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27/27)
  • 외전 2.

    “……와. 진짜 왔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깨끗한 폐 깊숙한 곳까지 텁텁한 공기가 가득 들어찼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마저도 기꺼웠다. 저 멀리 높은 고층 빌딩과 지나다니는 차, 깜빡거리는 신호등과 한 치의 틈도 없이 붙어 있는 익숙한 상가들. 의심할 것 없이 내가 살던 대학가였다.

    이게 정말 얼마 만인지. 나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번화가답게 해가 바뀌며 달라진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운 풍경을 얼마나 더 만끽했을까. 옆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그럼, 좋지. 우리 해랑 다시 이렇게 내 진짜 고향도 와보고.”

    나는 서둘러 활짝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해는 심기가 불편한 듯 고개를 기울이고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퉁한 얼굴보다 달라진 옷차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전에 왔을 때와 같이 세미 정장 스타일의 검은 바지와 재킷을 차려입고 있었다. 누가 키웠는지, 정말 잘 컸다.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박수를 치자 그가 어색한지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헤어 스타일도 함께 달라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나저나 저번에도 이 옷차림을 고수하더니, 어디서 보고 똑같이 차려입었는지 모르겠다. 내친김에 물어보자 그는 도리어 내게 되물었다.

    “형님께선 입고 계신 옷을 어떻게 생각해 내셨습니까?”

    나는 새삼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가벼운 티셔츠에 청재킷, 검은 바지로 평소 옷차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꿈으로 접어들 때 그냥 편안한 차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상상한 대로 이뤄지는 건가?”

    해가 맞다며 살그머니 웃었다.

    “저는 단지 형님께서 좋아하시는 외형을 이 세계에 맞게 갖추고 싶다 빌었을 뿐입니다.”

    내가 이런 차림을 좋아했던가. 확실히 단정하고 맵시 있는 모습이 쉽게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나도 몰랐던 취향의 발견에 짧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 감기는 느낌이 평소와 달라 괜히 더 웃음이 났다. 내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결국 그도 마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대화도 잠시, 나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익숙한 기본 배경이 화면을 꽉 채우며 그리운 감상에 빠지게 했다. 그래, 역시 현대인에게는 전자기기가 필요하지. 나는 한때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꼈던 영혼의 친구를 문지르며 목표했던 것을 확인했다.

    “오늘이… 3월 17일이네. 하루 전이야.”

    “다행히 꽃이 시일을 잘 맞춰 피었나 봅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톱 끝을 잡아당기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생일이라니……. 기분이 이상하다.”

    18살, 난데없이 부여로 건너간 이후 이렇게 내 생일을 챙기는 건 처음이었다. 부여에 있을 적엔 ‘태자’로 살았으니 봄이 아닌 가을마다 내가 빌린 몸의 생일을 축하했다. 어차피 하루하루 버텨 나가는 삶에 일일이 날을 세어 내 진짜 생일을 챙기는 것은 사치였다.

    여유가 생겼을 땐 이미 흘러가는 계절에 내 생일마저 잊어버린 뒤였고. 현대로 돌아와서도 우울증과 주변 환경 때문에 생일을 제대로 기념한 적이 없었다.

    그럼 이건 몇십 년 만에 맞는 내 진짜 생일인 건가. 쓸데없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별안간 본래 생일을 챙기게 된 계기는 사소했다. 해는 원래라면 호수가 있어야 할 부지에 물 대신 흙과 비료를 가득 채워 거대한 꽃밭을 만들었다. 태자궁 앞 들판처럼 하얀 여름꽃을 잔뜩 심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꽃이 피었을 때 누구보다 먼저 소중한 이들의 생일을 기억할 수 있도록. 예전부터 여름이면 향수병으로 앓았던 나를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전달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는지 꽃밭 한가득 심긴 것은 봄꽃 식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모두가 꽃이 피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꽃샘추위가 가시고 날이 따스해져 나간 산책에서 들판 가득 고운 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광경을 봤을 때란. 꽃내음이 코끝을 간질이고 봄볕이 뺨을 타고 오른 순간 나는 무심코 깨달았다.

    아, 내 생일이 이쯤이었지.

    반평생 ‘태자’의 생일을 챙기며 살았더니 깨닫는 것도 늦었다. 그 뒤로는 가벼운 우울이 찾아왔다. 며칠이 지나면 자연히 나을 증상이었다. 원인도 확실했고 나 역시 잠깐의 우울을 누리며 챙기지 못할 생일을 반추하고 싶었을 뿐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가볍게 다가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밥 좀 깨작거리고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다고 대번에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았다.

    결국 나는 내 생일에 관한 이야기를 해에게 털어놓았다. 그저 이젠 챙기지도 않는 날이니 걱정할 것 없다는 의미에서였다. 내가 진짜 ‘태자’가 아니라는 것도 밝혀진 마당에 영 못 할 말도 아니었고.

    다만 말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향수가 묻어 나온 것이 문제였다. 생일이니 가족이 생각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그리움이 불러일으킨 여러 사건을 직접 겪었던 해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 같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더니 물었다.

    ‘이번 탄신일은 고향에서 보내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고향? 부여에서 보내자고?’

    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몸짓에서 나는 그가 어디를 일컫는지 알아차렸다.

    ‘비록 일전의 꿈을 다시 여는 것이지만, 오랜만에 지난 인연들을 만나고 오는 것도 좋겠지요.’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이었다. 영영 떠나온 줄 알았던 그곳에 다시 갈 수 있다니. 생각하지 못했기에 바라는 것 또한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능성이 열린 순간 그리움은 들불처럼 불어났다. 딱 한 번만이라도 가족과 생일을 다시 보낼 수 있다면. 비록 진짜 그들은 알지도 못할 테지만 환상이 만들어 낸 얼굴만 봐도 족했다.

    마음을 먹으니 꿈에 빠져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를 홀로 보낼 수 없다며 주몽까지 건너온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나는 해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 내일까지 잘 놀다 들어가자.”

    이왕 건너온 것,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해를 위해서 보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꿈속이니까 돈도 마음껏 쓰고.

    다행히 어플로 확인해본 통장 잔고는 예전에 모아둔 그대로였다. 아주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이틀 동안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보기엔 충분했다.

    뭘 하면 좋을까. 최대한 부여에서 할 수 없는 경험들을 시켜주고 싶었다.

    놀이동산? 피시방? 아니면 영화관? 그러나 떠올린 예시들 모두 그가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주몽은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을 싫어했다. 그런 곳에 갈 바엔 내 자취방으로 가자고 할 놈이었다. 그를 위해 가는 곳인데 그가 즐겁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영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첫 방문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밥부터 먹으면서 생각해보자.”

    결국 나는 깔끔하게 장소 선정을 포기하고 밥을 먹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시간대도 저녁이었다. 외국인이라면 한식당을 데려가겠건만……. 해는 조상님에 가까우니 햄버거, 피자, 치킨 이런 걸 소개해 줘야 하나?

