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화
“어찌 악몽을 꾸느냐.”
눈도 못 뜨고 앓기만 하는 위사장의 모습에 5황자는 마음이 불편했다.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았다.
“네 아직도 거기 있더냐.”
내가 분명 꺼내주었는데, 어찌 아직도 거기 있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5황자는 말을 잃었다. 한번 들고 나니 아무리 손으로 눌러도 가라앉지 않는 것이 연꽃 같았다. 이름도 나무에 핀 연꽃이더니…….
5황자가 울듯이 웃었다. 움직거린 손끝이 그런 5황자의 손가락을 쥐어왔다. 깊은 독 안에 버려진 아이처럼 조급한 손길이었다.
툭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과 달리 5황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바짝 마른 목소리가 신음처럼 속삭였다.
“-가지 마십시오.”
가련하고, 가엾은 목소리였다.
“못내 가시려거든 저도 데려가십시오, 나리.”
어둠 속에 묻힌 5황자의 낯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5황자는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 졌다. 완전히 졌다. 내 황상께도 아직 졌다 생각지 않거늘, 네게는 아주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하나 패배를 시인하는 게 한발 늦었음이라. 위사장의 하얀 뺨을 타고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5황자는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우두커니 굳어 그를 내려다봤다.
색이 옅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 흐트러졌다. 감긴 눈꺼풀 아래, 머리칼보단 짙으나 영롱하기가 꼭 달 같은 눈이 있다. 눈이 예쁘면 눈물까지 예쁜 것인가. 손끝으로 건드리면 그대로 응어리져 구슬이 될 것 같았다.
“가지 않으마. 내 예 있을 테니 울지 말거라.”
그 말을 들은 것처럼 위사장의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5황자의 마음도 편해졌다.
이미 틀렸구나. 아니, 네가 위사장이랍시고 나를 다시 찾았을 때 이미 정해져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5황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소중하게 쥔 위사장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검을 쥔 손이었다. 여린 구석이라곤 남아 있지 않으나, 그럼에도 그때 잡은 그 손이 맞았다.
“5년 전엔 내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베풀었을 뿐 실상 너는 어느 것도 고르지 못했지. 그러니 이번엔 네가 선택하려무나.”
네가 날 받아준다면, 이번엔 내가 네 옆에 있겠다.
“진실을 안 후에도 내게 정나미랄 것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 * *
새벽 내내 악몽으로 뒤척인 탓에 유독 피로한 날이었다.
할 말이 뭐든 그냥 묻어두기로 했는지 5황자는 더 이상 내 눈치를 보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가 여느 때와 같지 않았던 건, 궁인이 처소로 향하는 나를 붙들었을 때였다.
5황자가 나를 찾노라.
악몽 때문인지 묘하게 가슴이 술렁였다. 기대감보단 불길함이 짙었다. 그렇다고 주군의 부름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 나는 그길로 5황자에게 되돌아갔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방은 어둑했다. 5황자는 작은 호롱불 하나만 밝힌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맞은편 자리를 권했고,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차가 준비되었다. 내가 손수 말려 대나무 통에 담아 바치었던 신이화 차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신 5황자가 입을 열었다.
“남방에 ‘밀림’이라는 곳이 있다.”
순간 여율령에게 들은 이야기와 황태자의 토혈이 맞물려 속이 뜨끔하였다. 설마 5황자도 3황자의 뒷공작을 알고 있나? 긴장하여 그의 말에 집중했지만 5황자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곳은 항상 찌는 듯한 더위와 습기에 온갖 풍토병이 유행하고, 내부는 독충과 금수가 우글거려 보통 사람은 하루도 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지. 만약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자를 만난다면, 그자가 과연 어떨 것 같으냐.”
요는 선문답이었다.
난감했다. 이런 쪽에는 영 재능이 없는데. 한참 기다려도 내가 답을 내지 못하자 5황자가 말했다.
“네 눈앞의 사내와 같을 것이다.”
심장이 아까보다 큰 폭으로 떨어졌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 금국에도 그런 밀림과 같은 곳이 있다. 남방의 밀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독하여 순한 것들은 근처만 가도 삭아버리는 곳.”
그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 모를 만큼 둔하지 않았다. 나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을 지배하는 고독(蠱毒)의 왕이 있었다. 왕은 제 독이 흐려지는 꼴을 보지 못하여 밑에 있는 독물들을 잡아먹어 덩치를 불리고, 개중 뛰어난 것들은 인질을 잡아두고 뜻대로 부리어 자신의 세를 넓혔다.”
“…….”
“그러다 뛰어난 것들이 그 가치를 다하거나 드물게 저보다 더 뛰어나질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인질과 함께 처단해 자신의 세를 유지했지.”
찻잔을 쥔 손이 가볍게 떨렸다. 파문이 이는 찻물의 표면이 꼭 내 마음과 같았다.
“내 옆에 머문다는 것은 그 고독의 왕에게 정면으로 반한다는 뜻이다.”
‘가서 5황자의 말동무나 하며 지내거라. 그럼 황궁이 어떤 곳인지 자연히 배우게 될 것인즉, 아직 연치 어린 네겐 좋은 공부가 되겠지.’
‘이 나라를 다 뒤져도 고개 숙일 상대가 다섯이 안 되던 황자 전하셨다. 그런 분이 개처럼 전장을 떠돌아다니다 유폐 당하였지. 너는 그 사실을 뇌리에 새겨야 할 것이다.’
