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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화 (4/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4화

여율령은 날 데리고 장으로 향했다. 한참 걷기만 하던 그가 멈춰 선 곳은 왈패 무리가 있는 곳이었다.

설마 저 왈패 무리 틈에 나를 던지려 하나. 두 손을 묶인 채 던져진다 해도 저 정도는 식후 운동감도 되지 않는데. 눈을 가늘게 뜨자 여율령이 왈패들을 턱짓했다.

“자세히 보거라.”

그의 말대로 자세히 봤다. 그들은 누군가를 죽도록 패고 있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뒤편에는 소년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가 억센 팔에 잡혀 비명처럼 제발 그만두라 소리치고 있었다.

하나 그런다고 저 무작스러운 것들이 들을 리가. 울음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퍽 안쓰럽다 여기며 왈패 무리 쪽으로 발을 뗀 찰나.

“네 이놈들!”

귀가 쨍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근엄한 표정으로 노호를 터뜨린 여율령이 보였다.

“대낮에 무슨 짓들이냐. 당장 그만두고 꺼지지 못할까!”

왈패 무리는 우리 쪽을 보더니 멈칫하여 줄행랑쳤다. 소년을 보듬어 안는 소녀를 보며 여율령이 물었다.

“저 왈패 무리가 소녀의 말은 무시하고 내 말은 들은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느냐.”

너무 당연한 걸 물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함정이 있나 고민하는 사이 여율령이 답을 내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힘없는 자의 말은 짖는 것이고 힘 있는 자의 말은 지엄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를 가축처럼 잡아끌던 아비가 떠올랐다. 그때 내가 하려던 말은 얄팍하고 힘없는 것이었다. 하면 지금은 어떠한가. 그 질문에 답을 주듯 여율령이 섭선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는 저 왈패 무리와 드잡이하려 하였지. 그는 무의미한 짓이었다. 네가 소리쳤어도 저것들은 물러났을 거다.”

나는 나를 내려다봤다. 흑피 공단화, 비단에 금 자수가 놓인 옷. 어딜 어떻게 봐도 귀한 집의 금지옥엽이다.

“힘을 가진 자는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보다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말에 따라야 하는 게 세상의 섭리지. 그리고 이 법칙이 그 어느 곳보다 강하게 적용되는 곳이 바로 황궁이다.”

그제야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여율령의 섭선이 느리게 부채질을 했다.

“이 나라를 다 뒤져도 고개 숙일 상대가 다섯이 안 되던 황자 전하셨다. 그런 분이 개처럼 전장을 떠돌아다니다 유폐 당하였지. 너는 그 사실을 뇌리에 새겨야 할 것이다.”

“제가 구할 것입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폐하께선 말 한마디로 능히 성 하나둘쯤 멸하실 수 있다. 너는 네 한 몸으로 성 하나둘쯤 구할 수 있느냐?”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나를 흘겨보았다. 가슴에 찬 바람이 부는 듯했다.

“네 5황자께 입은 은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나 언감생심 다른 마음을 품지 말거라. 이 나라에서 그분을 구할 자는 아무도 없음이라.”

“적어도 마음은 구할 수 있을지 모르잖습니까.”

아득바득 대답하자 여율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한 소리를 하는구나. 역시 핏줄은 못 속이겠다.”

“제가 천것이라는 소릴 하고자 하십니까.”

“더러움이 묻지 않았다는 뜻이다. 칭찬이지.”

웃음을 거둔 여율령이 섭선으로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고작 섭선인데 천 근이라도 얹어진 것 같았다.

“그래. 강렬한 인연은 쉬이 잊히지 않는 법이지. 한 번은 뵈어야 네 성에 찰 것을 알기에 그냥 두었다. 그러니 입궁하거든 조용히 있거라. 부러 한직을 찾아간 철없는 도령인 척, 그리 말이다.”

여율령은 더 볼일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뒤로 다가온 흑월이 슬쩍 나를 찔렀다. 돌아보자 그가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펼친 손에는 당과가 놓여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모를까, 흑월이 하는 애 취급은 싫지 않았다. 그가 진정 나를 생각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대로 허리를 숙여 손바닥의 당과를 날름 먹었다. 손바닥이 흠칫했으나 물러나진 않았다.

“고맙다.”

단맛이 혀에 퍼졌다.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 * *

3월 15일. 내 첫 입궁일이었다. 궁의 정문을 넘자마자 곧바로 북을 향했다.

5황자가 유폐된 궁은 북쪽의 구석에 있었다. 후궁의 무덤이라 불리는 냉궁이 거기서 멀지 않았다. 볕도 잘 들지 않고 다니기도 불편한 소궁. 그가 머무는 곳이 곧 황궁에서의 위치를 대변했다.

폐위되진 않았다. 그때의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무혐의로 끝난 것도 아닌 탓이다. 황제는 그에 관해 어떠한 조사도 명하지 않았다. 5황자는 그렇게 3년 동안 북궁에 박제되었다.

이끼가 끼고 군데군데 무너진 담벼락 사이, 반원형으로 뚫린 통로를 지나 뜰로 들어섰다.