    그러나 이 가설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표정이 미미하게 굳는 해를 보며 산산이 깨졌다. 주문을 마치고 음식이 나와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거의 비지 않은 접시를 보며 작게 한탄했다.

    “젊은 놈이 어지간히 할아버지 입맛이구나…….”

    “형님께선 이곳에서 매일같이 이런 음식을 드셨습니까?”

    해는 인상을 찌푸린 채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그러나 사실 나 역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부여에서 지내며 입맛이 바뀐 탓이었다.

    20년 지내고 돌아온 나도 양식보다 한식을 선호하고 커피보다 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는데 태생이 부여인 그는 얼마나 더할까. 나는 피자를 반 조각 먹고 내려놓은 그를 데리고 미련 없이 다른 가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근방에서 정갈하고 고급스럽기로 유명한 소고깃집이었다. 다행히 분위기도 조용하고 좌식 형태에 음식도 정갈했다. 반찬도 넉넉하고 서비스도 아끼지 않아 왜 교수님들이 자주 오시기로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고기를 자르는 직원이 해를 힐끔거리느라 느릿느릿 잘게 잘랐던 것만 빼면 참 좋았을 텐데.

    우리 애가 잘생긴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까지 쳐다볼 일인가? 부여에서는 신분 차가 있어서인지 이렇게 대놓고 힐끔거리는 사람은 없었는데. 낯선 경험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찝찝했다.

    “해야, 많이 먹어.”

    나는 괜히 잘리는 족족 해의 앞접시에 고기를 옮겨주었다. 내가 먼저 먹지 않으면 그가 수저를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도 그것만 빼면 첫 식사치곤 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번에는 익숙한 고기라서 그런지 해도 잘 먹었다.

    역시 돈과 고기는 배신을 하지 않지. 흐뭇하게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오자 어느새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대학가에 즐비한 술집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일일 호프를 홍보하는 대학생들과 이른 취객들이 섞여 시끄럽게 거리를 활보했다.

    이제 어디를 가야 할까. 또다시 시작된 고민에 미간을 문지를 때였다.

    “이곳은 형님께서 수학하셨던 관의 근방이 아닙니까?”

    주위를 둘러보던 해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돌아봤다. 겨우 한 번 와본 게 다일 텐데 내 대학 근처인 것까지 알아차리다니. 과연 기억력이 무시무시했다.

    “응, 맞아.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괜찮으시다면 제가 없었던 형님의 나날을 함께 돌아보고 싶습니다.”

    해가 수줍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맞닿은 온기에 천천히 열이 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래. 이미 함께 이 거리를 거닌다는 것부터가 특별한 경험이었다. 내게 익숙한 공간을 함께 돌아보며 같은 기억으로 덧칠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나는 상기된 표정으로 잡은 손을 살살 흔들었다.

    “그럼 산책도 할 겸 내가 다녔던 학교 한 바퀴 돌고 갈까? 봄 캠퍼스, 아니 정경이 정말 예뻐. 꽃이 벌써 피었을지 모르겠네.”

    그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기도 하지. 나는 팔을 뻗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내친김에 같이 편의점에 가서 맥주와 과자도 골랐다. 아쉽게도 교내에서 음주는 금지지만 산책이 끝나고 자취방에 가서 한 캔씩 마시면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물론 먹고 싶은 맛으로 고르라니까 한글을 못 읽어 진열대를 배회하는 해를 구경하는 맛도 쏠쏠했다.

    “너 그때 국어국문학과라 하지 않았어?”

    “…….”

    나는 품에 안은 맥주를 추스르며 그를 놀렸다. 일전에 ‘선호 형’ 행세를 하며 나를 속였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 그가 묵묵히 내게서 맥주를 빼앗아 대신 들었다. 나는 웃으며 왼쪽부터 하나씩 맛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건 숯불… 돼지고기 맛, 이건 초코가 음… 넘어가자. 이건 감자 맛, 불짬뽕… 어, 엄청 매운 칼국수 맛, 이건 ‘와사비’라고 맵고 화한 맛이야.”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괴랄할 정도로 다양해진 맛에 쉽지만은 않았다. 그가 침묵하며 과자를 들여다보았다. 이러다 미래 사람들은 모두 괴상망측한 걸 먹고 산다는 오해를 받겠다. 나는 설명을 포기하고 포장지의 그림에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고르는 사이 슬그머니 반대편 진열대로 돌아가 의도했던 것을 골라잡았다. 돌아왔을 때는 해의 손에 기본 감자칩이 들려 있었다.

    개중에서는 감자가 그나마 제일 나아서 골랐구나……. 나는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꿀약과도 집어 함께 계산했다. 혹시 모를 이탈리안 식당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면 대신 입에 넣어주기 위해서였다.

    편의점을 나와 학교로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제람?”

    뒤에서 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들 여럿이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날 향해 우다다다 달려왔다.

    “이게 누구야! 또 휴학하고 사라진 제람이 형 아니야!”

    “이 배신자! 여긴 어쩐 일이야. 살아 있으면 있다고 연락을 해야 할 것 아니야!”

    경악과 반가움이 가득한 손길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해가 미간을 좁히며 나를 가로막고 섰다. 여러 곳에서 뻗어 나오는 팔을 빠짐없이 쳐내는 모습이 역시 훌륭한 무사 출신다웠다. 오랜만에 본 친구들은 모조리 얻어맞은 팔을 붙잡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나는 해의 등 뒤에 숨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잠깐 사정이 생겨서……. 다들 잘 지냈어? 진짜 오랜만이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우원이 가장 먼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악을 썼다. 그 모습을 보자 미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나중에 들으니 이곳은 꿈이라곤 해도 현실에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러니까, 실존하는 인물을 끌어다 ‘내가 만약 정말 살아서 학교를 다녔더라면?’이라는 가정에 입각해 하나의 가상 현실을 도출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냥 상상 속 인물들이라고 넘겨 잊기는 힘들었다. 현실에는 정말로 살아 있을 그들이 내가 사라졌다고 믿고 걱정해주는 걸 텐데. 게다가 대학 생활에는 미련이 없었던 터라 거기서 맺은 인연들이 나를 반기는 모습을 보니 새삼 고맙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나는 해를 살짝 밀어내고 살가운 목소리를 냈다.

    “너희는 여기 웬일이야? 밥은 먹었어?”

    우원과 세윤, 그리고 다빈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동아리 회식을 마치고 2차를 가는데 저희들끼리 살짝 빠져나왔단다. 보아하니 이미 한잔 걸치고 온 것 같았다. 다빈이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가 방금 나온 편의점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아니, 여기 알바가 내 친구거든. 근데 방금 개잘생긴 손님 둘이 왔다 갔다고, 무슨 촬영하는 줄 알았다고 해서 신나서 온 건데.”

