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5화
위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아시는 겁니까.”
“제 입으로 나온 말입니다. 당연히 알지 않겠습니까. 팔불출이라 민망하군요.”
“상서령!”
“예, 금군대장.”
위중혁은 이치가 제 혈압을 높여 암살하려 함인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만큼 여율령의 청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일갈하려던 위중혁의 입이 그대로 다물렸다. 상서령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낯이었다.
“설마 진심이십니까.”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불가능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상선께서 내리신 법률에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데려가든, 누구를 데려가든 상관없지요. 법률이 제한한 것은 ‘출발할 때 함께하는 자만이 그 시험에 함께할 자격을 얻는다’는 겁니다.”
중간에는 끼어들 수 없다. 반드시 시작할 때 함께한 자들만이 시험에 개입할 자격을 얻는다.
“황자님들이 사이좋게 달리기경주라도 하실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2황자도 3황자도 끌어들일 수 있는 이는 다 모아 출발할 겁니다. 그에 맞서려면 이쪽도 그만한 준비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은근슬쩍 ‘이쪽’에 넣지 마십시오.”
“왜 아닙니까. 5황자 전하를 흠모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율령은 위중혁의 모래밭에서 사금파리 조각을 정확히 집어 들어 올렸다.
“그게 가능할 거라 보십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누구를 동행해도 형평성엔 어긋남이 없음입니다.”
“집행관이신 상서령께서 직접 이리 사주하시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전 좀 어긋나도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가 집행관인 것을요.”
역시 이 인간은 싫다. 미간을 찌푸리는 위중혁을 향해 여율령이 해죽 웃었다.
“뵙고 싶지 않습니까?”
가려진 주어가 한 점 흐림 없이 보였다. 온통 흐리다 생각했던 마음 역시 돌연 선명해졌다.
위중혁은 눈을 감았다. 들여다봐선 안 된다. 절대 보아선 안 된다. 그리 되뇐 것이 무색하게 그의 내심은 이미 청경(淸鏡)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분께서 황제가 되면 그때 뵙겠습니다.”
“때는 만드는 겁니다. 만들지 않은 때는 오지 않습니다. 욕망에 솔직해지십시오. 어떤 후회는 평생을 가기도 합니다.”
“저는 선택하는 자가 아니라 선택받는 자입니다. 금군대장은 곧 황상의 가장 뛰어난 검. 검은 자아가 없습니다.”
“그럼 금군대장을 그만두십시오.”
뭐야, 간단한 문제잖아- 라는 어조였다. 위중혁의 눈이 부릅뜨였다. 처음으로 드러난 동요에도 여율령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금군대장직이 별겁니까?”
별거다. 그런데 상서령인 자가 저리 말하자 굉장히 하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상서령이 아니라 여율령, 저자가 저리 말해서 그런 것이겠지.’
위중혁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여율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목적이 분명하다면 관직은 수단에 불과하지요. 그래도 정히 금군대장직에 미련이 남는다 하시면, 당신의 황제께 다시 받으십시오.”
당신의 황제. 그 말이 위중혁의 심을 잡아챘다.
“진정 뛰어난 검은 생각 없이 주인의 손에 마냥 휘둘러지는 검이 아닙니다. 외려 뛰어난 검일수록 제 주인의 뜻에 항시 의심을 품고, 그의 타락과 나태를 경계하고,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그 주인의 격이 한량없이 높음에야 더더욱.”
역시 자신은 이자가 싫다. 패배를 직감한 위중혁이 쓰게 웃었다.
“부디 이번엔 황좌에 앉은 이를 섬기는 검이 아니라, 황제가 된 당신의 주인을 섬기는 검이 되시길.”
검은 붓에 패했다.
* * *
금군대장 위중혁이 대장직을 사임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심지어 그 이유가 5황자의 일행에 합류하기 위함이라는 말까지 붙자 2황자와 3황자의 진영은 난리가 났다.
또 내막에 상서령이 있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졌다. 대로한 2황자와 3황자가 상서령을 찾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갓 약관이 된 집행관의 어린 아들이 5황자의 일행에 껴 있는 것과 무위와 영향력으로는 병부의 수장이라 불리는 금군대장이 그 일행에 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심지어 집행관으로서 중립에 서 있어야 할 상서령이 구슬려 집어넣었음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두 황자는 길길이 날뛰며 형평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상서령에게 집행관의 자격이 없음을 주장했다. 둘이 하는 양을 가만히 두고 보던 여율령이 섭선을 탁 접었다.
“두 분 황자님들의 뜻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 상서령, 집행관직에서 물러나겠나이다.”
황자들이 맞춘 듯 ‘허?’ 소릴 내었다. 이치가 이리 쉽게 물러날 리 없는데. 또 무슨 셈속인 것이냐. 경계의 눈초리가 여율령에게 꽂혔다.
여율령은 비죽이 웃었다. 배도 다르고 외모도 다르건만 저리 쏘아보는 멍청한 표정이 아주 똑 닮았다. 어딜 봐도 친동기간이구나.
