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화 (2/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2화

자개함에 갇혔던 일이 꿈에 되살아나 새벽에 소스라쳐 깨면 커다란 손이 내 등을 쓸었다. 피곤하고 귀찮을 법도 한데 사내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주고 하얗게 질린 손을 주물러 주었다.

이제 다 괜찮다. 내가 널 꺼내주었지 않느냐. 보렴. 이곳은 내 처소이고, 너는 비단 보료 위에 있노라 했다.

사내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타고나길 고귀하게 태어나 목소리마저 귀하였다. 낮고 조곤조곤한 음색은 여태 자개함에 웅크리고 있던 나를 이끌어냈다. 나는 홀린 듯 게서 타박타박 걸어 나와 어느새 사내의 앞에 당도했다.

“하윽. 흐윽. 흐윽.”

뒤늦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장하다.”

사내는 다 안다는 듯 나를 안아주었다. 알싸한 향이 나는 품이 나를 폭 끌어안았다. 타인의 체온이 이렇게 따듯한 것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직 기력이 다 돌아오지 않아 사내를 따라나서는 것이 힘에 겨워도 내색하지 않았다. 손아귀에 잡히는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쩔 도리 없이 품에서 떨어져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사내는 방에서 나가지 말라 당부하고 부릴 사람 둘을 붙여주었다. 부릴 사람이라 하여도 본래 천것이라, 딱히 뭔가 말하지 않고 주는 당과를 받아먹거나 색실 공을 가지고 놀았다.

그렇게 기다리면 다급히 온 기색이 역력한 사내가 저녁 어스름을 등에 얹고 돌아왔다.

양팔을 벌리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달려가 안겼다. 일할 땐 냉엄하던 옥면이 나를 향해선 꽃처럼 활짝 피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분이 그리 웃자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 외엔 별도리가 없었다.

“전하, 이만 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곳에서 너무 지체하였습니다. 황상께서 명하신 임무가 끝난 지 벌써 열흘이나 되었습니다.”

수하가 읍하며 고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사내가 입에 넣어준 당과가 너무 달아 마냥 행복했다.

“황명입니다. 이번엔 군을 내어줄 터이니 남방의 오랑캐를 토벌하라 하셨습니다.”

사내는 그를 한 번 보지도 않았다. 그제야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내의 팔 너머로 읍한 자를 보았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 그가 말했다.

“전하, 그 아이는 그분이 아니십니다.”

“……네 지금 뭐라 하였느냐.”

그렇게 말하는 사내에게서 선뜩한 기세가 느껴졌다. 흠칫하여 어깨를 떨자 그런 기척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가 내 엉덩이를 도닥도닥했다.

“제 주인을 천치로 아는구나. 설마 내가 정말 헷갈려서 그런 줄 아느냐.”

수하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경직된 분위기에 눌려 조용히 있었다. 마침 사내가 내 입에 약과를 물려주어 그것을 오물거렸다. 삼키지 않고 몇 번이나 씹었다.

그날, 어떤 예감은 있었다.

나처럼 천하게 태어난 녀석은 최상보다 최악을 상정하는 것이 더 익숙하다. 그래서 생각은 하고 있었다. 꿈같은 날은 언제고 꿈처럼 끝날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그날이 오자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적어도 사내가 무어라 말이라도 해줄 것이라 믿은 탓이다. 울지 말아야지. 의연하게 있어야지. 절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테다. 홀로 했던 다짐이 헛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찬기밖에 없는 것이 새벽녘에 이미 침소를 나간 듯했다. 조반상을 받을 때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하는 식사는 외로웠다. 5첩 조반상을 앞에 두고 참으로 배부른 소리라 스스로의 간악함에 혀를 찼다.

상을 물리고 나니 처음 보는 사내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바로 문관이요, 하는 외견의 사내였다.

반만 틀어 올린 머리에는 청비녀를 꽂았고, 이마에는 얇고 하얀 영웅건을 둘렀다. 아무리 잘 봐줘도 서른 중반인데 나이 지긋했던 서당 어른보다도 깊은 눈을 하고 있었다. 복식은 화려하진 않으나 고급 중의 고급이었다. 사내의 뒤편으로 복면을 쓴 흑의인 셋이 따랐다.

섭선을 펼친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여 손을 움켜쥐었다.

“나이가 몇이더냐.”

“……열다섯입니다.”

“못 먹어서 못 자란 것이냐. 기껏해야 열 살이나 될까 했더니 생각한 것보단 먹었구나. 하면 이름은 무엇이냐.”

“이화라 합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그건 그대로 써도 되겠다. 하나 네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나이와 이름뿐이니라.”

심이 철렁했다. 내 아무리 무지하여도 머리는 커서 사내의 말을 이해했다. 이해한 동시에 부정하고 싶었다.

“가자.”

명령 같은 말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 붙박여 있으려니 사내가 섭선을 까닥였다.

뒤에 섰던 흑의인 중 하나가 다가와 나를 안아 들었다. 버텼던 것이 무색했다. 내 저항은 태풍에 붙들린 연과 같이 무의미했다.