    옆에서 세윤이 그게 형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라고 투덜거렸다. 격하게 반기던 방금 전과 다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내 팔을 붙잡았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야. 형, 가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잔해야지.”

    “그래, 오빠! 같이 가자. 어차피 동아리 2차는 자율 참석이라 빠져도 돼.”

    “아니, 나 일행도 있고. 다음에 마시자.”

    “다음 언제! 또 사라지려고?”

    우원이 고집을 부리며 나를 붙잡았다. 한 명이 소리를 높이자 다른 둘까지 따라 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점점 다시 뻗어오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린 해가 재차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해를 보던 다빈이 미심쩍은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잠시만, 내가 계속 긴가민가했는데… 혹시 선호 오빠 아니에요?”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몸이 굳었다. 설상가상으로 옆에 있던 세윤과 우원이 얼빠진 소리를 내더니 덩달아 꼼꼼하게 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곧이어 말릴 새도 없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세윤이 삿대질을 하며 고개를 마구 휘둘렀다.

    “맞네! 그때 우원 형이랑 같이 알바한다던 분! 맞죠!”

    “아냐, 아니야! 예전에 한 번 봤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오빠! 상식적으로 내가 살면서 저 얼굴을 어떻게 잊어? 정확하다니까? 맞죠!”

    나는 필사적으로 부인했으나 이미 그들은 결론을 내린 뒤였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튀어나온 다빈의 말이 너무나도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정작 거짓말이라도 본인과 알바를 했다던 우원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그러나 따지자면 그들이 기억하고 있을 ‘손선호’는 해가 맞았으니 틀린 추측도 아니었다. 나는 순식간에 의지를 잃고 몸에서 힘을 뺐다. 그사이 세윤은 노선을 틀어 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형도 같이 가시죠! 저희가 제람이 형 못 보내겠어서 그래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지 들어야겠어요.”

    “그걸 네가 들어서 뭣 하느냐?”

    물론 해는 간곡한 애원에도 심드렁한 태도였다. 나들이를 방해받아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관된 무관심에 결국 셋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미안하지만 나 역시 갈 생각은 없었다. 지금 가면 분명 내일 아침 해장국까지 먹고 헤어질 인간들이었다. 해와 처음 맞이하는 내 진짜 생일을 그런 식으로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러지 말고 다음에…….”

    다시 거절의 말을 꺼낼 때였다. 다빈이 눈썹을 내려뜨리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가자. 우원 오빠가 얼마나 섭섭해했는지 알아? 솔직히 제람 오빠, 우리라면 몰라도 우원 오빠한테까지 그러면 안 되지. 오빠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우원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김우원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내 대학 친구. 그는 1학년 때 내가 돌연 중도 휴학을 했을 적에도 날 챙겼던 전적이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사라졌다고 하니 얼마나 걱정을 했을까.

    하지만 우원은 처음에 소리를 지른 것을 제외하면 나를 크게 붙잡지도 않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부담을 주기 싫다는 듯, 섭섭함을 애써 누른 미소에 도리어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머뭇거리며 해를 올려다보았다. 일행이 있으니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어디를 보는 거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너네 대체 여기서 뭐……. …이제람?”

    때마침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가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꽤 잘생긴 남자가 휴대폰을 들고 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나는 단번에 떠올리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의 정체는 나를 둘러싼 친구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준우 형!”

    “형! 동아리 사람들이랑 2차 간 거 아니었어요?”

    준우 선배라니. 1학년 때 친하게 지냈지만 갑작스러운 연락 두절과 휴학 뒤로 쭉 얼굴을 보지 못한 선배였다. 예상치 못한 반가운 얼굴에 나도 모르게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준우 형? 형이 여기 웬일이에요?”

    “아, 나 복학했어. 오늘은 동아리 회식 왔는데 이렇게 다 만나네. ……참 오랜만이다. 휴학했다고 들었는데.”

    그가 멋쩍게 뒷목을 쓸었다. 순간 해의 가늘어진 눈이 그들을 짧게 훑었다. 한껏 나긋하고 부드럽게 꾸민 중얼거림이 들렸다.

    “김우원에, 준우라…….”

    등골이 서늘하고 머리칼이 삐죽 섰다. 내 어깨를 가볍게 짚은 해는 내 상체를 끌어당기며 그들에게 여상히 명령했다.

    “앞장서거라.”

    “저, 정말요? 역시! 형! 그럼 제람 형도 가는 거지?”

    난데없이 일어난 변심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와중에도 세윤은 물리기 없다며 반색을 했다.

    물론 가장 당황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떨떠름하던 기색의 그가 왜 한순간에 마음을 바꿨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말리듯이 해의 팔을 붙잡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너 왜 그래?”

    “오랜만에 만난 형님의 친우들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저는 염려치 마시고 회포를 푸십시오.”

    “아니 풀 회포도 없… 해야, 해…… 야!”

    그러나 그는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주는 대신 신이 나서 골목을 헤집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질질 끌려갔다. 가슴 한구석이 두근거리는 것이 묘하게 불안했다.

    ***

    이제 막 시작되는 밤과 약간은 어두침침한 조명, 왁자지껄한 소음과 적당한 술이 함께라면 사람의 경계심은 생각보다 쉽게 풀어진다.

    나 역시 그 법칙을 피할 수 없었다. 연이은 건배에 술까지 한두 잔 원샷으로 들이켜고 나자 이 자리도 나쁘기만 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오늘은 챙겨야 할 사람도 있으니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겠지만. 나는 해의 잔에 그나마 뒷맛이 깔끔한 소주를 따라주었다. 부여에서 먹던 술과 차원이 다른 싸구려 술이니 혹여 숙취라도 생길까 걱정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내가 그러건 말건 다빈은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며 병따개를 마다하고 숟가락으로 맥주병 뚜껑을 땄다. 모두의 환호 속에 그녀가 살짝 휜 숟가락을 들어 나를 겨눴다. 기선제압이었나? 분위기에 휩쓸려 작게 박수를 치던 나는 움찔했다. 다빈이 형형한 기색으로 나를 쪼았다.

    “그래서 그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갑자기 중도 휴학했대서 다들 걱정했잖아. 우원 오빠도 모른다고 하고.”

    “야, 나한테 말 안 하고 했을 수도 있지…….”

    우원이 잔을 채우며 중얼거렸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과 달리 말투가 묘하게 우울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적당히 각색한 진실을 늘어놓았다.

    “일이 있어서 한국을 아예 떴었어. 급하게 떠난 거라 미안. 지금도 잠깐 들어온 거야.”

    “그래? 어쩐지 얼굴이 반질반질해졌더라. 혼자 맛있는 거 많이 먹었냐? 거기 물이 잘 맞았나 보네.”

    다행히 자세히 말하기 싫다는 뜻을 알아들은 그들은 적당히 말을 돌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나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 없는 맞장구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그런데 정작 관련도 없는 해가 고개를 숙이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잘 맞으시는 것 같다니 다행입니다.”

