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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화 (3/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3화

여율령은 내게 여섯의 교육 담당을 붙였다. 궁에 들어갈 만큼만 하라더니 다 거짓부렁이다. 망설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이 곧 망설이었다. 문과 무는 물론이고 예절이나 가무에 대한 것도 철저히 교육받았다.

5황자에 대한 걸 하나씩 알아가며 겸사겸사 여율령에 대한 것도 알아갔다.

집의 규모와 세간을 봤을 때 예상하긴 했으나 그는 내 생각보다 더 높으신 분이었다. 3성 6부의 3성 중 상서성의 수장을 맡은 자로, 궁에선 ‘상서령’으로 불린다 했다.

그게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 아는 데 2개월이 걸렸다. 과거의 나였으면 그의 집 하인에게조차 굽실거려야 할 정도로 엄청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비밀이라며 내게 속살거리길, ‘나머지 중서성과 문하성의 현 수장들은 무능하다. 하여 그네들 일까지 거의 다 내가 하고 있지. 어떠냐, 참으로 대단하지? 아버지라 부르고 싶어지지 않느냐?’ 했다.

다소 높아졌던 신뢰도가 큰 폭으로 하락했다.

교육 담당인 문관은 내가 총명한 편이나 흥미가 없는 건 진전이 느리다 한탄했다. 특히 고관대작 나리들의 지위나 귀족들의 이해관계는 질색이라 몇 주가 지나도 공부가 제자리걸음이었다.

반대로 ‘황족의 계보’와 같이 조금이라도 5황자와 관계가 있는 것, 그에 대한 사소한 기록이라도 있는 것 등. 흥미가 있는 분야는 훨씬 빠르게 배우고 익혔다.

그리고 내가 가장 큰 흥미를 보인 것은 무(武)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검은 내게 5황자를 떠올리게 하였으니까.

다행히 적성에도 맞았다. 내 스승이었던 무관은 나를 가르친 첫날에 여율령을 찾아가 이 아이는 무관으로 키워야 한다 진지하게 읍했다. 여율령은 섭선을 흔들며 잠자코 듣기만 하다 그를 돌려보냈다. 대신 흑월을 불렀다. 흑월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여율령은 무예 스승에 흑월을 추가했다.

그때부터 1년은 그간 축난 기력을 보강하고 기본적인 몸을 만들었다.

2년째엔 몸의 성장과 함께 무예 역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흑월 외에도 내게 붙은 무관 스승들이 하늘이 내린 기재라며 감탄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3년째엔 흑월과 비등하게 겨룰 수 있었고, 4년째엔 상서령이 초빙한 금군대장과도 합을 나누었으며, 5년째엔 황실에서 주최한 무술 경연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내 나이 약관의 일이었다.

우승하고 돌아온 날, 여율령은 큰 잔치를 열었다. 답지 않은 짓에 연유를 물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의 출셋길이 열렸는데 어느 아비가 기뻐하지 않겠느냐.”

“…….”

“왜 그리 보는 게냐. 진정 기뻐서 그런 것을. 네가 가문을 물려받을 날이 곧이라 생각하니 아주 날아갈 것 같구나.”

괜히 물었다. 가문을 물려받는다는 건 막대한 재산에, 산더미 같은 일과 문부 또한 내 것이란 뜻이다.

나는 후회하며 막걸리를 들이켰다. 세 병쯤 마셨을 때 조용히 나타난 흑월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만 마시라는 뜻이었다.

이틀 후, 황궁에서 사람이 왔다. 우승자를 치하하는 자리를 만들었으니 와서 황상을 뵙고 인사를 올리라는 칙령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라 놀라지는 않았다. 바로 준비하여 입궁했다.

황제의 앞에 읍하자 그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고개를 들라 하였다. 황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피부는 온통 주름지고 검버섯이 가득한데다 병환까지 깊었다.

당장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인데, 그래도 황제라고 매일 금보다 비싼 영약을 들이켜 진짜로 죽지는 않았다.

“상서령의 자제라 하였나.”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토록 고강한 무위를 선보인 젊은이가 충신의 아들이라니. 나라의 홍복이구나.”

대회장엔 나오지도 않아놓고 말은 잘했다.

“그럼 전통에 따라 네게 전답과 무관직을 하사하여야 하는데…… 원하는 자리가 있느냐?”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쪽에 도열한 관리로부터 옅은 술렁임이 일었다. 나 역시 놀라 황제를 보았다.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원하는 자리를 말해보라니. 어지간한 자리라면 주겠다는 속뜻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굴려 여율령을 보았다. 관모를 쓴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나를 봤다. ……확신범이었다.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5황자 전하의 위사가 되고 싶나이다.”

“뭐라?”

“오래전부터 5황자 전하를 흠모해 왔습니다. 부디 그분의 위사가 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좌중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들릴 듯 말 듯 하던 수군거림조차 멎었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으나 그저 가만히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황제의 폭소가 장내를 갈랐다.

