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6화
당도한 곳은 내가 아침 수련을 하는 뜰이었고, 5황자의 처소 창이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으슥한 곳에 선 5황자가 나를 돌아봤다.
“대체 뭐 하자는 것이냐.”
“예?”
“직접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듯하니 그냥 대놓고 묻겠다. 내게 접근한 목적이 무엇이냐. 뭘 위해 나의 위사장을 자처하였나.”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은혜 갚는 이화 이야기는 아주 잘 들었지. 네가 5년 전에 쪼르르 달려왔다면 믿었겠지만, 지금의 넌 여씨 가문의 후계자다.”
검은 눈이 의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완고한 태도였다.
나는 난감함에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무얼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5황자는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다. 요 며칠 내게 보인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짐작 가는 부분이었다.
자, 이제 무어라 답할 것이냐. 벽을 친 황자가 나를 응시했다.
흑린 같은 눈을 마주하다 슬쩍 웃었다. 내 웃음을 본 5황자의 눈이 흔들렸다. 돌풍에 스친 호수의 표면처럼 눈동자에 잔물결이 일었다.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평이하던 심장이 널을 뛰었다. 불쾌한 듯 기꺼우며, 고요하고 격렬했다. 5년 전의 그때와 같았다.
그를 알게 된 직후의 욕망은 퍽이나 단순하였다. 좋다. 좋다. 좋다. 마냥 그가 좋았다. 그저 곁에 계속 있고 싶었다. 무릎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당과를 받아먹으며 잘 먹는다 칭찬도 듣고, 엉덩이를 도닥임받으며 그렇게.
영원히 어린애로 있어도 좋다 생각했다. 열다섯이 아니라 다섯 살이 되어도 좋으니 그대로만 있고 싶었다.
그때도 불가능했으나, 이리 장성한 지금에 와선 결단코 이룰 수 없는 원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랜 날을 고민했다. 고민의 끝에 나온 방법은 욕망의 골자를 그대로 두고 방향성만 달리하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이룰 수 없다면 비슷하게나마 이루면 될 일이다.
해서 5황자의 곁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깊은 충정으로 그의 뜻을 행하는 검이 될 것이라, 그리 결심하였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은 여율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괜찮겠느냐?’
‘무엇이 말입니까.’
‘고작 그 정도에 만족할 마음으로 보이지 않아 그러한다.’
‘제 마음이 만족하는 게 중요합니까?’
여율령은 크게 웃었다.
‘중요치 않다.’
그러곤 덧붙였다.
‘지금 당장은 잔잔해 보이는 그 마음이 넘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불변하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 마음은 끝까지 고요할 것입니다.’
‘확실히 연치가 어려 그러한가. 아니면 아직 애달픈 가슴앓이를 해보지 못하여 그러한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고 쉽게 장담하는구나.’
제 몸처럼 항시 쥐고 있는 섭선이 펼쳐졌다. 여율령이 그 너머로 눈만 내밀었다. 얇게 접힌 눈이 나를 비웃는 듯하였다.
‘자신의 욕망을 우습게 보지 말거라.’
왜 하필 지금 그의 첨언이 기억나는 것일까.
“목적은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은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5황자 전하를 곁에서 보필하는 것입니다.”
한 점 흐림 없는 진심이었다. 그날. 그 열흘에 그것은 정해졌다.
5황자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가 주춤거리며 발을 물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짐이 안타까웠으나 감히 잡진 못하였다. 5황자가 뭔가 말할 듯이 입을 벌렸다 그대로 다물었다. 뭍에 던져진 생선처럼 몇 차례 그리하더니 곧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네 직위를 해제하겠다. 당장 어디로든 사라져.”
“설령 전하의 명이시라도 그는 따를 수 없습니다.”
품 안으로 손을 넣어 항시 보물처럼 지니고 다니던 칙령서를 꺼냈다. 얇은 두루마리를 후루룩 펼치자 맨 아래 찍힌 황제의 직인이 드러났다.
“신 여이화,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잡아 여기 있습니다. 폐하께선 제게 5황자 전하의 말동무를 하며 곁에서 이 황궁에 대한 일을 배우라 하셨습니다.”
“감히 뉘 앞이라고 망설을 하느냐. 그분께서 그러실 리 없다.”
“제가 어찌 감히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다르게 고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었다. 나는 진실만을 말했다. 게다가 손에 든 칙령서가 그 말을 뒷받침하니 실로 당당하였다.
“하아.”
한숨을 쉰 5황자가 말을 말자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체념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정처 없이 걷는 걸음이 올바르다. 무예를 익힌 자의 걸음걸이였다. 지독하던 술 냄새가 오늘은 나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다행이다. 축객령에 심장은 아직도 벌렁거렸으나 안도만은 진심이었다.
5황자는 그날 이후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칙령서가 있으니 쫓아내긴 요원하다 체념했는지도 모른다. 대신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무시했다.
나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또한 내가 뭘 해도 신경 쓰지 않으신다는 점을 역이용하였다.