    “……뭐가?”

    “이곳이라고 식수가 크게 다르진 않을 테니, 결국 ‘맞는다’고 평할 물은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그가 소리 없이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나를 쓱 훑어보았다. 그 의미심장한 시선에 귓불이 붉게 물들었다. 외국이라곤 가보지 않은 그가 ‘외국물이 잘 맞나 보다’라는 흔히 쓰이는 표현을 알 리가 없었다. 제멋대로 해석되는 은어가 이토록 위험할 일인가. 착각도 꼭 저 같은 것만 골라서 하지.

    나는 홧홧한 볼을 식히려 눈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다빈이 기다렸다는 듯 빈 잔이 테이블에 닿기도 전에 술을 채웠다. 넘실거리게 따른 그녀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근데 선호 오빠랑은 어떻게 같이 있던 거야? 분명 재작년인가, 둘이 처음 본 거 아니었나?”

    “아… 알고 보니까 원래 알던 사이였더라고. 그래서 그 뒤로 친하게 지내고 있었어.”

    나는 대강 둘러댔다. 사실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주몽 본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역시 잘생긴 사람들끼리는 뭔가 통하는 모양이다……. 우원 오빠, 우리 세윤이 불쌍해서 어떡해.”

    “야! 내가 뭐 어때서!”

    다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우원과 과장된 태도로 속닥거렸다. 잔을 채우던 세윤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또 셋이서 금세 하하호호 웃어댔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채워진 잔을 비웠다. 왜 셋이서 동아리 무리에서 이탈했는지 알 것 같다. 아주 죽이 잘 맞았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예의상 웃음도 띠지 않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홀로 머쓱하게 그 시선을 받아내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형.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준우 형이 대답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긴장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근처에 있는 안주를 집기 위해 손만 뻗어도 몸을 움찔거리기도 하고.

    역시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한가. 나도 덩달아 조금 멋쩍은 기분이 되었다. 그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던 것 같진 않은데, 워낙 오랜만에 만났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내게도 소개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때 흐르는 뻣뻣한 공기를 뚫고 해가 능청스럽게 반말을 하며 끼어들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거슬릴 만한 말을 빼고 순화해서 관계를 풀었다.

    “나 1학년 때, 그러니까 막 학교에 입학했을 때 많이 도와주신 분이셔.”

    “아, 그 ‘족보’를 넘긴……?”

    해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뜬금없는 단어의 등장에 모두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저 속뜻을 아는 나는 도저히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놈의 ‘족보’ 때문에 내가 무슨 오해를 사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러나 해명할 새도 없이 여러 일이 터져 아직까지도 오해를 풀지 못한 채였다. 어차피 나는 준우 형과의 관계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했다. 게다가 둘은 서로 볼 일도 없을 테니 입 아프게 해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고.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적어도 ‘족보’에 대한 오해만이라도 풀어놓는 건데!

    나는 서둘러 커다란 하이볼 전용 잔을 들어 맥주와 소주를 동일한 비율로 따라 섞었다. 그 잔은 고스란히 해의 손에 쥐어졌다. 숙취고 뭐고, 조금이라도 헛소리를 하는 즉시 취한 게 틀림없다고 몰아가기 위한 연막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그들이 이미 동아리 회식 자리에서 가볍게 달리고 온 뒤였다는 사실이었다. 원체 말술이라곤 해도 아무것도 마시지 않은 사람과 이미 마시고 온 사람 사이에 취하는 속도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모두가 금세 술기운에 달아올랐다.

    덕분에 종종 엇나가는 해의 언행도 그럭저럭 묻히길 몇 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다빈이 낮게 탄성을 질렀다.

    “아, 맞아. 준우 오빠. 저 물어볼 거 있었는데. 혹시 소개팅할 생각 없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준우 형이 가볍게 웃었다. 어쩐지 내 쪽을 힐끔 바라본 것도 같았다. 내가 대신 나가달라는 건가? 나는 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쪽을 보는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쇠젓가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 은으로 만들지 않은 식기는 처음 봐서 신기하겠지. 허탈한 숨을 내쉬는데 다빈이 다시 그를 설득했다.

    “제 친구인데 진짜 괜찮아요. 사진 보실래요?”

    “아니, 난…….”

    “소개팅 부담스러우시면 그냥 얘네 과랑 미팅도 괜찮을 거 같은데. 마침 여기 남자가 다섯이나 있는데 같이 나가면 되겠다. 박세윤은 빼고 우리 잘생긴 제람 오빠부터, 이렇게 넷이 묶어서!”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들어 우리를 둥그렇게 묶듯이 손짓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 같진 않고 그저 꼬드기려 얹은 말이었다.

    그러나 준우 형의 얼굴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맥주잔을 들어 벌컥거리더니 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급히 말했다.

    “됐어. 새내기도 아니고 무슨 미팅이야. 그러지 말고 제, 제람아. 내일 아침에 나랑 만날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밥이라도 사줄게.”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만큼이나 놀라운 제안이었다. 게다가 점심도 아니고 아침을 사주겠다는 사람은 처음인데.

    나도 모르게 짧은 웃음이 터지고 나서야 나는 쿡쿡대며 입가를 가렸다. 술기운이 슬슬 도는지 웃음이 헤퍼진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형, 저는요?’, ‘오빠! 저희도 얻어먹고 싶어요!’ 여기저기서 과장된 투정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준우 형은 오직 내 눈만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 묘한 기시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내가 못 한 말도 있고.”

    “…….”

    ‘그때’가 언제지? 나는 반사적으로 고민하느라 거절의 말을 꺼낼 순간을 놓쳤다. 다행히 그가 말하는 때는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던 날이 그가 종강 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찾아온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형은 나 혼자 떠드는 말만 묵묵히 듣다 갔었지.

    나는 흔들리는 시야에 맞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었다. 내일을 위해 이곳으로 온 건데, 준우 선배를 만나느라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웃음기가 가지 않은 얼굴로 거절을 위해 입을 뗀 순간이었다. 옆에서 쾅 소리가 나더니 듣기 좋은 저음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보다 혼인을 하셨는지 묻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감히 독대를 청하며 무례하기도 하지.”

    놀라 돌아보니 커다란 맥주잔에 가득 따라져 있던 폭탄주가 거의 다 비어 있었다. 그뿐일까, 그 두꺼운 하이볼 잔이 손잡이부터 슬슬 금이 가 있었다. 나는 당황해 입을 뻐끔거렸다. 그 와중에 우원이 벌떡 일어나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너, 너 결혼했어!? 누구랑? 아니 대체 언제?”

    “뭐라고? 형 결혼했다고? 미친, 사고 쳤어?”

