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화
서장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머리를 감싸 쥐고 아무리 끙끙거려도 알 수가 없다.
이화는 지금 ‘저와의 혼사를 위해 급히 환궁하여 황제가 된 주군’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문자로 적어 놓고 봐도 이게 뭔 말인가 싶다.
여율령이 나직이 말했다.
“정 마음에 결심이 덜 섰으면 그냥 예서 떠나거라.”
“그는…… 아닙니다.”
“그러냐.”
여율령은 더 묻지 않았다. 정확히는 더 물을 수 없었다. 그다음 순간, 범상치 않은 기세를 흩뿌리는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이화가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곤 멈칫했다. 황궁에서부터 날아온 밀영군이었다.
“밀영군? 어째서 여기에…….”
마찬가지로 이화를 확인한 그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밀영군은 가타부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더니 재빨리 이화의 팔을 양옆에서 한 짝씩 꿰어 찼다.
“응?”
그리고 그대로 낚아채 황궁으로 날랐다.
“으어어?!”
여율령이 이마에 손 그늘을 만들었다.
“대낮에 코도 베어가는 것이 금성이라지만, 설마 아들을 채갈 줄은 미처 몰랐구나.”
모르긴 개뿔!
“알고 있었지요? 상서령?!”
이미 한참 멀어진 이화가 악을 썼다. 여율령이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섭선을 살랑살랑 부쳤다.
“전혀 몰랐다.”
눈이 휘둥그레져 달려온 위중혁과 몽휼이 여율령을 지나쳐 이화를 쫓았다.
“……고 하면 망설이겠지.”
탁. 섭선이 접혔다. 그의 눈은 이제 점으로 변한 이화와 그가 어디 무작스러운 놈에게 납치된 줄 알고 기함하여 쫓아가는 두 무사에게 닿아 있었다.
<서장 완결>
그 해는 내가 열다섯이 되던 해였다.
대기근의 마지막 해이기도 했다. 열흘 굶은 사람들이 음식을 구걸하고, 마른 장작 같은 아사자가 발에 차였다.
풍족하다곤 할 수 없으나 딱히 부족함 없던 가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안고 있던 전답이 도성 제일의 부자에게 넘어갔다.
그 며칠 후, 다리가 아프던 둘째 형이 죽었다. 그럴 낌새도 없던 돌연사였다. 형의 목에는 여러 마리 애벌레를 눌러 찍은 듯 묘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우는 동생을 달래며 그를 모른 척했다. 그때 달랜 동생은 석 달 뒤 아사했다.
남은 것은 기근 전에 몸이 자라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었던 큰형과 나를 포함한 네 명의 형들로부터 먹을 걸 십시일반 양보받은 막냇동생, 그리고 날 때부터 ‘색’을 잘못 입고 태어나 손가락질받던 나뿐이었다.
그래서 상인이 마을에 온 날. 그에게 팔려가는 것이 날 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1장 신이화
“인간은 쓸모가 있어야 살 자격이 있다.”
그리 말한 아비의 억센 손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러는 당신은 어떤 쓸모가 있나. 혀끝까지 나온 말을 도로 삼켰다. 얄팍하고 힘없는 말이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낡고 해진 옷을 입은 그는 그보다 더 낡은 옷을 입은 날 어느 상인에게 팔았다. 금국에서 사람을 사고파는 것은 법으로 금지된 일이나 곤궁한 자들은 법보다 공복이 더 두려운 법이다. 그가 나를 정확히 얼마에 팔았는지는 모른다. 그만한 값을 받았는지도 알 수 없다.
아비에겐 온갖 흠을 들먹이며 내 가치를 깎아내렸던 상인은 아비가 떠나자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런 희귀한 것을 손에 넣다니. 역시 내가 재복이 있음이야.”
그는 나를 깨끗하게 씻기고 풍족하게 먹인 후, 궤짝에 가까운 자개함에 들어가게 했다.
“답답하겠지만 참으렴.”
손목과 발목이 묶이고 물주머니 하나와 떡 한 덩이가 주어졌다. 상인은 겁에 질린 나를 다독였다. 절대 소리를 내지 마라. 없는 듯 있어라. 내 말대로 하면 또 맛있는 걸 잔뜩 먹게 해주겠다.
맛있는 것.
굶주린 어린애에겐 무엇보다 큰 힘을 가진 말이었다. 나는 두려움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뚜껑이 닫혔다. 폐쇄된 공간에서 오는 본능적인 공포에도 나는 ‘착한 아이’로 있었다. 그만큼 공복은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자개함은 열리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배부르게 먹었던 것이 다 허사였다. 아껴 먹는다고 아껴 먹은 떡은 이미 소화된 지 오래다. 아껴 마신 물주머니도 어느새 다 비었다.
이젠 기력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다. 자개함인 줄 알았던 것은 나의 관이었다. 상인은 나를 목내이(木乃伊)로 만들어 팔 셈인 듯했다.
아비가 말한 쓸모가 이런 것이었던가? 아니면 반대로 벌써 쓸모가 다한 것인가? 뚝뚝 끊어질 듯 이어지던 생각이 어느 순간 완전히 멎었다. 죽음이 바짝 다가왔다. 이제 죽는구나. 이렇게 살다 이리 허망하게 죽는구나. 억울하고 서럽고 무서웠다.
