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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화 (5/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5화

탁자 위에 찬을 하나하나 옮겼다. 수저도 정갈하게 놨다. 다 끝낸 후엔 자연스럽게 그 옆에 시립했다. 5황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여기 오고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그 또한 내 기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미음 다 먹거든 약도 먹어야 한다.’

‘잘 먹으면 약과를 주마. 아니면 엿이 좋으냐?’

‘옳지. 그래. 잘 먹는구나.’

‘착하다.’

물에 띄운 꽃잎처럼 아스라한 기억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수치도 모르는 마음이 흔들렸다.

“뭐 하는 놈이냐.”

기억과 똑같은 목소리가 냉정하게 일갈했다. 두둥실 떠다니던 마음이 한순간 가라앉았다.

알아보지 못하였구나.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나 또 그만큼 내가 잘난 사내로 자라 그런 것이라, 공허한 말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신, 여이화라 합니다.”

고작 이름을 말하는데 목이 멜 뻔하여 얼른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뭐 하는 놈인지를 물었다.”

5황자는 이름을 듣고도 날 알아보지 못했다.

“……제 이름을 듣고도 짚이는 바가 없으십니까.”

“내가 네깟 것의 이름을 알아야 한단 말이냐.”

“저는 5황자 전하의 위사장입니다.”

“내 거느린 위사가 없거늘. 거느리지도 않은 위사들의 장이라. 하긴 허수아비 같은 나를 지키는 사람이니 허울뿐인 직위가 딱이구나.”

“그 어인 말씀이십니까. 저를 낮추고 책하는 건 괜찮으나 스스로를 낮추진 마십시오. 그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전하는 지엄하고 지고한 분이십니다.”

아래로 내린 주먹이 꽉 쥐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잘못된 상황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이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당연히 이렇겠지, 라고 5년간 여율령의 밑에서 자란 머리가 5년 전의 무구한 나를 비웃었다.

“지엄하고, 지고하다?”

5황자가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 박장대소했다. 고운 머리칼이 그를 따라 춤을 췄다. 한참 웃던 그가 중간부터 기침을 토했다. 의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알 수 있을 만큼 속이 곪은 기침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5황자는 받지 않고 그대로 잔을 쳐냈다.

벽에 부딪힌 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 소리가 가슴에 와 박혔다. 몸이 자라는 동안 조금도 자라지 못한 마음에 상처가 생겼다.

“나가라.”

“…….”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발치를 노려보며 자개함이 열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쏟아지는 빛 아래서 그가 나를 보듬어 올리던 순간을 상기했다.

괜찮다고, 이제 다 괜찮다고 하던 목소리가 들리자 5년 후의 나도 괜찮아졌다. ‘저는’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는 본래 서막주(州)의 작은 고을에 살았습니다. 평민이라 성이 없어 이름뿐인 ‘이화’였고 아명은 ‘소목련’이었죠. 둘 다 어머니께서 지어주셨습니다. 당신께선 신씨 성을 가진 몰락한 귀족가 출신이셨는데, 서녀라 무두장이에게 시집을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 막냇동생을 낳다 유명을 달리하셨죠.”

5황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려보는 기세가 어디 계속 지껄여 보라는 듯했다.

“무두장이는 5년 전, 기근의 마지막 해에 저를 한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상인은 저를 궤짝 같은 자개함에 넣고, 바깥에서 자물쇠를 잠근 후 그대로 열쇠를 부러뜨려 버렸죠. 그 안에서 저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처음으로 5황자의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 무심하던 눈에 한순간 빛이 서렸다 사라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병사들이 근처까지 왔다가 그냥 갔을 때, 죽음이 제 머리 위에 손을 얹은 것을 느꼈습니다. 이대로 짧고 한 많은 생이 끝나는구나. 그렇게 다 포기했을 때, 누군가 죽음의 손을 뿌리치고 절 구했습니다. 헌앙한 풍모를 가진, 천신 같은 분이셨죠.”

내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그다음은 5황자도 잘 알 것이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기껏 내온 조반상이 다 식을 때까지도 5황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아래로 수그러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무 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도 온 신경은 5황자에게 가 있었다.

“어른이 됐구나.”

고개를 확 들어 그를 봤다. 처연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짓밟히듯 구겨졌던 기대감이 같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알아보시겠습니까. 예, 접니다. 당신이 안고 다니던 그 아이가 맞습니다. 터져 나오려던 모든 설운 말이 그의 냉담한 표정에 막혔다.

“어렵게 어른이 됐으니 그때 일은 잊고 이제 네 갈 길 가거라.”

그게 끝이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국 나온 건 차가운 축객령이었다. 허망하고 허무한 결말이었다.

* * *

어떻게 방을 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후 며칠은 계속 멍한 상태였다. 조반상은 다시 궁인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나는 망부석처럼 처소 앞을 지켰다. 근무 시간이 끝나면 5황자 궁에 배정받은 방에서 짧은 잠을 청했다.

정신을 차린 건 사흘 뒤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침 수련을 재개하기로 했다. 수련 장소는 5황자의 처소 앞. 그의 창문이 보이는 정원의 구석이었다. 술을 마시는 5황자의 시선이 틀림없이 닿았을 자리다.