    덩달아 놀란 세윤이 빽 외쳤다. 순식간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나는 혼비백산해 일어나 두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야, 아냐! 아니라고! 얘가, 아니 형이 취해서 그래, 취해서! 내 나이에 무슨 결혼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의 눈이 단숨에 세모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래줄 수가 없었다. 결혼이라니! 아무리 고구려에서는 어영부영 왕후궁에 눌러앉아 살고 있다지만 현대 한국에서 내 나이에 결혼은 절대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잠깐 보고 말 친구들이라지만 이런 대형 폭탄을 터뜨릴 수는 없었다. 나도 내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잖아!

    다행히 격렬한 부정에 오해의 시선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나는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깐 사이에 십 년은 늙은 듯 진이 다 빠져버렸다. 다빈이 낄낄거리며 나를 놀렸다.

    “왜, 벌써 결혼했을 수도 있지. 오빠 노린 사람들이 좀 많았어야지? 신입생 때부터 난리였잖아. 드디어 썩은 물리학과 물에 잉어가 하나 들어왔다고.”

    “그만 놀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모나지 않은 외모 탓에 쉽게 호감을 사긴 했지만 막상 고백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게다가 김우원이나 준우 형도 있고, 물리학과가 그렇게 ‘썩은 물’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러나 나는 굳이 말을 얹어 해의 화를 돋우지 않았다. 이미 해의 얼굴은 내가 혼인을 부정한 순간부터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때 준우 형이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헛기침을 하더니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큼, 제람이가 잘생기긴 했지. 너 언제는 거의 태어났을 때부터 업어 키운 동생이 고백한 적도 있었다며.”

    “……네? 누구요?”

    “왜, 옛날에 무슨 여섯 살 어린 옆집 동생이 졸졸 쫓아다니며 좋아한다고 해서 곤란하다고 했었잖아. 네가 그때 21살이었으니까… 지금은 걔도 갓 성인이 되었겠다. 연락은 하고 지내?”

    어딘가 묘하게 은근한 어투였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저런 이야기를 했다고?

    애써 기억을 되짚어 보니 준우 형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술잔을 기울이며 나눈 이런저런 얘기에 저런 것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시는 해의 사랑이 부담스러웠던 때이니 의지하던 선배에게 털어놓았어도 놀랍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신다면 얘기가 다르죠…….

    준우 형이야 그 ‘여섯 살 어린 옆집 동생’이 바로 앞에 있는 줄 모르고 친 장난이겠지만 당사자로서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말이 잘못 흘러나가기라도 했다간…….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주변의 하이에나들이 보기 드물게 흥미로운 과거사를 놓칠 리 없었다.

    “6살 차이? 제람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양심도 없다…….”

    “21살과 15살? 그건 범죄 아니야?”

    “야! 나도 분명히 안 된다고 했어! 그리고 그땐……!”

    걘 15살이 아니라 사실 20살이었다고, 하는 말은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놈들은 다른 단어에 집착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땐? 그럼 지금은 된다는 거야?”

    “도둑놈이 아니라 거의 범죄자 수준인데? 오빠가 제정신이라면 걔가 좋다고 해도 말렸어야지!”

    말려서 들을 놈이었으면 내가 기어이 몸까지 섞었겠니…….

    따지고 보면 차라리 범죄자 쪽은 고백과 동시에 잠자리를 요구한 ‘15살’ 쪽이셨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기꺼이 오명을 감내하기로 했다. 결혼까진 그렇다 쳐도 애인 사이인 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새 화가 조금 누그러진 해가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말려지는 일은 평생토록 없을 거다. 제정신이 아닌 쪽은 그 애거든.”

    “…….”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왜인지 김우원이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그럼 너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

    에라, 모르겠다. 그게 그거겠지.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쨍그랑, 파열음과 함께 앞섶이 흠뻑 젖은 준우 형이 보였다. 그가 멍한 눈으로 옷을 훔치더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많이 취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형, 괜찮으세요?”

    “어? 어어… 응. 괜, 찮아. …그, 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딘가 단단히 넋이 빠져 있었다. 모두가 걱정하는데 해가 홀로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잠시.”

    도망치듯 화장실을 향해 걷는 준우 형의 뒤를 해가 지극히 귀족적인 걸음으로 뒤따랐다.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마음 같아선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취한 머리로도 남자 셋이서 화장실을 가는 것이 모양새가 이상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 내 고민도 모르고 한 명이라도 취한 사람을 따라갔다는 안도에 걱정을 잊은 친구들은 금세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다빈이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지 빠르게 타자를 치며 물었다.

    “아무래도 준우 오빠 소개팅할 생각 없어 보이지? 그럼 선호 오빠한테 넘길까? 오늘 보니까 사람이 잘생기고, 어, 잘생기고 괜찮아 보이던데.”

    “잘생기면 다냐……?”

    세윤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즉시 ‘저 정도 얼굴이면 내가 먹여 살려도 된다.’라는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해가 좀 잘나긴 했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다가 그는 이미 누가 먹여 살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재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걸 몰라도 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탐낼 만했다. 그렇게 잘생기고, 착하고, 다정하기까지 한데 그 어느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해와 수용은 별개였다. 스멀스멀, 낯설지만 오늘따라 꽤 자주 느낀 불쾌감이 올라왔다. 고깃집에서부터, 어쩌면 이탈리안 식당… 혹은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작지만 꾸준하게 느낀 감각이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손톱을 세워 뜨거운 손끝을 눌렀다. 그러나 생각보다 술을 너무 마셨는지 잘 참아왔던 충동을 자제하기가 힘들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감각에 나는 결국 툭 말을 뱉고 말았다.

    “해, 아니 선호 형한테 그런 거 주선하지 마.”

    “왜? 그 오빠도 애인 있대?”

    다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한번 말이 튀어나오니 두 번째는 더 쉬웠다. 나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렸다.

    “어, 태어날 때부터 봤다나 봐. 엄청 어릴 때부터 해… 아니 형이 먼저 좋아했대. 겨우 매달려서 사귄 거야. 절대 안 깨질걸?”

    “와, 대단하다. 그 정도로 오래 봤으면 거의 가족 아닌가? 그런데도 사랑이 생기는구나.”

    그러게 말이다…….

    “근데 좀 질리기도 하겠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으면 그 상대분이 첫사랑일 거 아니야.”

    그때 세윤이 불쑥 중얼거렸다. 트집을 잡는다기보다 그냥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러나 내 귀에는 어떤 말보다 크게 들렸다. 나는 멍하니 반문했다.

    “……어?”

    “아니, 원래 연애라는 게 새롭고 설레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막말로 태어났을 때부터 보고 자란 사람이랑 무슨 그런 게 있겠어. 내 주변에도 초딩 동창이랑 동창회에서 다시 만나 사귀었다는 애는 있어도 초딩 때부터 지금까지 사귄 애는 없다.”