“전하, 보십시오. 탱자나무 가지에 때까치가 앉았습니다. 입에 개구리를 문 것을 보니 정말 봄이 온 듯합니다. 북궁에도 어서 꽃이 피면 좋을 텐데요. 아직 벚꽃도 반밖에 피지 않았더이다.”
“전하, 현판을 새로 달았습니다. 보이십니까? 남은 방들의 청소도 끝나가고 연못은 내일쯤이면 다 정리될 겁니다. 참, 연못엔 비단잉어를 몇 마리 풀어 키우심이 어떠십니까. 아니면 연못이 넓으니 작은 붕어를 풀고 청둥오리를 가져다 두는 것도 좋겠습니다.”
“전하, 오늘은 어디로 나가시렵니까. 요 근래 처소 밖으로 나오는 날이 늘어 소신,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이왕 이리되신 김에 술도 좀 줄여보심이 어떠십니까.”
“……원래 그리 말이 많으냐?”
옛말에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5황자는 딱 열흘 만에 입을 열었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입을 연 것에 가까웠지만, 나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다.
“아니요. 말보단 침묵이 좋습니다.”
내 대답에 5황자는 황당해했다.
“그럼 왜 나한테만 말이 많으냐?”
“5년 내내 꿈에서만 그리어왔으니까요. 이리 다시 말을 나누는 날을 말입니다. 대답이 없어도 듣는 분이 전하시라 절로 말이 나옵니다.”
5황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별다른 반응도 없었다. 그저 소맷자락 아래로 늘어진 그의 손끝이 살짝 안으로 말린 것을 우연찮게 봤을 뿐이다.
아마 그 이후일 것이다. 5황자가 종종 내 말에 대답을 하게 된 것이. 하나, 노력의 보람도 없이 곧 말수를 줄일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날이 아직 춥습니다. 오늘 새벽엔 서리가 내렸더군요. 의복을 단단히 하십시오.”
“네 상관할 바, 콜록, 아니다. 콜록.”
4월의 첫날. 황자는 가벼운 고뿔에 걸렸다.
몇 번이고 헛걸음하여 궁의 의원을 한 명 데려왔다. 염소수염을 단 전형적인 간신배상이었다. 사람을 외견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리 생각했으나 놈은 5황자보다도 나를 향해 손바닥을 비벼댔다.
속이 끓었으나 급한 건 이쪽이라 아쉬운 대로 진맥을 보게 했다. 그런데 지어준 약첩을 보니 죄 싸구려 약재로, 저잣거리에선 잡초로 취급하는 물건뿐이었다.
나는 곧바로 출궁하여 여율령의 저택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나를 보고 식구들이 반가움을 표했으나 그보단 볼일이 더 급했다.
지체할 것 없이 세간에 눌러앉은 의원을 둘러메고 5황자 궁으로 돌아왔다. 서책을 보다 봉변을 당한 노인이 어리둥절했으나, 세상 해탈한 낯의 5황자를 보더니 바로 상황을 이해하였다.
5황자가 한숨을 쉬었다.
“황족의 몸은 궁에 속한 의원들만 볼 수 있다.”
“그럼 이 의원을 황궁의로 만들면 해결되는 문제인 겁니까?”
“…….”
5황자는 순순히 진맥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기력이 쇠하여 그렇습니다. 제가 지어드리는 약을 달포 동안 드십시오. 술도 줄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의원이 지어준 약은 내가 손수 달여 내왔다. 5황자는 의외로 순순히 받아먹었다. 표정을 보니 단순히 피곤함을 피하려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어쨌든 약만 먹으면 되는 것이라 나는 수줍게 웃으며 당과를 내밀었다. 기묘한 표정이었으되, 5황자는 그 또한 잘 받아먹었다.
제대로 낫지 않으면 이번엔 금성 내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을 데려오겠다 으름장을 놓은 보람이 있었을까. 방 안을 뒹구는 술병이 줄었다. 덕분에 몸은 많이 나아졌으나 저놈의 기침이 문제였다.
벌써 닷새가 지나고 4월도 초순이거늘 도라지에, 배에, 기침에 좋다는 건 다 달여 먹여도 차도가 없었다.
하도 답답하여 흑월에게 상담을 하자 그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혹 도련님 탓이 아닌가요’ 했다. 절로 눈이 뾰족해졌다. 재차 난감해한 그가 곡해하지 마시라며 연유를 설명했다.
기침하는 환자는 말을 많이 하면 아니 된다. 그런데 같이 있는 상대방의 입이 가볍다면 자연히 환자도 대답을 위해 말을 많이 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그 말을 듣고 요 근래를 되짚어봤다. 5황자가 나를 무시하던 것은 이미 옛적의 일이니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흑월의 말이 맞았다.
이후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답지 않게 조신하고 무뚝뚝한 척을 하며 근엄한 위사장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필요한 말 외엔 하지 않았다. 근래 산책에 맛 들인 황자가 처소를 나서면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런데 이제야 조용해졌다며 좋아해야 할 5황자의 반응이 이상하였다. 첫날은 이것이 뭘 잘못 처먹었나 하였고, 둘째 날은 계속 나를 힐끔거렸으며, 셋째 날은 아주 기분이 저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