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6화 (16/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6화

가장 사람이 많은 것은 3황자의 무리였다. 대충 세어봐도 백은 되었다.

2황자는 그 삼분지 일인 서른 명 남짓이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기도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끌고 나온 말이 하나같이 명마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소수 정예에 기동력을 택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한쪽에서 웅성거림이 일며 넓게 포진한 무리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5황자의 등장 때 그저 멀뚱히 보기만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전 금군대장 위중혁이 뻥 뚫린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위중혁이 고개를 숙였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고 시종일관 진중함이 묻어났다.

그의 도착 직후, 이화의 그림자 부근이 흔들렸다. 게서 쑥 솟구친 흑월이 슬쩍 이화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저 왔다는 뜻이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그 연결을 오직 무륜만이 보고 있었다.

“이것으로 다 왔습니다.”

무륜에게 고한 이화가 면면들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다시 모인 것은 일주일 만이었다.

* * *

시험을 대비하여 사람을 추리던 때, 5황자의 처소에 모인 인물은 전부 다섯이었다. 5황자 무륜, 그의 위사장 여이화, 5황자의 그림자 몽휼, 전 금군대장 위중혁, 그리고 상서령이 보낸 흑월이었다.

다섯 중 가장 말이 많은 게 이화일 정도로 그들은 말이 없었다. 가교를 놓아야 하는 건 구심점인 무륜이나, 그는 이화가 쩔쩔매는 양을 그저 지켜만 봤다. 그간 벽을 치느라 보지 못했던 모습이 뒤늦게 눈에 들어온 까닭이다.

어린 줄은 알았지만 이리 보니 정말 어리구나. 올해 스물넷인 무륜이 제 나이 생각 않고 중얼거렸다.

이화는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몽휼과 위중혁 사이에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몽휼은 선황제가 내통죄를 씌워 죽인 지한국 가신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바로 얼마 전까지 금군대장이었던 위중혁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위중혁이었다. 본디 성품은 우직하고 올곧으며 행동거지에도 무게감이 있으나 그 또한 금군대장의 직분을 떼고 보면 천생 무인인지라, 걸어오는 싸움은 막지 않고 명분만 있다면 검을 뽑길 주저하지 않았다.

날 선 말이 오가고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화의 낯이 희게 질렸다. 둘의 칼부림으로 누가 다치든 알 바 아니었다. 다만 곧 있을 무륜의 시험이 걱정되어 죽겠다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무륜이 손을 들어 슬쩍 입가를 가렸다. 호랑이 노는 곳에 사슴아 가지 마라. 네가 거길 끼길 왜 끼누. 그냥 구석에서 아무것도 모르오, 눈만 끔벅이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을.

하긴 맹한 것도 귀엽다. 귀여우니 조금만 더 두고 보자. 이화가 알았으면 ‘전하?!’라고 소리쳤을 생각을 하며, 무륜은 이화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고운 얼굴이었다. 게다가 금국인치곤 연한 색의 머리와 눈 덕에 신비로운 분위기가 더해졌다. 거기에 입술만 선명한 붉은색이라 한번 보면 쉽사리 눈을 뗄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몽휼에게 가 있던 위중혁의 시선이 어느새 이화에게로 옮겨왔다. 가늘어진 눈이 탐색의 시선으로 이화를 훑었다.

그러고 보니 둘은 구면이었다. 상서령의 저택에서 둘이 대련을 한 일화는 바람을 타고 북궁까지 날아왔었다. 그때 위중혁은 드물게도 순수한 감탄과 칭양의 말을 남겼다 했지.

“둘 다 그만둬라.”

무륜이 입을 염과 동시에 소리 없이 다가선 흑월이 이화의 손목을 쥐었다. 그러곤 조용히 이화를 당겨 제 뒤에 세웠다.

좌중의 시선이 죄 흑월에게 닿았다. 흑월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몽휼과 위중혁은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상대라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됐다.

무륜은 흑월의 손에 꼭 쥐어진 이화의 손목에 정신이 팔렸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생경한 분노였다. 생각하기에 앞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셈이냐.”

추상같은 으름에도 흑월은 손을 놓지 않았다. 가만한 시선이 이화를 향했다.

이화는 당황했다. 눈치 빠르기론 암묵단 제일인 흑월이 모르쇠로 응했다. 눈짓을 줘도 반응이 없다. 결국 이화가 작은 목소리로 ‘흑월, 이만 놓으렴’ 하고서야 겨우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드득. 무륜의 이가 살벌하게 갈렸다.

방금까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몽휼과 위중혁이 동시에 입을 다물고 몸을 사렸다. 사전에 합을 맞춘 것처럼 착 맞아떨어진 움직임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곧 뭐 씹은 표정으로 팩 고개를 돌렸다.

나이도 잡술 만큼 잡순 분들이 대체 뭐 하는 짓이랍니까……. 이화는 어이가 없어 결국 ‘허’ 한숨을 쉬었다.

소리 없이 콧방귀를 뀌며 서로를 무시하는 둘. 일방적으로 으르렁거리고 일방적으로 모른 척하는 둘. 도합이 넷이라. 이화의 시름이 깊어졌다.

“…….”

* * *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회동.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다.

어쩌다 보니 바로 옆에 서게 된 몽휼과 위중혁의 분위기가 벌써부터 심상찮다. 다른 황자들의 해코지보다 내분을 더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화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왔다.”