    ……질린다고? 해가 나한테?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가정이었다. 그러나 세윤의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한 가지는 긴장감이다. 나와 해가 일반적인 과정을 거쳐 연애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들이 어긋나기 쉬운 문제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권태기는 유구한 이별 사유가 아니던가.

    지금이야 해가 달라붙는 걸 어르고 달래 보내는 게 일상이라지만……. 언젠가 그가 나에게 질려 날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면?

    우리 사이에 새로움이 없어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탓이었다. 나는 해에게서 단 한 번도 그런 문제를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특히 그 얼굴은 보고만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 다르겠지. 가끔은 나 스스로도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보호자 위치에 아차 싶을 때가 있었으니까……. 나는 점점 땅굴을 파고들며 소주를 가득 따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안일하게 지냈는지가 느껴졌다. 나도 이제 그곳에 나를 지켜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나의 근원이자 전부였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아이뿐이었다.

    그럼 나도 그 간절함만큼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래. 이제부터라도 노력하면 되지.”

    다행히 술을 연신 들이켠 만큼 다시 기분이 올라 금세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계속해서 말이 없던 우원이 과장되게 새 술병을 까더니 내 잔에 부었다. 그가 어딘가 미묘하고 느릿한 어투로 나를 종용했다.

    “야, 그보다 네 여친 이야기나 좀 해봐. 어린애가 그렇게 쫓아다니면 좀 무섭지 않았냐? 나라면 오래… 못 갈 것, 같은데.”

    “왜 무서워? 걔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천사야, 천사. 다정하고 착한 우리 해…. 어딨나, 어디 갔지?”

    방금까지 직접 보고도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해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장실을 간 지가 언젠데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야. 그제서야 이곳 화장실은 그가 평소 쓰던 방식과 다르다는 것이 떠올랐다.

    역시 같이 갔어야 했는데……. 휘청거리며 일어나는 내 어깨를 누군가 잡아 지탱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나는 반가운 얼굴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여깄, 어어?”

    “많이 취하셨습니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그가 내 어깨를 잡은 그대로 당겨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뒤에는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준우 형이 있었다. 갈 때도 같이 가더니 언제 저렇게 친해져서 같이 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반가웠던 인연을 향해 헤실거리며 웃다가 커다란 손으로 얼굴 전체가 뒤덮였다. 그 손을 치우는 대신 조금 밀어 올려 입만 열었다.

    “아, 혀엉. 준우 형…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한국 들어오면 그때 만나요.”

    아까 미처 답하지 못했던 제안에 대한 거절이었다.

    “…아냐, 됐어. 지금 생각하니까 별말도 아닌데 붙잡은 거 같네.”

    어둠으로 뒤덮인 시야 대신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어색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머리 위에서 짙은 한숨이 들려왔다. 나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곳들을 향해 손을 흔들다 질질 끌려 술집을 빠져나왔다.

    ***

    짧은 알림음과 함께 도어락이 열렸다. 나는 좁고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해를 먼저 밀어 넣은 뒤 문을 닫았다. 자취방은 현관에 서면 구조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친 가로등 불빛만이 유일하게 방 안을 밝혔다.

    나는 기억나는 대로 벽을 더듬어 가장 먼저 닿는 스위치를 눌렀다. 그 즉시 방의 일부가 은은하게 밝아졌다. 현관 바로 옆에 위치한 화장실 조명이었던 모양이었다.

    “…….”

    나는 흰 빛이 해의 뺨 위에 얼룩진 것을 흐린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그는 어딘가 묘한 표정을 한 채 내 방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 역시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온전히 내 공간이었던 이곳에 너만큼은 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일전에 낯선 사람인 줄 착각하고 들였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내 구석구석을 드러낸 심정이 되어 아무 말도 없는 해의 팔을 끌어당겼다. 단단한 팔이 익숙하게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열기로 달아오른 공기가 빈틈을 채웠다.

    나는 그의 팔을 더듬어 올라가 어깨를 쥐었다. 나에게 맞춰 살짝 내린 얼굴이 빛과 어둠으로 반씩 물들어 밤을 닮은 욕망을 자극했다.

    이 얼굴을 보고 그 누가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 찬바람을 맞으며 겨우 가라앉혔던 감정들이 소용돌이를 치며 불쑥 올라왔다. 통제를 잃은 안면근육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의도하지 않은 말이 술기운을 빌려 툭 튀어나왔다.

    “내 친구가 너 중매 서고 싶다고 하더라.”

    “…….”

    “그뿐인 줄 알아? 오늘도 다니는 내내…….”

    헙, 다행히 뒷말은 제때 삼킬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구질구질함에 놀라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도 어처구니가 없을 게 분명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겠다며 이곳저곳 끌고 다닌 사람은 나인데 정작 내가 화를 내고 있으니.

    그러나 눈동자만 올려 훔쳐본 해의 얼굴에는 다행히 황당함이라곤 일절 보이지 않았다. 대신 흥미로 반짝거리는 눈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휘어졌다.

    그 눈빛에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아무리 술을 처먹었어도 그렇지, 어떻게 속마음을 그대로 뱉어낼 수 있을까. 나는 빠르게 변명을 주워섬겼다.

    “너, 너 여기선 정말 조심해야 해. 여긴 부여와 달라. 손가락 하나만으로 네 신상이 저기 바다 너머까지 퍼질 수 있다니까? 네가, 어? 그때, 나 찾으러 학교 식당 왔을 때도 말이야. 너 거기 간 거 전교생한테 다 퍼졌다니까. 몰랐지?”

    “…….”

    “여기가 그렇게 위험해. 그러니까 항상 행동거지를, 어, 바르게, 그래. 오해의 여지를 살 일이 없게 하란 말이야…….”

    말하면서도 터무니없는 소리임을 안 내 말끝이 흐려졌다. 오늘 해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러니 이건 그냥 내가 혼자 부리는 투정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초조하게 손끝을 매만지다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헛소리냐고 웃어넘기기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무시하라며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형님. 무엇을 염려하시는 겁니까?”

    너무나도 달콤해 혀가 아릴 정도로 다정한 속삭임이 내려앉았다. 나는 홀린 듯이 변명을 중얼거렸다.

    “나, 는 언제나 너…를 염려…….”

    “이곳은 꿈속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살아갈 세계도 아니지요. 그깟 일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

    단단한 손이 나를 돌려세웠다. 나는 순식간에 현관 벽면에 붙어 있는 거울과 마주 보고 섰다. 희미한 불빛이 거울 속 남자를 비췄다. 붉게 열이 오른 뺨과 흐트러진 머리카락, 낯선 열기와 불쾌감이 모두 뒤섞여 가라앉은 두 눈까지. 분명 나인데도 어느 한구석도 익숙하지 않은 나를 마주했다.

    어둠이 고여 있던 어깨 위로 언제나 감탄했던 완벽한 형태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내 목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다시……. 형님을 불안하게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쿵.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물들인 붉은색은 부끄럽다거나 곧 이어질 일을 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한 번 핥았다. 둔해진 혀끝에 싸구려 안주의 짜고 단 맛이 묻어나왔다. 동시에 그토록 어색해했던 불쾌감의 정체를 끌어냈다.

