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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4화 (14/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4화

‘머리를 잘 썼어.’

비석이 있는 자리에는 두 세력이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이 관례였다.

하나는 금군과 밀영군. 황궁의 최대 무력 집단 둘이 그를 주인으로 인정한 이상, 그 아래 무사들과 사병의 의지 역시 정해진다.

다른 하나는 상서령, 중서령, 문하시중이다. 신료들의 세 수장이 그에게 읍했으니, 아래의 신료들도 허리를 굽혀 새로운 황제에게 절하게 된다.

그 순간 이전까진 후계로 논해지지도 않았던 황자일지라도 공고한 정당성과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어째서 저 녀석도 포함이지? 폐위된 녀석은 자격이 없지 않나.”

“정확히는 폐위되지 않으셨습니다. 유폐된 것이지요. 고로 5황자께서도 시험에 참가할 자격이 있으십니다. 이는 지엄한 ‘상선’의 유지를 받들어, 집행관의 이름으로 공표하는 바입니다. 이의는 받지 않겠습니다.”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2황자가 이를 아드득아드득 갈았다. 반면, 3황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오히려 열이 뻗쳐 경거망동하는 2황자를 픽픽 비웃었다.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5황자가 순식간에 안중에서 사라진다. 어차피 저들끼리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여율령은 그런 두 황자를 보며 애써 비웃음을 삼켰다.

“자, 그럼 이제 3도감과 국장에 대해 말을 나누어보도록 하죠.”

비탄을 애써 감추는 재상의 낯으로 여율령이 말문을 열었다. 개 두 마리와 범 한 마리. 그리고 그 범을 따르는 어린 목련의 행보가 참으로 기대되었다.

* * *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선황의 국장이 마무리되고, 잠깐 혼란스럽던 정세는 안정되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태반은 주먹구구식 일 처리에 정무는 뒷전이요, 2황자와 3황자 사이를 오가며 줄다리기를 하는 관료들과 때는 이때다 싶어 구린 일을 덮으려 수작질하는 탐관오리까지 더해져 난장판이었지만. 어쨌든 수면만큼은 잔잔하게 유지했다.

황태자 시해에 대한 조사도 여태 진행 중이었다. 물론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다들 이 건이 어떻게 덮일지 아는지라 설렁설렁, 어영부영, 하는 척만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황태자를 섬겼던 그의 손들은 조용히 궁을 떠났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황태자궁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늘을 향해 원망의 말을 쏟아내거나, 분노를 토하는 이도 없었다. 빈 상여를 진 상여꾼들 같았다. 그대로 주인의 무덤까지 담담히 걸어 들어가 옆에 눕는 그런 이들.

하나 그건 마음뿐이다. 그들은 주인의 시신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였고, 만지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황태자의 시신은 조사라는 명목하에 여전히 차가운 의금부의 지하에 누워 있었다.

“제 주군을 두고 가려니 걸음이 떨어질까.”

소리 없이 다가온 여율령이 내 옆에 섰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황궁에 몸담은 자들은 저가 떠나야 할 순간을 아는 법이지. 저들에겐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드물게도 말속에 희미한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다. 너무 의외라서 빤히 보자 멈춰 있던 섭선이 느리게 팔락였다.

“아까워서 그런다. 우직하고 강직한 놈들만큼 이용해 먹기 좋은 건 없거든.”

이 또한 너무 진심 같았다.

문득, 이 인간이라면 앞에 말한 것도 뒤에 말한 것도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른하게 웃는 웃음이 그런 추측을 뒷받침했다.

……뭐, 여율령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길 포기하고 다시 황태자의 수족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황궁의 정문을 나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공허한 뒷모습은 한동안 눈꺼풀에 남았다. 눈만 감으면 없는 상여를 멘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 * *

황궁의 판도는 시시각각 변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셋만 모이면 2황자와 3황자를 저울에 놓고 품평회를 열기 바빴다.

이전과 변함이 없는 건 금군과 밀영군 정도였다. 그들은 계령 선포 이후 계속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여파는 병부에도 전해졌다.

최고 명령권자가 부재한 현재, 외세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만한 기회가 없음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나태하게 풀어질 때 검대를 바짝 조였다. 검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고, 마음을 검날 위에 두었다. 그리고 지한국과 남방 5국의 정세를 예의 주시했다.

금국은 물길이 나지 않은 호수와 같았다. 그 크기가 바다와 같아 잘 태가 나지 않으나, 어디든 부패가 스민 그런 호수.

그중 가장 맑은 곳이 바로 병부였다. 3년 전까지 그들의 중심에 있던 자가 청렴하고 강직한, 그야말로 만인지상에 어울리는 분이셨던 까닭이다.

병부에 몸담은 사람. 특히 무예가 뛰어난 자 중 5황자를 흠모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당장 저기서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고 있는 금군대장 ‘위중혁’도 그렇다. 그는 5황자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금군대장이라는 직분에 있음을 후회했다.