축 늘어진 몸으로 안겨 가며 흑의인의 어깨 너머로 방 안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사내와 내내 함께 지낸 공간이었다. 영원 같은 열흘을 보낸 곳. 탁자의 흠, 화병의 문양, 병풍의 나비 한 마리까지 죄 기억하려 애썼다.

그것들을 기억하면 이를 배경으로 서 있던 사내까지 함께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흐윽. 흐윽.”

다 부질없었다. 나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낯선 품에 안긴 채 이제 내가 붙들어야 할 건 이 품임을 알았다. 솟구치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어 복면인의 가슴팍을 붙들고 울었다. 멈칫한 그가 뻣뻣하게 굳었다.

사내였다면 울음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나를 어르고 달랬을 것이다. 어이해 우느냐. 무엇이 너를 서럽게 했느냐. 당과를 주랴, 식혜를 주랴. 내가 어찌하면 눈물을 그치겠느냐.

야속한 사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복면인이 손으로 내 엉덩이를 도닥거렸다. 옆의 복면인이 별 해괴한 걸 보는 시선으로 이쪽을 힐금하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연히 다가온 인연은 떠나갈 때도 흔적이 없었다.

* * *

나를 데려간 젊은 사내는 ‘여율령’이라는 자였다.

그는 내가 살던 마을만 한 거대한 저택에서 살았고, 저택에서 일하는 자는 마을 사람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전답과 재산은 다 셀 수 없어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했다. 그런 대단한 분이 오늘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하였다.

“그분께서 그리하라 하셨습니까.”

내가 누굴 말함인지 여율령은 단박에 알아들었다.

“아니다. 그분은 그저 부족함 없는 집에 양자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 하였다. 그분은 널 천애 고아로 아신 것 같던데…… 혹시 모르니 일단 묻겠다. 돌아갈 곳이 있느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팔아 치운 아비가 있는 토굴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 봐야 다시 팔릴 뿐이다.

“하면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구나. 자, 아버지라고 불러보거라.”

“…….”

“왜 그리 보느냐. 나는 널 거두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그건 봐서 안다. 내가 궁금한 건 적당히 몸을 의탁할 곳을 알아봐 주면 될 것을, 구태여 양자로 들인 그의 셈속이었다.

“이런 머리와 눈이라도 말입니까?”

“색이 옅은 것이 밤하늘에 뜬 달과 같구나. 장성하면 여염집 규수들이 가슴앓이 꽤나 하겠어.”

그는 눈 하나 깜박 않고 낯 간지러운 소리를 늘어놨다. 해쓱해져 입을 다물자 그걸 어찌 곡해하였는지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나는 망설을 즐기지 않는다’ 덧붙였다.

“제게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영민하다더니 그분 말에 틀림이 없구나.”

섭선이 살랑거렸다. 사람이 아니라 백년 묵은 구렁이를 앞에 둔 것 같았다.

“있다. 하나 개의치 말거라. 내가 원하는 건 너밖에 줄 수 없지만, 내가 멋대로 가져갈 수도 없고, 네가 원한다 해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높으신 분은 말을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히죽 웃었다. 높으신 분답지 않은 경박한 미소였다.

그가 어이쿠 이런, 하며 섭선으로 입가를 가렸다.

“딱히 고민할 필요 없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난 아들이 필요하나 아들을 가질 수 없는 몸이고, 그런 내게 마침 하늘이 점지한 인연이 닿았을 뿐.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두면 된다.”

의문은 가시지 않고 깊어졌다. 그래도 더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무슨 생각이든 내겐 딱히 선택지가 없었다.

“아주 뛰어날 필요는 없다. 검이든 붓이든 궁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만 해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궁에 말입니까.”

“그래.”

“그분도 궁에 사는 분이십니까.”

“그래. 그분은 5황자 전하시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높으신 분인 줄은 알았지만 천자님의 아드님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 반응이 재미난 지 섭선 아래로 드러난 여율령의 입가가 실룩였다.

가슴이 차게 식었다. 열흘을 붙어살았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펼쳐져 있던 섭선이 깔끔한 소리를 내며 접혔다. 만면에 미소를 지은 여율령이 말했다.

“일주일 내로 글을 뗀다면 알려주마.”

나는 코피를 쏟아가며 열중했다. 그리고 나흘 만에 넝마가 된 책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성과를 시험한 여율령이 말했다.

“5황자 전하는 올해 열아홉이시다.”

생각보다 어렸다. 심지어 나와 고작 네 살 차이였다. 아직은 머릿속에 선명한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천신같이 근엄한 모습이었다.

나는 또래보다 왜소하고, 그는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큰지라. 그가 나를 어린아이 대하듯 안고 어른 것도 이해가 갔다.

“설마 그게 다입니까?”

“네가 한 것만큼의 보상을 준 것이다. 다음은 이것.”

어둠 속에서 복면인이 나타났다. 흑월이라는 이름의, 나를 안고 돌아왔던 자였다. 그가 나를 향해 짧은 목검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일주일 주마. 무관 스승에게-”

나는 여율령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다음은 예의로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