그렇게 완전히 숨이 다할 순간만 기다리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흔들림이 멈춘 것을 뒤늦게 알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가까워졌다. 누군가 짐마차를 뒤지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새끼 이거 많이도 해 처먹었네.”
“햐. 이게 다 압수품이란 말이지? 나라의 곳간은 기근에도 채워지는구먼.”
두런거리는 두 사내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 있었다. 누군가 턱 하고 내가 든 자개함에 손을 얹었다.
“이 자개함은 뭐지? 크기만 보면 궤짝 같군.”
“어? 안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는데…….”
“정말인가? 난 안 들리는데.”
말소리가 가까웠다. 나는 마른 입술을 빠끔거렸다. 하지만 색색거리는 숨 외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냐. 작은 소리지만 틀림없이 들었네.”
“뭐 그럼 한번 열어봅세.”
“어디…… 아, 이건 안 돼. 열쇠가 꽂힌 채로 부러져 있어.”
“그럼 그냥 가지. 본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다 압수하여 옮길 물건들인데 세세하게 확인할 필요 있나. 어디서 희귀한 짐승이라도 잡아 넣어둔 모양이지.”
작은 희망이 부스러졌다. 겨우 터뜨린 숨이 그대로 밟히었다. 나는 발악했다. 하나 그건 생각뿐으로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발. 여기예요.
여기를 봐줘요. 열어줘요. 살려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간절한 외침은 입안을 맴돌았다. 가느다란 신음은 두꺼운 자개함을 뚫지 못했다. 아까운 수분이 눈으로 흘러 나갔다. 한 번 가졌던 희망이 사라지자 남은 생기가 급격히 빠져나갔다.
눈이 회까닥 뒤집히고 죽음이 내게 옷자락을 드리운 순간-
“어디냐.”
“여, 여깁니다.”
“이 자개함이 맞느냐.”
“예. 예, 전하.”
텅!
큰 소리가 나를 두드려 깨웠다. 놀란 죽음이 후다닥 물러나고 내 혼은 비루한 육신으로 되돌아왔다.
콰각!
자개함 뚜껑에 하얀 것이 박혔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나 저걸 무어라 부르는지는 알았다. 검이었다.
콰직!
세 번째 내려침에 잠금쇠 부분이 완전히 부서지고 함의 뚜껑이 열렸다. 빛에 눈이 멀 듯하여도 눈을 감지 않았다. 환한 빛 사이로 한 사내가 보였다. 마을에서 흔히 보던 촌부와는 감히 비교하는 것조차 무엄한 낯이었다.
영웅건을 두른 천신 같은 모습의 사내가 내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를 조심스럽게 보듬어 안은 그가 곧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떨리는 건 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의 이유를 그때는 아직 알지 못하였다. 다만 낯선 사내가 나를 이리 소중하게 보듬어주는 것이 그저 고맙고, 고마웠다.
“이제 괜찮다. 괜찮다. 내가 왔느니.”
그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로 다 괜찮은 것 같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순간에 겨우 생을 실감했다. 사내는 물을 가져오라, 모포를 가져오라 병사들을 호령했다.
나는 평생 가도 못 받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매끼 새하얀 쌀로 만든 미음을 뜨고 보드라운 비단으로 만든 옷을 걸쳤다. 어딘가 묘하게 성별이 모호한 옷이었으나 그 또한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내는 높으신 분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그 자리에 있는 자 중에선 가장 높았다.
나는 사내를 ‘나리’라 불렀다. 그 부름을 들은 사내의 눈썹이 기묘하게 휘었다. 기꺼워하는 반응은 아니라 심이 철렁했다. 내 공손함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고작 ‘나리’라는 말로는 사내의 높으심을 다 표현하지 못하여 그러한가. 대체 뭐가 잘못됐는지 몰라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외려 놀라고 당황한 건 사내였다. 그가 얼른 팔을 뻗어 비루하고 볼품없는 몸뚱이를 안아 올렸다. 살집 없는 엉덩이를 도닥이며 ‘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고치지 못한 버릇일 뿐, 뭐든 네 편할 대로 부르거라’ 하였다.
사내는 나를 품에 안고 놓을 생각을 안 했다. 일할 땐 줄곧 무릎에 앉혀두었다. 가볍게 산책을 하거나 앉아서 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곁을 지키는 이들의 경악한 낯은 뵈지도 않는 듯했다.
반면, 나는 힐끔거리는 시선이 닿을 때마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해도 내려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미가 죽은 후 나를 이리 아껴준 자는 사내가 처음이었다.
한갓 짐승도 호의와 적의를 구분하는 법. 나는 사내의 정성이 순수한 호의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사내가 원한다면 나를 당장 어떻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칠 생각이었으면 이런 귀찮은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사내의 말이 다 맞았다. 모든 것이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완벽했다. 사내가 주는 당과는 다른 당과보다 달았다. 너른 품은 아늑하고 안온하여 평생 안겨 있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