“그리 권해주셔서 실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걸리적거리던 직책을 내려놓았으니 이제 맘 편히 제 아들을 지지할 수 있겠군요. 대놓고, 전폭적으로 말입니다.”
두 황자의 낯이 굳었다.
귀족들과 신료들은 극소수를 제하고 거의 대부분이 황태자파였다. 다른 황자들은 모친이 전부 외국 출신이라 이렇다 할 외척도 없었고, 기반 세력도 협소했다.
갑자기 황태자가 죽었다곤 하나 그들은 쉽사리 누군가의 손을 잡지 않았다. 시험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이상, 섣불리 나서 위험을 감수하느니 떨어지는 콩고물이 없더라도 차라리 새 황제가 세워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여론이 대세였다.
그런 추세는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반면 여율령은 어떠한가. 그는 이미 완벽하게 편을 정했다. 제 아들의 편을 든다 하지만 그 아들이 모시는 게 5황자니, 결국 5황자를 지지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휘하에 6부를 둔 상서성의 수장이고, 무능한 중서성과 문하성까지 은근히 발아래 거느린 재상이다. 가문의 힘은 또 어떠한가. 황가를 제하면 재력도 무력도 금국 제일이다.
그런 자가 온 힘을 다해 5황자를 지지한다면 어찌 될까. 지금은 그냥 좀 거슬릴 뿐인 5황자는 단숨에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를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견제할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5황자를 저지해야 하리라.
심지어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럼 시급히 다음 집행관직을 맡을 자를 알아봐야겠군요. 황자님들께선 혹 염두에 둔 사람이 계십니까.”
그렇다. 여율령이 집행관직을 사임하고 나면 다음 집행관은 누가 될 것인가.
2황자도 3황자도 자신의 사람으로 세우려 할 것이다. 당연히 의견 차는 좁혀지지 않을 터. 그렇다면 어차피 이도 저도 아닌 중립의 고관대작이 되리라.
어차피 원점인 셈이다. 아니, 원점에 5황자의 천군만마가 될 상서령만 추가된다.
“……됐네. 내 생각해 보니 그대만큼 집행관에 걸맞은 자가 없음이라.”
“나도 형님과 같은 생각이네.”
황자 둘이 숫제 잡아먹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내 황제만 되어봐라, 당장 벌거벗겨 죽일 것이다. 그런 기색이 여실히 전해졌다. 하나 상대는 ‘그’ 여율령이었다.
“아니, 갑자기 그 어인 말씀이십니까. 당과도 줬다 뺏는 게 아니라 하였거늘. 어찌 헛된 희망을 주었다 거두십니까. 그러지 말고 이제라도 새 집행관을 알아보지요.”
여율령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장에라도 집행관으로 아무나 지목하고 다 모인 자리서 사임을 표명할 기세였다. 2황자와 3황자는 다급해졌다.
“절대 아니 되네! 자네 말곤 적임자가 없느니.”
“형평성은요?”
“……어긋남이 없네.”
여율령은 기어이 황자들 입에서 직접 그 말을 뽑아냈다. 만족스럽게 웃은 그가 늘어뜨린 섭선으로 손바닥을 탁 때렸다.
“하는 수 없군요. 그럼 두 분 뜻을 받자와 이 여율령, 저 하늘의 상선께 맹세코 시험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진행하겠나이다.”
이미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음이니. 미처 하지 않은 뒷말이 마저 들리는 듯했다.
황자들의 표정이 소태를 씹은 것처럼 변했다. ‘상선’의 맹세라니! 이 연 대륙에서 ‘상선’에게 하는 맹세는 결코 어길 수 없다.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신수들은 타락하고, 죽고, 잠들었으나 상선의 힘만은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가 제 혼의 일부를 연꽃으로 피워내 지켜낸 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 대륙에서 상선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어긴다면 십 중 십 급살을 맞거나 병에 걸려 죽거나, 아무튼 죽었다. 그런 맹세를 했으니 시험 자체는 정말로 공정하게 진행될 것이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여율령이 해사한 낯으로 웃으며 읍했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
“…….”
하얀 잠룡이 스르륵 꼬리를 슬렁거리며 황궁 어귀로 사라졌다.
* * *
새벽 첫닭이 울기 전, 대전 앞에 무수한 사람이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무장한 무사였다. 하나같이 굳은 표정에 저마다 무구와 짐을 점검하고 있었다.
대전엔 미리 세 개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이번 시험에서 피아 구분을 위해 임시로 제작한 것들이었다.
포효하는 범과 매화가 그려진 붉은 기는 2황자.
웅크린 현무와 난꽃이 그려진 푸른 기는 3황자.
그리고 하얀 백호와 목련이 그려진 하얀 기가 5황자의 것이었다.
온통 하얀색이라 검은 선이 외려 두드러지는 깃발. 위사장 이화는 무륜, 몽휼과 함께 그 깃발 앞에 섰다. 다른 황자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무수한 시선이 꽂히는 걸 느끼며 이화는 다른 두 세력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