하나, 그는 천성이 우직한 사내였다. 신의와 충의가 무엇인지 모르겠거든 위중혁을 보라, 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제 자식들도 믿지 않았던 전대 황제가 신뢰한 두 사람이 있으니. 상서령 여율령과 금군대장 위중혁이었다.

상서령이 청하고, 황제가 수락하여, 오직 황제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금군대장이 상서령의 집에 ‘대련’을 하러 찾아갔던 일화는 이미 도성에서 유명했다. 그 일이 얼마나 굉장한 일이었는지 모르는 건, 제 임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던 소문의 당사자뿐이었다.

위중혁은 여름낮의 꿈처럼 찾아온 마음을 차분히 접었다. 천천히 접어서 그게 본래 무엇이었는지 조차 잊었다. 그야말로 위중혁다운 정리였다.

하나 접힌 것은 그저 접히었을 뿐 사라진 건 아니었다. 드넓은 모래사장에 묻어둔 작은 사금파리 조각처럼, 그의 마음 어딘가에 묻혀 있던 그 마음이 이번 시험으로 인하여 기지개를 켰다.

“봄이군요.”

강철의 주둥이, 여율령이 말했다.

서릿발 같은 금군의 수장을 지척에 두고도 그는 마냥 여유로웠다. 위중혁이 힐긋 여율령을 봤다. 그게 다였다. 무시에 가까운 반응에도 여율령은 개의치 않았다.

문관들의 수장과 무관들의 수장은 아니나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자가 나란히 섰다.

둘이서 뿜어내는 기운이 보통이 아닌지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근처엔 누구도 얼씬할 수 없었다. 아니, 얼씬이 다 무어냐. 못 볼 것을 보았다고 허리를 바닥에 닿도록 숙인 채 줄달음질 쳐 도망했다.

위중혁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는 이치가 영 껄끄러웠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건 기본이요, 방심하면 한입에 삼켜지는 입담은 덤이다. 거기에 항상 께느른히 웃는 얼굴까지 더해지자 위중혁의 상극이 완성됐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위중혁과 달리, 여율령은 셈속이 깊은 자였다. 뭣 모르는 자들이 그를 백년 묵은 백구렁이에 비유하곤 했는데, 그를 들은 위중혁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봤을 땐 천년도 모자랐다.

가끔 여율령이 짠 판을 우연찮게 알아차린 적이 몇 번 있는데, 천하의 위중혁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때가 있었다.

개중엔 황상이 올라간 판도 있었다. 강심장이라 자부하는 제 심장이 다 철렁하였을진대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죽었을 여율령은 태연히 섭선이나 팔랑거리고 있었더랬다.

위중혁은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여율령을 피했다. 그에게 있어 여율령은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루하지 않으십니까?”

그런 여율령이 말을 걸었다. 마냥 무시하면 언제까지고 예 있을 기색이었다. 주변에 선 금군들도 목석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심 이쪽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상서령께서 어쩐 볼일이십니까.”

“사람이 왔는데 한 번 돌아보지도 않으십니까.”

“임무 중입니다.”

“지킬 사람도 없이 텅 빈 황궁을 지키는 임무 말입니까.”

“말을 가려 하십시오, 상서령.”

위중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를 따르는 금군들조차 흠칫하게 하는 기운이 서려 있었으나 여율령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섭선이 느리게 부채질을 할수록 위중혁은 초조해졌다. 그가 검으로 싸운다면 상서령은 붓으로 싸우는 자였다. 그리고 혀는, 검이 아닌 붓에 더 가까운 무기였다.

“혹 제 아들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작년에 직접 가서 손을 섞어본 적이 있었다. 고만고만한 녀석이 아비가 상서령이라고 감히 금군대장을 불러 가르침을 받으려 한다 생각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었다.

첫 합이 맞붙는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서령의 아들은 그때 이미 자신과 비슷하거나 아슬아슬하게 반수 아래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번 합을 나눈 후. 부릅뜬 위중혁의 눈에 섭선을 부치며 흐뭇하게 웃는 여율령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답지 않게 꽤 진실 된 미소였다.

그렇구나. 주변엔 더 겨루어 배울 자가 없어 그를 부른 거였다.

여이화는 저 천년 구렁이의 아들답지 않게 강직한 무인의 기개가 느껴지는 자였다. 심지어 아직 약관도 되지 못한 어린 청년이라, 앞으로의 성장을 생각하자 위중혁은 오랜만에 유쾌해졌다.

……눈앞의 이 영감탱이는 전혀 유쾌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5황자 전하와 함께 시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직접 보셔서 아실 겁니다. 그 아이는 하늘이 내린 무재입니다.”

그것엔 위중혁도 동의했다.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멈칫했다. 무인의 본능이 불길함을 감지한 탓이다.

“다만 아직 연치가 어려 눈도 어둡고 경험도 부족합니다.”

탁. 흔들리던 섭선이 접혔다.

“저는 금군대장께서 이번 시험 길에 그 아이와 동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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