“껄껄껄!”

황제는 가래 끓는 목으로 웃었다. 메마른 가지 같은 손이 팔걸이를 쳤다. 한참 만에 웃음을 그친 그가 용포를 크게 펄럭였다.

“상서령 여율령의 장자 여이화.”

“예, 폐하.”

“그대를 5황자의 위사장으로 임명하며 종 5품의 벼슬을 내리겠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길은 만들어졌다.

“가서 5황자의 말동무나 하며 지내거라. 그럼 황궁이 어떤 곳인지 자연히 배우게 될 것인즉, 아직 연치 어린 네겐 좋은 공부가 되겠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비틀거리며 시비의 부축을 받아 들어가는 황제의 등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수런거리는 소리가 칼바람처럼 나를 둘러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이 일었다.

여율령을 봤다. 눈이 마주친 그가 섭선 너머로 웃었다. 그가 짓는 웃음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이번엔 특히나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 * *

연 대륙은 모양이 연꽃을 닮았다 하여 연 대륙이라 불렸다. 사방은 바다였다. 이 세상에 연 대륙 외의 다른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미친 기린이 날뛰어 세상이 멸망할 뻔했다. 기함하신 상선께서 거대한 연꽃을 하계에 내렸고, 그 연꽃의 범위에 든 땅이 곧 연 대륙이었다.

그런 연 대륙엔 하나의 제국과 하나의 왕국, 그리고 다섯 개의 소국이 있다.

동쪽의 금제국. 서쪽의 지한국. 남쪽의 5국 연합이다. 본래는 금국 하나의 통일 제국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역사가 흐르며 서쪽으로 지한국이 떨어져 나가고, 아래쪽으로는 다섯의 제후들이 봉기하여 지금의 형태가 됐다.

그렇다고 금국이 쇠퇴하였냐면, 그건 아니다. 중간에 크게 휘청한 적은 몇 번 있었으되 어떤 형태로든 극복하여 본신을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기린의 재난부터 현재까지 금국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대제국으로 굳건히 군림했다.

지한국의 땅은 5국 연합의 땅을 전부 합친 것보다 컸다. 금국의 영토는 그런 지한국의 세 배였다. 하여 금국은 5국을 깔보았고, 지한국 역시 동등한 나라로 보지 않았다.

5황자의 어머니는 지한국 출신 공주였으나 끈이 떨어진 연이기도 했다. 같은 배를 타고 태어난 그녀의 형제는 지한국의 후계 경쟁에서 밀려나 죽었다. 남은 그녀는 철저히 외교의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어머니의 비극은 자연히 자식에게도 대물림됐다. 뒷배도 뭣도 없는 말석 황자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고, 그 무수한 핍박 가운데서도 가장 큰 것이 셋 있었다.

하나는 열다섯이 되던 해 후계 경쟁에 휘말려 여동생을 잃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열여섯에 군부로 내몰려 온갖 궂은일을 처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벌어졌다.

“모친인 2황비와 지한국 출신 가신들이 내통죄에 연루되었다. 그들은 급보를 받은 5황자 전하가 돌아오기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 그때 전하는 남방의 오랑캐를 쓸어내고 서쪽 지한국과의 국경을 수비하던 중이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포박되어 북궁에 유폐되었다.”

모친의 마지막을 지키긴커녕 그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였지. 나직이 덧붙인 한마디가 늦가을 서리보다 차고 잔인했다.

“한 번 패하지 않고 높아지기만 하는 위상이 눈에 거슬렸을까. 일개 황자가 병부의 신임을 얻는 것이 황상 보시기에 불안하였던 것일까. 진실은 모른다. 중요치도 않았다.”

귀가 멍했다. 내게도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처절하게 몰락한 5황자가 유폐되었다는 것과 여율령이 그 사실을 내게 3년이나 숨겼다는 거다. 5황자의 위사장으로 봉해진 바로 오늘까지도.

화를 내는 내게 여율령은 가벼운 조소를 날렸다.

“그때 알았다 한들 네가 뭘 어쩔 것이냐.”

울분을 토하던 입이 딱 다물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사서와 삼경도 구분하지 못하고 흑월의 검도 밀어내지 못하던 혈혈단신 어린애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어쩌긴요. 달려가서 구했을 겁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했다고 분이 가시는 것은 아닌지라 씩씩대며 대들었다. 여율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뒤늦게 아차 했다. 나는 여기 온 뒤로 철저히 그의 아들로서 키워졌다. 상서령의 하나뿐인 아들. 그 말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고, 가볍지도 않았다.

내 무언가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눈앞의 사내가 대단하고 높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준 것이 그이니, 앗아갈 수 있는 것도 그였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그 ‘설마’에 잡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자 여율령이 함께 갈 곳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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