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8화
5황자가 목을 축이길 기다렸다 물었다.
“전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어냐.”
“전하의 이름자는 어떻게 되십니까.”
“여태 무례함을 보아 넘겼더니 한도 끝도 없구나. 정녕 경을 치고 싶으냐.”
“싫으시다면 다시 묻지 않겠습니다.”
그가 멈칫했다. 빈 찻잔이 탁, 하고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나는 묵묵히 있었다. 한참 후,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무륜(武掄)이다.”
여율령에 의해 다듬어지긴 했으나 나는 본래 천것이라 5황자처럼 아름답고 고아한 칭양은 할 줄 몰랐다. 나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뱉었다.
“제가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좋은 이름이십니다.”
<1장 신이화 완결>
그 해는 내가 열다섯이 되던 해였다.
장성한 다른 형제들의 암투가 절정에 달한 해이기도 했다. 열흘에 한 번은 대대적인 암습이 있었고, 그때마다 무수한 가신이 죽어나갔다. 황제는 모든 것을 묵과했다. 이 나라의 가장 귀한 혈통이라는 자부심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핏줄에 대한 경멸뿐이었다.
매일매일 죽지 않기 위해 애쓰던 어느 날. 초승달도 뜨지 않은 그 어느 밤, 다수의 복면인이 내 침소를 습격했다. 옆엔 아직 어렸던 여동생이 있었다.
가신들의 비명과 어렴풋한 피 냄새에 다급해져 방에 있던 커다란 자개함에 여동생을 넣었다. 아이는 불안해했으나 울지도 않았고, 생떼를 부리지도 않았다. 연치 어려도 황궁의 아이.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받아들였다.
자개함의 뚜껑을 닫고 자물쇠로 잠갔다. 열쇠는 넣은 채로 부러뜨렸다. 차라리 이편이 더 안전했다. 나는 그대로 검을 쥐고 뛰쳐나갔다.
내 여동생은, 그렇게 어른이 되지 못했다.
2장 화톳불
‘금방 오실 게지요?’
항시 그를 ‘전하’라 부르던 아이가 ‘오라비’라며 울먹였다. 어린 가슴이 미어졌다. 피비린내 나는 궁중 암투에 머리만 먼저 큰 5황자가 입술을 콱 물었다.
클 거면 몸도 같이 크게 해주시지. 어찌 몸은 계속 나약하게 남겨두셨습니까. 명확하지 않은 대상을 향한 원망은 짧았다.
행동은 신속했다. 애당초 그는 무형의 신 따위 믿지 않았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순 없다는 수동적인 사상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제 눈에 보이고 제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면 무의미한 것이라 여기는 탓이다. 여느 황궁의 아이가 그러하듯이.
‘두려워할 것 없다. 예서 조금만 있으면 금방 와서 꺼내줄 것이다. 이 오라비를 못 믿느냐. 내 금방 저 무도한 것들을 다 쫓아내고 돌아올 것이다.’
‘여기 얌전히 있을게요. 금방 오셔야 합니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도 아이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내 바람처럼 다녀올 것이다.’
몸을 돌린 순간 뒤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여동생이 든 자개함을 덮친 거대한 화마가 5황자를 보며 사특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이야. 내 수연아. 망연한 부름은 불꽃에 삼켜졌다. 떨리는 손을 아무리 뻗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제 손까지 살라먹지. 제 살과 피도 전부 불태워 버리지. 불꽃은 야속하게 동생만을 잡아먹었다.
* * *
창틀에 등과 뒤통수를 대고 있던 5황자가 퍼뜩 눈을 떴다. 손안에서 미끄러진 술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로 엊그제까지 꽃샘추위가 한창이더니, 오늘은 유독 볕도 날도 따뜻했다. 잠깐 눈을 감고만 있는다는 게 술기운이 돌았는지 그만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악몽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그것은 밤낮이나 잠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겨우 선잠에 든 보람이 없었다.
5황자는 쓰게 웃었다.
“전하.”
바로 곁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5황자의 눈이 스르륵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닫힌 문을 향했다.
“그는 오늘 통째로 비번(非番)인지라 상서령의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내, 몽휼이 5황자의 뜻을 헤아려 대답했다. 그는 5황자의 어머니가 지한국에서 데려온 가신의 아들이었다.
어머니와 가신들이 지한국과의 내통 혐의로 줄줄이 잡히었던 날. 뒤집힌 것은 성도만이 아니었다. 5황자 무륜의 세상 역시 뒤집혔다.
가신들로 이루어졌던 비밀 조직은 자연히 해체됐다. 살아남은 것은 당시 개인적 임무로 지한국에 가 있었던 몽휼뿐이었다.
유폐된 5황자는 백방으로 노력하여 가신의 식솔들을 구명했다. 그리 빼돌린 이는 전부 신분을 바꾸어 먼 곳으로 보냈다. 그조차 이제는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그간 모아둔 자금 대부분을 건넸으니 지금쯤 잘 살고 있으리라, 막연한 희망을 품을 뿐이다.
