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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화 (12/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화

늘어뜨린 5황자의 머리칼이 작게 흔들렸다. 악물린 이가 보였다. 동요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그는 끝내 물러나지 않았다.

“순진하구나. 상서령이 가르쳐 주지 않더냐. 이 고독(蠱毒)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독거미와 사갈이 되든가, 독거미와 사갈의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 널 오래 본 것은 아니나 절대 고독은 못 될 성정이라. 아까도 말했지만, 황상을 뵙거든 그 앞에 그저 나부죽이 엎드리거라.”

“전 여기서 살아남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전하의 곁에 있고 싶은 겁니다. 그때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당과를 쥐여주고, 얼러 안아주시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곁에만 있게 해달라는 게 그리 어려우십니까.”

대화를 하고 있는데 서로 뜻이 통하질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나보다 현명하신 분께서 어찌 이러시나. 어이해 나를 밀어내시나. 아주 애가 닳았다.

“나는 곁사람은 두지 않는다.”

“사람이 싫다시면 물건이 되겠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물건은 없다.”

“그렇다면 생각도 판단도 하지 않는 물건이 되겠습니다.”

“더더욱 필요 없구나. 쓰지 않는 물건에 무슨 소용과 가치가 있나.”

“세상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 쓰임을 다하는 물건도 있는 법입니다. 저 화톳불처럼요.”

손을 쑥 뻗어 5황자의 손을 쥐었다. 허락도 없이 황족의 몸에 손을 대었다. 무엄하고 무례한 일이었다. 하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가 전하의 화톳불이 되겠나이다.”

5황자는 내게 잡힌 손을 움찔하였으나 뿌리치지 않았다. 그저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며 잡힌 제 손을 내려다봤을 뿐이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는 짐작도 못 하였다. 여전히 읽기 힘든 옥면이었다.

“화톳불은 그냥 곁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살펴봐야 하는 물건이다. 주인의 관심이 없으면 꺼지는 게 화톳불이지.”

그렇게 말하는 5황자의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적어도 저는 꺼지지 않을 겁니다.”

“섣부른 장담은 아니 하느니만 못하다.”

“섣부른 장담이 아닙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장담입니다.”

“믿는 구석?”

“전하의 마음에 한풍이 서렸다는 것이죠. 추운 자는 화톳불을 찾는 법이니까요.”

내가 당신을 찾았듯이.

내내 덮듯이 쥐고 있던 손에 내 손가락을 얽었다. 길고 마디진 손가락은 마주 얽어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뿌리치는 법도 없이 그저 내 하는 양을 가만히 두고 보았다.

지금은 그거면 되었다. 내 모든 걸 불살라서라도 당신의 앞날을 밝히고, 곁을 덥히는 화톳불이 될 것이니.

“너는 진정…… 어찌 그래.”

5황자의 낯이 일그러졌다.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벌렸던 그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다물었다. 5황자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어졌다.

버려진 우물처럼 깊고 음습한 생각이 그의 귀밑 언저리에 앉은 것을 보았다. 그래도 아무 말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지금은 그래야 할 순간이었다. 5년을 기다렸는데 고작 새벽 한 틈을 더 못 기다릴까. 착하게 인내하며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손톱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원망은 아니 했더냐.”

“그는 전하와 저 사이엔 없는 말입니다.”

“내가 널 그리 버렸는데도 말이냐.”

“그때 그게 버린 것이었습니까? 전 맡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얽었던 손을 거두며 되물었다.

“제 생각이 틀린 것입니까.”

5황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인내를 가지고 대답을 기다렸다. 실상 지금 그가 할 대답이 이제까지 한 모든 선문답의 답이며, 앞으로의 우리 관계를 정립시킬 말이기도 했다.

그가 내놓을 답이 무얼지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5황자를 믿었다.

그는 탄탄한 땅과 같은 사람이었다. 흔들림 없는 팔에 안겨 있노라면 발이 허공에 떠 있다는 것도 잊곤 했다. 지금은 그저 조금 얼어 있을 뿐이다. 천태백산 이북의 동토(凍土)처럼.

탁자 위에 남겨진 5황자의 손가락이 안으로 곱았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내가 원하던 답이 나왔다.

“아니. 맡긴 것이 맞다.”

그가 입매를 휘어 웃었다. 정히 웃고 계시는데 내 눈엔 꼭 우는 것처럼 보였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예. 후회하지 않습니다.”

‘절대’라고 덧붙이자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내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섣부른 장담은 아니 하느니만 못하다고.”

“이 또한 섣부르지 않습니다. 경험에서 우러난 장담입니다. 후회는 5년 전 텅 빈 침상에서 홀로 눈떴을 때 충분히 했습니다. 평생 할 후회를 그때 하였으니 괜찮습니다.”

5황자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그래. 내, 앞으로도 절대 말로 널 이길 생각은 아니 하겠다. 대체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왔을까.”

선문답이 아닌 이런 질문이라면 얼마든지 바른 답을 낼 수 있었다. 울 것 같으나 차마 울지 못하고, 웃는데 웃는 것이 아닌 그를 향해 나는 활짝 웃었다.

“전하께서 열어주신 자개함에서 나왔습니다.”

* * *

“소개하마.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 위사장으로 봉해진 여이화다.”