‘너는 네 한 몸으로 성 하나둘쯤 구할 수 있느냐?’
황제의 말과 여율령이 말이 연달아 나를 후려쳤다.
이젠 손이 아니라 전신이 폭우를 맞은 것처럼 떨렸다. 예전에 들은 겁박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단 5황자가 저런 말을 꺼내는 연유를 듣기 무서웠다. 그것이 무얼지 충분히 짐작이 가기에 더 그러했다.
“내 폐하께 직접 아뢰어 말씀 올리겠다. 새로 임관될 곳이 정해지면 곧바로 옮길 준비를 하거라.”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네가 상서령의 아들이고, 폐하께서 상서령을 아끼는 만큼 너 또한 아낀다는 것은 알겠다. 하나 딱 거기까지다.”
“…….”
“다시 뵙게 되거든 내 성정이 포악하여 아주 고되었다 아뢰거라. 이 고독의 상자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그 수장에게 밉보여선 안 되는 법이다.”
머리가 멍했다. 평소엔 잘만 돌아가던 잔머리도 소용없었다. 여태 잘해왔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전부 나만의 착각이었다.
“저는…….”
자개함에서 죽어가던 때의 기분을 지금에 비할까. 사방이 캄캄했다. 어딜 돌아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저는 본디 천것이라 배움이 짧습니다. 상서령의 밑에서 제법 그럴듯한 시늉만 하도록 다듬어진 것이 바로 저입니다. 전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저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망설을 하는구나. 네 영민함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넌 내가 왜 5년 전에 너를 구했는지 궁금하진 않더냐.”
입이 딱 다물렸다. 아니라면 그거야말로 망설이었다. 내 침묵에 웃은 5황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아직 어릴 적 일이다. 물밑 암투가 유독 심하던 시기였지. 여동생과 처소에서 함께 자던 중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았다. 아이의 안위를 염려한 나는 방 안에 있던 자개함에 아이를 들어가게 하고, 열쇠는 넣은 채 부러뜨려 버렸다.”
열쇠가 부러진 자개함. 그 안에 든 누군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였다.
“열쇠를 남겼다가 혹여 그것이 무도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되었으니까. 또 그리하면 무식하게 부수어 여는 것 외엔 도리가 없는데, 황자에게 진상된 자개함이니 오죽 튼튼하겠느냐. 하니 암살자들을 죄 죽이고 여기가 안전해지면, 그때 열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했다.”
5황자의 말은 일견 완벽해 보였다. 모든 것이 그가 정한 순리대로 흐를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현 금국 황실에는 황녀가 없으니까.
“어찌 그리 안일하고 어리석었을까.”
유리 조각이 가득한 방에 맨발로 선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피해보려 해도 한 걸음 딛는 순간 결국 피를 보고 마는지라,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그저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놈들이 처소에 불을 질렀다. 크고 화려했던 궁이 순식간에 불타올라 한 줌 재가 되었지. 동생을 찾아야 한다며 안으로 뛰어드는 내 혈을 짚어 기절시킨 자가 대체 어떤 놈이었는지, 나는 끝내 찾지 못했다.”
“…….”
“내가 멀쩡히 살아 있던 것을 보면 아마 어머니의 가신 중 한 명이었겠지. 황자궁이 전소되었던 습격 사건의 배후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 자체도 무수한 황실의 비사 중 하나로 묻혔을 뿐이다.”
“이제 와 그런 말씀을 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틀어진 일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네 말대로 ‘이제 와서’ 하는 말이니 안 그래도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 이제 알겠느냐? 나는 그저 내 마음 편하고자 네게 싸구려 동정을 베풀었을 뿐이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이든 하라는 것처럼 날 보는, 평소와 달리 흥분과 죄악감으로 얼룩진 5황자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상기된 숨이 잦아들었다. 그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어졌다.
“그렇군요.”
그의 어깨가 움칠했다.
“그때의 전하는 제게서 동생분을 보셨겠죠. 그리고 위안을 얻으셨던 겁니다.”
5황자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탁자 아래로 내려간 손은, 틀림없이 꽉 쥐어진 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에게 쓸모 있는 인간이었군요.”
죄인처럼 숙어졌던 5황자의 고개가 확 들렸다.
“제 아비가 저를 상인에게 넘기며 했던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쓸모가 있어야 살 자격이 있다. 그중에서도 경외하는 당신에게 쓸모가 있었다니. 기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나는 망연한 낯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그보다 한발 앞서 말을 이었다.
“또 전하께서 절 구하신 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몰라도, 저는 압니다.”
“……그는 기만이었다.”
“그렇다고 전하께서 하신 일이 사라집니까. 절 어여삐 여겨주신 열흘이 없던 것이 됩니까.”
“그날들은 죄 거짓이었다!”
“제겐 그보다 진실된 날이 없었습니다.”
“이미 사라진 환상과 무너진 모래성에 진실 따위가 있을 것 같더냐?”
“그게 어떻게 사라진 환상이요, 무너진 모래성입니까.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요.”
손을 들어 가슴팍을 턱 짚었다.
“전하께서 살린 목숨이, 당신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찌 허망한 환상과 모래성에 빗댄단 말씀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