시선이 모이는 건 익숙했다.

지난 5년간 여율령의 집에서 잘 먹고, 잘 배우고, 잘 성장한 덕에 나는 어디 내놔도 모자람은 없다 할 사내가 되었다. 무예는 금국을 통틀어도 손에 꼽았다. 문에도 제법 조예가 있었다. 무엇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상서령의 외동아들이었다.

하나 지금 모인 시선들은 평소 받던 것과 달랐다. 나를 보는 궁인들은 하나같이 불안에 젖어 있었다.

허둥거린 그들이 급하게 읍했다. 손에는 걸레며 빗자루며 온갖 집기가 가득했다. 대충 알 만했다.

예상대로 5황자 궁은 심히 누추했다. 부서진 기와지붕에 풀이 자라고 현판은 기울었다. 고개를 숙이면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가 보이고, 고개를 들면 사방에 처진 거미줄이 눈에 들어왔다.

낡고 지저분한 내부가 오랜 방치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여태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분노보단 어이가 없었다. 유폐되었다지만 그래도 귀하디귀한 황통인 것을.

잠깐 밀려났던 분노가 스멀거렸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화를 삭였다.

이제 내가 왔으니 이런 방만한 행태는 끝이다. 싹 갈아엎을 것이다. 관련된 자들은 불러다 엄히 문책하고, 그분께서 응당 받아야 할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리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5황자의 처소를 찾았다.

그의 방은 냉한 북궁에서도 후미진 곳에 있었다. 인기척이라곤 없이 무덤가에서나 느낄 법한 스산함뿐이다. 문간에는 다 먹은 아침 조반상이 방 밖으로 내어져 있었다.

미간이 꿈틀했으나 참았다. 따지려면 한도 끝도 없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바꾸어 나가야 할 일이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각오는 충분히 했다. 기다림도 이만하면 충분하였다.

그럼에도 떨리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당과를 내밀며 세상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하였던 따뜻한 눈빛이 떠올랐다. 지난 5년간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서서히 흐려졌던 그것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다시 선명해졌다.

“5황자 전하. 신 여이화, 5황자 전하의 위사장을 위임받았나이다.”

안은 조용했다. 분명 본궁에서 나보다 먼저 칙령서가 당도하였을 터인데 이상하였다.

“전하?”

다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아니다. 조반이 내어져 있으니 오수에라도 드신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후 다시 오겠나이다’ 할 수 없었던 건 듣고도 믿을 수 없었던 북궁에서의 그의 생활이 머릿속을 스친 까닭이다.

“전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술 냄새가 훅 끼쳤다. 미간을 찌푸리다 바로 앞에 선 황자를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동곳과 영웅건으로 늘 단정했던 머리칼이 풀어 헤쳐져 허리에 닿았다. 그게 가장 큰 변화일 만큼 그는 변한 것이 없었다. 키가 좀 더 크고, 덩치도 더 좋아진 것 같았으나 그게 다였다. 아니, 뺨은 좀 해쓱한가. 눈 밑도 퀭하구나.

그래도 그가 틀림없었다. 나리였다.

변한 것은 나였다. 까마득하게 올려다봐야 했던 고개를 이젠 조금만 젖히면 되었다. 곯아서 뼈와 가죽뿐이던 몸에는 살과 근육이 붙었다. 이리 완연한 청년이 되어 그를 다시 보자 가슴이 사르라니 젖었다.

그러나 재회에 감격한 것은 나뿐이었다. 5황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까맣고 무심한 눈이 나를 향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기품과 위엄이 서린 시선이었다.

나는 서둘러 부복했다.

“이 나라의 홍복을 뵙습니다. 저는 오늘부로 전하의 위사장이 된-”

스슥- 탁.

……탁?

“……전하?”

고개를 들었다. 순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장지문은 열린 적이 없다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 * *

5황자는 그 이후 한 번도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밖에 우두커니 서서 애만 끓이며 그의 인기척을 읽었다.

찰나 맡은 지독한 술 내음은 환상이 아니었다. 그는 항시 술에 절어 있었다. 낮이고 밤이고 손에서 술병을 놓지 않았다. 탁자에서도 마시고, 침상에서도 마시고, 방을 빙빙 돌면서도 마셨다.

문득 5년 전 그의 품에서 알싸한 향을 맡았던 게 기억났다. 그땐 그저, 마냥 좋아서 생각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술 냄새였다.

‘하지만 내가 보는 앞에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으셨는데.’

거참 이상하였으나 당장 속사정은 알 도리가 없었다.

5황자가 가장 좋아하는 술자리는 문 반대편에 자리한 격자창의 창틀이었다. 오후 나절 께느른히 걸터앉아 수림에 가까운 안뜰을 몇 시진이고 응시하는 5황자를, 나는 기척으로나마 훔쳐보았다.

그러길 열흘째.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반상을 내오던 궁인의 손에서 상을 낚아챘다.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대뜸 제 것을 빼앗겨 놀란 궁인에게 살포시 웃어주었다. 넋이 빠진 그녀를 두고 장지문을 열었다. 나를 본 5황자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5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정중하게 읍했다. 그는 다분히 질린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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