입을 쩍 벌렸다.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황망함을 떨치지 못하는 와중, 마찬가지로 놀란 위사장이 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가 감동한 낯으로 5황자를 봤다. 마냥 한량처럼 계신 줄 알았더니 역시 잠룡이셨다. 역시 내 주군이시다. 그러한 생각이 글자 단위로 읽혔다.

표정 관리가 말단 관리보다 못했다. 정말 그 상서령의 아들이 맞나. 아무리 양아들이라지만 초록은 동색이고 근묵(近墨)인 것은 흑(黑)이라. 곁에 붙어산 지 몇 년인데 어디서 이런 순둥순둥한 것이 튀어나왔나.

“이치는 몽휼이라 한다. 유일한 수족이지.”

“역시 전하십니다. 따로 거느린 사람이 있으셨군요.”

“뭘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런 것 아니다.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이 녀석 하나뿐이야. 지한국에서 예까지 따라왔던 가신의 아들이다. 주로 하는 일은 정보 수집. 혹은 적의 동향을 살피다 필요할 때는 검으로도 쓴다.”

5황자의 말은 절반이 망설이었다.

그의 모친을 따라 금국으로 왔던 가신들은 지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가문의 무사들이었다. 범의 자식이 개일 수는 없는 법. 그 손(孫)인 몽휼도 음지에서만 살아 그렇지 실력은 특급 무사로, 황제의 지밀 호위인 밀영군과 견줄 수 있었다.

게다가 하는 일도 순서가 바뀌었다. 그는 평소엔 5황자를 지키는 검이다가, 필요한 정보가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우곤 했다.

설마…… 이 사람이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길까 봐 저리 말하신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으나 또 제법 그럴듯하여 몽휼은 말을 잃었다.

그가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사이, 맞은편에 서 있던 이화가 고개를 숙였다.

“몽휼 님이시군요. 5황자 전하의 손이시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연치 어리고 물정에도 어두운지라 전하를 모시기에 아직 부족한 점이 많겠으나 부디 잘 봐주십시오.”

“아무것도 부족한 것 없으니 그냥 편하게 해라. 그리고 몽휼 님은 무슨. 몽휼이면 된다. 넌 종 5품에 무려 황자인 나를 호위하는 위사장이고, 저것은 품계도 신분도 없는 그림자니까. 아마 몽휼도 네가 하대하는 것이 편할 거다. 그렇지?”

아니어도 그렇다고 해.

5황자가 눈으로만 말했다. 몽휼은 5황자 휘하 지밀 부대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5황자를 모신 지 어언 십 년. 척하면 척이다. 그는 속내야 어떻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봐라.”

“……그렇다면 하대하겠습니다.”

5황자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몽휼의 머릿속에 차오르던 온갖 계산과 가늠이 깡그리 날아갔다. 이분의 이런 미소를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이젠 기억조차 흐릿한 먼 옛날의 일이었다.

5황자가 몽휼에게 손짓했다. 읍하고 물러나 다시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그림자에 묻혔다.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란했다. 글피에 오라시던 명대로 다시 왔건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새로운 시일이 아니라 5황자의 곁에 선 위사장이었다.

상서령의 양아들. 여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그리고 여율령은 황제의 유일한 신임을 받는 자였다. 그 인사의 어디에 그리 총애할 구석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는 황제와 반목했으면 반목했지 어여쁨받을 유는 아니었다.

‘아니면 정말로 생로병사에 대한 비밀이라도 쥐고 있는 것인가.’

여율령은 겉보기엔 많아 봐야 서른인 매끈한 낯이지만, 실제 나이는 오십을 바라봤다. 궁인들은 요괴라 불렀고, 관료들은 백년 묵은 백구렁이라 수군거렸다.

몽휼은 죄다 어리석다 혀를 찼다. 상서령 여율령은 싫어하는 놈과 더 싫어하는 놈을 몰래 쌈 붙여 둘이 피투성이가 되는 동안, 멀찍이서 지켜보며 섭선을 살랑살랑 부칠 인사였다. 백년 묵은 구렁이? 우습다. 못해도 천년은 묵은 이무기였다.

‘진짜로 불로불사의 비결이라도 알고 있는 것인가.’

좀체 늙지 않는 외관을 보자면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몽휼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머릿속에 온갖 것이 날뛰는구나. 무엇보다 5황자는 아예 떠날 생각이 가신 것 같았다.

그를 또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지 생각하니 그저 아득했다. 눈에 그 이유가 뻔히 보이는데,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상대라 더욱 심란했다.

‘이러다 황제가 진짜 급살이라도 맞으면…….’

시름이 깊은 동시에 아까 본 5황자의 미소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고 보니 주군께 체향처럼 배어나던 술 냄새가 더는 나지 않았다.

멈칫한 몽휼은 위사장에게 신경이 쏠려 제대로 보지 못했던 제 주인이 어떤 모습이었나 되짚어봤다. 항시 날이 서 있던 그분의 분위기가 오늘은 익힌 계란처럼 부드러웠다. 복색도 단정했다. 머리도 정갈하게 틀어 올려 동곳을 꽂았다. 신색도 한층 편해 보이셨다.

“…….”

머릿속이 한바탕 전쟁터가 되어버린 몽휼에게 전서응(傳書鷹)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몽휼은 다리에 매인 서한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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