    “……너.”

    네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그건 널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내 마음 깊숙한 곳의 바람 때문이다.

    그가 잘했다는 듯이 내 목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 입술은 목을 타고 올라와 턱과 뺨에 이르더니 결국 원하던 곳을 찾았다.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물리고 자연히 벌어지는 입 안쪽으로 혀가 파고들었다.

    나는 몸을 돌리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조금 가라앉았던 열기가 다시금 공기를 데우는 것이 느껴졌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듯한 이 기분은 수없이 느낀 그대로였다.

    “흐으, 응.”

    겉옷을 벗기도 전에 상의가 말려 올라갔다. 뜨거운 손이 허리를 더듬으며 척추를 따라 파인 곳을 문질렀다. 나는 온몸에 힘을 빼는 대신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매달렸다. 입술이 잠시 떨어진 사이 그가 작게 속삭였다.

    “제가 형님을 두고 정조를 더럽힐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아… 그, 건 알지만….”

    “손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얼마나 인내해야 했는지 아십니까? 형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그는 내가 숨을 고르는 사이 쉬지 않고 목에 입을 맞췄다. 무엇을 인내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틈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재킷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손바닥이 티셔츠 위를 쓸어내렸다. 그제야 ‘선호 형’이 벨트와 버클을 풀 줄 몰라 찢듯이 내던졌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 이곳 옷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그를 위해 웃으며 옷을 머리 위로 빼냈다.

    이번엔 그를 돕기 위해 그의 팔을 잡았을 때였다. 무언가 탱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현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게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가 그것을 집어 들려는 나를 붙잡아 세우며 다시 입술을 붙였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젓가락이 왜 해의 소매에서 나왔지? ……그것도 중간이 저렇게 휘어 있는?

    순간 술집에서 쇠젓가락을 만지작거리다 준우 선배를 따라간 그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나는 그 기억을 급하게 밀어냈다. 눈앞에 선 남자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경험상 저런 눈을 하고 있을 땐 캐묻지 않는 것이 좋았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발에 차인 비닐봉지를 집어 들었다. 과자들 사이에서 내가 따로 구매한 박스를 뜯자 낱개 포장된 물건이 나왔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심호흡을 했다. 나 역시 실제로 사용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내가 무얼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내 가슴을 만지던 해의 손에 그것을 내밀었다.

    “이거… 콘돔이라는 건데. 옛날에 피임 도구로 오해했던 것 기억나?”

    “갑자기 피임 도구라니, 낯선 곳에서 하시면 정녕 회임이라도 하실 것 같으셨습니까?”

    그가 눈꼬리를 휘며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가늘어진 눈에서 명백한 흥분이 엿보였다. 나는 붉어진 손으로 못된 말만 골라서 하는 그 입을 툭 때렸다.

    “이곳에서도 남자는 임신 못 해. 그래도 쓰는 편이 여러모로 안전하니까.”

    각종 병이나 위생, 뒤처리 등을 예로 들어 말하자 해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를 감싸 정액이 흐르지 않도록 한다는 피임 도구의 방식 자체가 흥미로운 듯했다. 나는 비닐 껍질을 까서 쥐여주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네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는 거겠지.”

    맞닿은 손에서 미끈거리는 오일이 묻어났다. 그가 검지로 콘돔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나는 손을 내려 그의 벨트를 풀었다. 항상 통이 넓고 끈으로 고정시키는 형식의 전통 옷만 입었던 그가 낯선 형태의 옷을 입은 모습을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어쩐지 내가 알던 해가 아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매일같이 보며 직접 키웠던 아이가 아니라 멋있게 성장해 불쑥 나타난 사람 같았다. 이래서 세윤이가 초등학교 동창회 이야기를 하며 새로움을 강조한 거구나.

    그러고 보니 나도 해가 나에게 질릴 일이 없도록 노력을 하기로 다짐했었다. 마침 새로운 장소에 새로운 물건까지 있으니 그 힘을 빌려 새로운 시도를 하기 딱 좋은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가만있어 봐.”

    나는 충동적으로 무릎을 꿇고 눈앞에 놓인 지퍼를 내렸다. 안은 이미 손이 잘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두툼하게 차 있었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그의 성기를 꺼냈다. 반쯤 서서 꺼덕이는 그것은 내가 한 결심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유난히 더 커 보였다.

    그대로 손바닥을 펼쳐 기둥을 감쌌다. 몇 번 훑지도 않았는데 금세 고개를 드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긴장감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그를 올려다보지 않으며 그의 손에서 콘돔을 가져왔다.

    “내가 쓰는 방법을 알려 줄게.”

    그는 당황한 탓인지 머뭇거리며 내 머리카락만 건드릴 뿐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혀 아래를 훑어 입 안을 축축하게 적셨다. 콘돔을 써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사용하는 방법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정액받이 부분을 잡아 공기를 뺀 뒤 끝을 귀두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벌려 끝을 입술에 머금었다.

    “윽, 형님?”

    탄탄한 허벅지가 흥분으로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지체 없이 고개를 숙이며 입술로 콘돔을 씌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워낙 큰 성기는 입을 아무리 크게 벌리고 삼켜도 밀어 넣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나는 귀두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기둥만 머금은 채 잠시 멈췄다. 그가 해줄 때는 잘만 목구멍으로 밀어 넣던데 실제로 해보니 물고 있는 것도 버거웠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결국 위를 쳐다보자 웃음기가 지워진 얼굴이 보였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 목을 쓸어내렸다.

    “…버거우시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 말에 오히려 괜한 오기가 들었다. 내가 처음 받았을 때는 정신 못 차리도록 휩쓸렸던 것 같은데 정작 해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 같고. 나는 우선 성기를 뱉은 다음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말이 대답이지 스스로 하는 다짐에 가까웠다. 나는 조금 전보다 더 거대해진 기둥을 쥐고 우선 뺨에 길게 문질렀다. 이렇게 대보니 목까지 닿으면 얼추 반은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나머지 콘돔은 손으로 씌워야겠다. 나름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 뒤 다시 숨을 들이마셨을 때였다. 뒷목을 문지르던 손이 예고도 없이 뒷머리를 잡더니 그대로 아래로 내리눌렀다.

    “으흡!”

    “하아…….”

    굵고 긴 성기가 혓바닥을 타고 입천장을 문질렀다. 나른한 숨결이 머리 위에서 터졌지만 만족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앞서 넣었을 때보다 깊게 들어온 성기에 숨까지 턱턱 막혔다. 애써 입술을 오물거리며 조금 더 깊이 받아보려 했지만 원래 목적이었던 콘돔 씌우기는 아직도 성공이 요원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앞부분을 머금고 남은 기둥은 손으로 흔들었다. 코에 닿는 사내 냄새와 콘돔의 인공 향이 섞여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콘돔은 더 씌워지지도 않는다.