이제 3월도 끝나가건만, 워낙 응달지고 추운 탓에 여태 덜 녹은 눈을 발끝으로 쓸었다. 어스름한 남빛 하늘 아래서 기감을 끌어 올렸다. 아무도 없다는 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여율령의 저택에선 훈련 장소에 어떤 시간에 가도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은 그의 사설 부대인 ‘암묵단’의 단원이었다. 활동할 때 쓰는 복면은 없었으나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자주 부딪힌 것은 흑월이었다. 그 또한 나만큼이나 ‘무’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당연히 마음도 잘 맞았다. 서로 간의 실력 차가 줄어든 후론 거의 매일 아침 대련을 했다.

나는 눈을 감고 흑월을 떠올렸다. 그의 검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에 걸린 달과 같았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순간 눈을 깜박이면 하얗게 빛나는 검신이 바로 눈앞에 와 있곤 했다.

감았던 눈을 떴다. 앞에는 내가 만들어낸 흑월의 잔영이 있었다.

나는 가상의 흑월과 대련을 펼쳤다. 그와 검을 부딪치는 동안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이 밝았다. 음울한 북쪽 궁엔 아침 해도 잘 들지 않았다.

“누가 감히 내 방 창문 앞에서 새벽부터 푸닥거릴 하나 했더니.”

불현듯 날아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꽉 닫혀 있던 창이 어느새 열려 있었다. 창틀에 걸터앉은 5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기척으로 그렸던 모습 그대로였다. 당황스러웠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아침 수련을 다 봤을 거란 생각에 얼굴이 홧홧했다.

“죄송합니다. 혹 제가 전하의 수면을 방해하였습니까.”

“됐다. 원래도 잠이 없는 편이니. 그보다 누구와 대련했지?”

과연 금국 제일의 무인으로 이름 높으신 분다웠다. 그는 내가 가상의 인물과 한바탕 대련을 벌인 것까지 정확히 꿰뚫어 봤다.

“흑월이라고, 제 검술 스승 중 한 명입니다.”

“스승 중 한 명이라. 과연 상서령의 아드님이로군.”

존귀하신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 저리 말하니 비꼬는 걸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런 의도였을 것이다.

나는 겸허하게 검을 내렸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양자입니다. 5년 전 그때 당신에게 구명 받은 목숨을 그분이 거두어주셨습니다. 전하께도 그렇지만, 상서령께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지요.”

“……빌어먹을 영감탱이. 좋은 집을 알아봐 달라 했더니 옳다구나 가로채 삼켰군.”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예?’ 하고 되묻자 그가 대답 없이 재차 빈정거렸다.

“이제 보니 주인을 둘 가진 개로구나. 구명한 것은 나지만 거둔 것은 상서령이니. 그래, 누구의 은혜가 더 크더냐?”

영 묘한 기분이었다. 입양 간 아이에게 낳은 정이 크더냐, 키운 정이 크더냐 다그쳐 묻는 친어미 같았던 탓이다. ……아니다. 착각이겠지. 저 냉엄한 목소리 어디에 그런 좀스러운 마음이 있겠나.

“어찌 대답이 없느냐. 이 내가 묻지 않느냐.”

“하문하시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려울 것 없다. 단순한 문제다. 어느 은혜를 더 크게 느꼈는지 답하면 되는 것이니.”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제가 전하께 입은 은혜는 단순히 구명의 은혜라며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제가 상서령께 입은 갚을 수 없는 은혜라 함은, 저를 거두어 이렇듯 전하를 만나게 해준 은혜를 말함입니다.”

결국 내가 입은 모든 은혜는 당신께로 이어지노라, 나는 그리 대답했다.

“…….”

5황자의 입이 다물렸다. 이제 완연히 떠오른 해가 희미하게 그를 비추었다. 가느다란 빛줄기 아래 드러난 그는 심히 무표정했다. 혹은 너무 복잡하여 도무지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탕! 방 안쪽으로 내려간 그가 창을 닫았다. 굳게 닫힌 창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 * *

무르익은 춘삼월이었다.

온 황궁에 꽃봉오리가 움텄다. 같은 황궁 안임에도 유독 봄이 느린 5황자궁에도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나와 5황자 사이에는 아직도 찬바람이 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5황자를 보필했다. 드물게 그가 처소를 나오는 날이면, 들썩이는 마음을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한 척 뒤를 따랐다.

5황자는 내가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설움이 없다면 거짓이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가슴이 지끈하였다.

해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하고픈 말이야 당연히 많았다. 어찌해 나를 내치시나. 5년 전에는 왜 말도 없이 두고 가셨나. 왜 나를 보아주지 않으시나. 그 모든 의문을 속으로 억눌렀다.

5황자의 가슴에 있는 것은 나 따위가 앓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상처가 거기 있었다.

벌써 5년이었다. 나는 기다림에 익숙해졌고, 시간은 많았다. 아직도 곳곳의 응달에 눈이 남은 이 북궁에도 어쨌든 봄은 왔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일이었다.

잘 걷던 5황자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넋 놓고 따른 것이 들통 났나. 긴장하여 사위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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