“그래. 조사하라 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무륜의 곁에 남은 건 이제 몽휼 하나였다. 그가 말없이 두루마리 하나를 양손으로 받쳐 올렸다.
5황자는 창틀에 나른하게 기대어 몽휼이 가져온 보고서를 읽었다. 안에 적힌 것은 그가 아는 것과 한 치 다르지 않았다. 또 대부분 이미 아는 것이었다.
“……약관? 그럼 그 조막만 하던 것이 열다섯이었다고?”
물론 예상치 못한 오류도 있었다.
다시 평정을 찾은 5황자가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렸다. 물 흐르듯 흐른 시선이 보고서의 말미에 멎었다.
[큰형이 대성표국 살인 사건에 연루됨. 그 직후 큰형이 막냇동생을 업고 사라짐. 도망한 것으로 추정. 홀로 남겨진 아비는 보복성 구타에 의해 사망.]
두루마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음을, 5황자는 알지 못했다.
“더 알아볼까요?”
“아니. 되었다.”
몽휼에게 두루마리를 건넨 5황자가 물었다.
“너는 그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특이하긴 하나 다른 셈속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 상서령의 아들인데도?”
“예. 다른 생각이 있다면 오히려 상서령이겠지요. 비단 조사한 내용 때문은 아닙니다. 출신이 비천한 탓인지 생각과 행동이 직관적이며, 암투나 흉계에 능한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말을 조심해라.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의 그는 종 5품의 위사장이다.”
멈칫한 몽휼이 고개를 숙이며 읍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찌르륵. 창밖의 가지에 새가 앉았다. 5황자의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 새가 앉은 가지엔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곳을 황자궁으로 삼은 지 벌써 3년이건만, 창밖의 큰 나무가 목련화였다는 건 엊그제 처음 알았다. 정원을 보는 듯하여도 실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음이라.
5황자는 사시사철 냉기가 흐르는 북쪽의 감옥에서 궁 밖을 그리었다. 철 따라 바뀌는 계절의 풍경을 쫓아 말을 달리고,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별 흐르는 하늘을 보고, 넓은 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는 바다에 발을 담갔다.
전부 제 어미가 원하던 것들이었다. 그걸 3년 내내 되뇌었다. 이젠 그것들이 어미의 숙원인지, 자신의 숙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계획은 어찌하시렵니까.”
몽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5황자는 이미 이곳에 없어야 했다. 결행일은 엊그제. 나무에 매달린 위사장을 두 번째로 목도한 날이기도 했다.
‘오늘 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난다.’
설레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하여 창을 여니 위사장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5황자는 놀라서 그대로 굳었다.
반면, 위사장은 5황자를 가만히 보다 그가 별다른 말이 없자 몸을 틀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래. 이젠 뭐 놀랍지도 않았다.
‘또 신이화를 따느냐. 이제 기침도 멎었거늘.’
‘목련은 이미 다 만개하여 이젠 신이화가 더 없습니다.’
‘그럼 어찌해 나무를 타고 올랐느냐.’
위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슬금슬금 나무를 내려와 은근슬쩍 도망치려 했다. 맹랑하다 못해 아주 대담했다.
‘어딜 가느냐. 내 하문하지 않느냐.’
어린 위사장은 평소와 달리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어물거렸다. 높으신 분께 감히 망설을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도 없어 퍽이나 난감하외다. 듣지 못한 속내가 훤히 읽혔다.
‘어허. 대답하래도.’
‘……처음엔 신이화를 핑계 대려 하였는데, 오른 후에 보니 만개하여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신이화를 핑계 대려 하였다? 결국 신이화 때문도 아니라는 뜻이구나. 그럼 대체 나무는 왜 오른 것이냐?’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린 위사장은 목까지 새빨개져선 한마디만 던지고 도망하였다.
‘게서 기다리고 있다 보면, 전하께서 창을 여실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5황자는 제 안에서 무언가 삐거덕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움직일 리 없는 것이고, 움직여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5황자는 당혹감에 망부석이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저문 후였다. 계획은 자연히 다음으로 미뤄졌다.
한숨지은 5황자는 이화가 마치 간을 보는 짐승 같다 생각했다. 저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열 걸음 뒤에 있고, 또 돌아보니 바로 발치에 있는 그런 짐승. 동구 밖을 알짱대던 것이 어느새 집 안마당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어서 새 시일을 정하셔야 합니다. 더 늦어지면 계획 자체가 틀어질지도 모릅니다.”
몽휼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이미 생각해 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어찌해 입이 떨어지질 않는가. 몽휼이 답답한 듯 재차 간언했다.
“적어도 황제가 죽기 전엔 떠나야 합니다. 혹시 그가 죽기라도 하면 탈출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