

복면 아래 흑월의 입이 불만스레 튀어나온 것을, 지척에 있던 이화만이 보았다. 아릿하던 가슴의 통증은 그대로였지만 기분은 나아졌다. 이화가 이만 가보라며 흑월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흑월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다섯은 다시 비조처럼 내달렸다. 도성의 높은 지붕들을 타 넘고, 성벽까지 지나 이제 너른 들판이었다. 잡풀이 바람에 물결치는 것을 보며 이화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고요해야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흔들리는 마음이 야속했다. 여율령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욕망을 우습게 보지 마라.

‘고요해야 해.’

얄밉게도, 여율령은 이번에도 옳았다.

* * *

시험이 시작되고 하루. 무탈하게 연북주에 들어섰다.

이틀. 연북주를 가로질러 보다 북쪽에 가까워졌다. 봄이었던 계절이 역행하여 다시 겨울로 되돌아간 듯, 공기가 서늘해졌다.

사흘. 몽휼과 위중혁이 설전을 벌였다. 결국 검을 겨루어보자며 말은 대련이요, 행동은 사생결단인 판이 벌어졌다. 무륜은 이때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나무에 기대어 둘이 하는 양을 지켜볼 따름이라.

결국 이번에도 이화가 어떻게든 중재를 하려 진땀을 뺐으나 소용없었다. 둘은 들은 척도 않고 끝내 검을 뽑아 자리를 잡았다.

아이고, 이 철딱서니 없는 인간들아! 맨몸으로 중간에 끼어들어 가로막기라도 해야 하나. 이화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자 내내 지켜만 보던 흑월이 대뜸 제 검 자루에 스윽 손을 얹었다.

아니, 넌 또 왜……. 이화의 낯이 설움으로 흐려졌다.

“흠. 너도 낄 참이냐.”

“잘되었군. 전하께서 받아주셔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다. 분명 상서령의 그림자였지.”

방금까지 서로 으르렁거리던 몽휼과 위중혁의 죽이 척척 맞았다. 이화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르다. 후- 하고 웃은 그가 조용히 검을 뽑았다.

“그렇게 검으로 대화하고 싶다면 저도 끼워주십시오.”

위중혁이 말했다.

“좋지. 너와도 검을 섞어보고 싶던 참이었다. 마지막 대련은 무승부였으니.”

몽휼은 의외로 움찔하더니 갑자기 무륜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까지 위중혁과 기 싸움을 하던 것과 판이한 반응이었다.

“몽휼. 검.”

단 한마디였다. 하나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조용히 구석으로 간 몽휼이 검을 바닥에 꽂더니 그대로 몸을 허공으로 들어 물구나무섰다. 체중이 검끝에 실렸다. 감탄이 나올 신위였지만 아무리 특급 무사라도 저런 모습으로는 꽤나 고통스러울 터였다.

“뭘 멀뚱히 보고 있나, 위중혁.”

위중혁이 몽휼의 옆으로 갔다. 겅중 하니, 멀대 같은 두 흑의 무복이 거꾸로 섰다.

흑월이 재빨리 검 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모르쇠로 일관했다. 무륜의 시선이 이화에게 닿았다. 그가 아차 하여 얼른 검을 갈무리했다.

그를 빤히 보던 위중혁이 말했다.

“검을 뽑은 건 모두 셋인데 왜 둘만 벌을 받습니까.”

거꾸로 선 몽휼이 눈으로만 욕했다. 이 눈치 없는 새끼를 어쩌면 좋으리오.

“감히 허락도 없이 아군끼리 다툼한 것들과 그 둘을 말리느라 검을 뽑은 이를 같이 벌하라는 것이냐. 얼마 전까지 금군대장직을 맡았던 놈이 그것 참 공명정대하구나. 모르긴 몰라도 네 밑에서 억울함을 당한 금군이 적잖을 것이다.”

위중혁의 입이 딱 다물렸다. 살벌한 질책이 벌서는 등에 꽂혔다. 탄탄한 등이 금세 식은땀으로 척척해졌다.

찬바람이 일도록 몸을 돌린 무륜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치 빠른 흑월이 불을 지핀 후 모습을 감췄다. 보이진 않으나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무륜이 이화를 불러다 옆에 앉게 하며 말했다.

“둘이 나란히 번을 서면 되겠군. 그럼 오늘 밤은 부탁하마. 혹시 모르니 잘 쓰지 않는 손으로 하고 있어라.”

“이쯤이야 거뜬합니다.”

“저는 양손잡이입니다.”

“……오냐. 알아서들 해라.”

무륜은 이화와 함께 잠깐 눈을 붙였다. 하나 육신의 피로에도 쉬이 잠들진 못했다.

사실 위중혁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만약 여기가 아군 진영이고 방금과 같은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이화 또한 벌을 받는 것이 맞았다. 군영에선 이유보다 규율이 우선이다.

다시 말해, 이건 틀림없는 편애였다. 하면 자신은 왜 이화를 편애하였나. 고민해도 이거다 싶은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수하를 거느리는 입장에서 편애는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다. 불평등한 보상은 불만을 낳는다. 낙숫물도 꾸준하면 돌을 가르는 법. 충신의 마음을 돌리는 건 이 낙숫물 같은, 아주 자잘한 실망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이화를 벌할 생각은 도무지 들질 않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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