그때, 2황자와 3황자가 등장했다. 각 진영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해가 뜨고 나면 대전 앞에 모인 이들 외엔 누구도 들고날 수 없다. 여기 있는 인원이, 곧 시험에 참가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늦게 오는 게 뭐 그리 좋은 일이라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 싸움을 하다 이제 기어들어 오는 모양이었다.

“그냥 둘 다 늦어서 출발선에도 못 서고 끝났으면 재밌었을 텐데.”

무륜이 중얼거렸다. 이화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잘 되었을 텐데’가 아니고 ‘재밌었을 텐데’라고……?

“아, 그럼 이 자리에서 칼 빼 들고 모반이라도 일으켰으려나. 정말로 그랬으면 좋았겠구나. 천태백산까지 안 가고 편하게 황좌에 오를 수 있었을 터이니.”

진심입니까? ……표정을 보니 진심이시네요. 아이고, 전하. 이화의 연한 눈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하나 차마 뭐라 말하진 못하고 속으로만 앓았다.

이분이 이런 분이셨던가.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기실 이화는 무륜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가 아는 무륜은 마냥 다정했던 5년 전의 무륜과…….

“왜 그러느냐. 표정이 좋지 않구나. 혹 걱정되어 그러느냐? 걱정 말거라. 선황이 죽은 이상, 이제 내겐 거리낄 것이 없음이니. 이 상황은 하나부터 열까지 내게 유리하단다.”

……고고하고 지엄하지만 여전히 다정한 무륜뿐이었다.

“예, 전하.”

이화는 얌전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픽 웃은 무륜이 그런 이화의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마치 주종이 바뀐 듯했다.

곁눈으로 그를 보던 몽휼은 모른 척했고, 위중혁은 눈을 가늘게 떴으며, 흑월은 관심 없다는 듯 단상으로 걸어 나오는 여율령을 응시했다.

대전으로 통하는 대문이 닫혔다. 사람들이 넓은 공간에 달랑 다섯이 모인 5황자 일행을 보며 수군거렸다.

“뭐야. 설마 저게 다인가? 겨우 다섯으로 시험을 치르겠다고?”

“금군대장께서 합류하셨다기에 긴장했는데 사실 별것 없는 것 아닌가.”

“심지어 말도 없군.”

“말만 없나. 물자도 없네. 허리에 찬 검을 제하면 거의 맨몸이야. 그냥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것뿐인가.”

“금군대장은 그저 호위나 하실 겸 가시는 건지도.”

위중혁 때문인지 대놓고 비웃거나 모욕하는 자는 없었다. 해도 내용에서 멸시가 묻어나는 건 똑같았다.

이화는 그들의 대화에 기가 찼다. 뭣도 모르는 것들이 입만 살아 있었다.

어차피 필요한 물자라고 해봤자 식량과 모포, 천막 등이다. 식량은 필요 없다. 육포와 벽곡단, 꽉 채운 수통만 있으면 보름은 버틸 수 있으니까. 모포와 천막은 지금 입은 무복과 망토가 해결해 줄 터였다.

서로 맞춘 것처럼 보이는 흑의 무복은 여율령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 지한국에서만 나는 ‘흑린 누에’의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깃털처럼 가볍고 보온성은 뛰어나며 잘 젖지도 않았다. 같은 무게 비단보다 족히 열 배는 비싼 물건이었다.

무엇보다 지한국 왕실에만 납품되는지라 돈이 많다고 개나 소나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 가치를 알아본 건 2황자와 3황자 정도였다.

‘저걸 다섯이나 준비했다고?’

‘빌어먹을. 늙은 구렁이 새끼가.’

열불은 나는데 뭐라 항의할 순 없었다. 여율령에게 뭐라 하면 ‘아들에게 잘 다녀오라며 옷 한 벌 해주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아들만 덜렁 해주기엔 제 면이 서지 않아 하는 김에 나머지 분들 것도 하였습니다. 설마 고작 옷 한 벌에 또 형평성을 들먹이진 않으시겠지요’ 따위의 소리나 하겠지!

고작 옷 한 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고작’이라 하기엔 너무 대단한 옷이었다.

‘참자. 참아. 어차피 여율령도 결과를 뒤집을 순 없음이니.’

‘금군대장이 껴 있다곤 하나 고작 다섯 명이다. 신경 쓸 것 없어. 도중에 2황자만 처리하면 황제가 되는 것은 나다.’

둘은 속으로 분을 삭였다. 여율령도 어찌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명제. 가장 먼저 천태백산 꼭대기에 올라 ‘하늘비석’에 손을 댄 자가 다음 대 황제가 된다는 것이다.

슬렁거리며 단상에 선 여율령이 좌중을 내려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빙긋이 웃은 여율령이 입을 벌렸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섭선을 앞으로 내뻗으며 소리쳤다.

“상선(上仙) 희(希) 견차처(見此處)!”

연설 따윈 없었다.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뭣?!”

“시, 시작이라고?”

당황한 황자들과 달리 무륜과 네 명의 일행은 그대로 튀어 나갔다. 다섯의 검은 신형이 비조처럼 황궁의 담장을 뛰어넘었다.

방금까지 그들을 무시했던 무사들의 턱이 툭 떨어졌다. 남은 두 진영은 날듯이 내달리는 5황자 일행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보기만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