    나는 다시 성기를 뱉었다. 아니나 다를까 콘돔은 중간쯤부터 꽉 끼어 있었다. 결국 그것을 찢듯이 벗겨냈다. 그래도 편의점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걸로 샀는데. 그 누구보다 조상님이신데 정작 성기는 외국 사이즈라니,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있을까.

    침으로 범벅이 된 콘돔을 저 멀리 던지고 혓바닥을 내어 귀두를 핥았다. 남아 있던 콘돔의 찝찝한 맛을 날 것의 흔적이 덮었다.

    구별할 것 없이 뜨거운 숨이 터졌다. 뒤이어 아직 사정하지 않은 성기를 다시 물었다. 어차피 성병 따위를 걱정해 콘돔을 씌운 게 아니었으므로 망설임은 없었다. 장애물 없이 곧장 닿은 성기는 입천장을 찌를 때마다 선액을 뱉어냈다.

    “어쩐 일로 이런 일을 하실 생각을 다 하셨는지…….”

    꽉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린 해가 내 뒷머리를 다시금 부드럽게 감쌌다. 무언의 물음에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 순간 누르는 힘에 맞춰 성기가 목구멍까지 찌르며 들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고 입을 더 크게 열었다.

    “으흑, 읍, 욱.”

    귀두를 머금고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고 벌어진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흥건하게 고인 침은 삼키지 못해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종내에는 침을 삼키려 한 목젖이 제멋대로 움직여 성기를 조였다. 그럴 때마다 위에서 터지는 신음과 힘이 들어가는 팔이 좋아 밀어내지도 못하고 꾹 참았다.

    그러나 허리짓과 함께 성기가 식도로 쑥 넘어왔다고 느낀 순간만큼은 반사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지지대 삼고 있던 허벅지를 손으로 급하게 밀어내며 상체를 숙였다.

    “욱, 쿨럭, 쿨럭! 흡…….”

    “괜찮으십니까?”

    내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헛구역질을 삼키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해의 것은 불뚝 서서 아직도 사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진정하라는 듯 입을 맞추려는 해를 밀어냈다. 재차 성기를 쥐자 그가 곤란한 낯을 했다. 성기가 바짝 섰지만 해는 그것을 다시 내 입에 넣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것을 잡아 흔들며 끝만 살짝 머금었다. 여전히 컸지만 귀두만 머금으니 이전보다는 버틸 만했다. 나는 갈라진 틈 사이를 혀로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그냥 빨리 싸…….”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성기가 크게 꺼덕였다. 그가 기둥을 잡은 내 손 위에 그의 손을 겹쳤다. 느릿하게 문지르던 그것은 점차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충실하게 끝을 할짝이며 그가 자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해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허리가 단단하게 굳었다.

    나는 그가 내 입에서 성기를 빼내 빠르게 훑는 것을 보다 사정하는 순간 그의 팔목을 붙잡고 아래로 내렸다.

    “……!”

    뜨겁고 꿉꿉한 액체가 얼굴 위에 잔뜩 흩뿌려졌다. 몇 번 정액이 끼얹어지고 나자 나는 눈가를 대충 훔치며 눈을 떴다. 그는 성기를 쥔 채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간 많은 모습을 봐온 내게도 신선한 얼굴이었다.

    나는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했다. 고구려의 초대 대왕이 되는 운명을 타고날 만큼 정복욕이 가득한 그가 이 장면에 동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평생을 키워준 형님이 무릎을 꿇고 제 성기를 빨아준 것도 모자라, 그 얼굴에 씨까지 뿌리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저 표정마저도 영악해 보였다. 그가 진정으로 밀어냈다면 내가 밀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으므로.

    나는 혀를 내어 입가에 묻은 정액을 핥았다. 맛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기분은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묘한 만족감과 함께 흥분이 올라왔다. 이래서 연인 간에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거구나.

    마주한 눈에서 해도 그 열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허리가 잡혀 단숨에 일으켜 세워지기가 무섭게 입술이 맞붙었다. 그는 곳곳에 묻은 정액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빨더니 손을 내려 바지 속을 파고들었다. 노골적인 손짓이 살집을 벌리고 구멍을 파고들었다.

    “하아… 천천히…….”

    유난히 빡빡한 느낌에 나는 낮게 신음하며 해의 팔을 잡았다. 그가 혀를 차더니 하나둘씩 밀어 넣던 손가락을 빼냈다.

    “몸이 바뀌어 그런지 뒤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아… 이거 써.”

    나는 몸을 굽혀 비닐에서 다른 박스를 꺼내 들었다. 콘돔과 함께 구매한 낱개 포장형 젤이었다. 자취방에는 구비해 둔 윤활제가 아무것도 없어 혹시 몰라 집은 것인데 예상보다 더 유용하게 쓰일 듯했다.

    해가 눈썹을 올리더니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갔다. 곧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이 다시 입구를 열었다. 이전보다 수월해진 움직임에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런 것들은 대체 어찌 알고 계시는지…….”

    “여기선 별로 특별한 물건도 아니, 윽, 흐읏!”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이 예민한 부분을 찾아 짚었다. 언제 느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허리가 떨렸다. 나는 눈을 꾹 감은 채 하나둘씩 늘어가는 손가락을 견뎠다. 벌써부터 휘말려 진을 빼면 이어지는 밤을 버티기 어려웠다. 이걸 깨닫기까지 몇 번의 고난을 겪었던가. 해가 내 귓불을 잘근거리더니 낮게 속삭였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저 커다랗고 선명한 면경이 몹시도 신기하다 여겼습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뜨고 잊고 있던 거울을 마주 보았다. 그 안에는 온몸에 발긋하게 열이 올라 성감에 취한 얼굴을 한 내가 있었다. 해는 팔로 내 가슴을 가로질러 고정하더니 남은 손으로 천천히 뒤를 쑤셨다. 나는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쾌락에 물결치는 낯선 이를 보았다.

    정사 중인 스스로의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충격을 동반했다. 굳어 있던 것도 잠시, 나는 몸부림을 치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외면하기 위해 애썼다.

    “흐윽, 싫, 싫어… 그러지 말고 침대로 가자… 응?”

    그러나 언제 사정했냐는 듯 뻣뻣하게 서서 끄덕이는 그의 성기는 이미 엉덩이골 사이를 느릿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파고들듯 주변을 왕복하는 성기의 느낌에 불안하게 몸을 떨었다. 어서 들어와 줬으면 하는 마음과 이런 모습으로는 싫다는 마음이 부단히 싸우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해는 내가 갈등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말릴 새도 없이 귀두가 뒤를 파고들었다.

    “아!”

    나는 반사적으로 거울을 짚었다. 정사가 익숙하지 않은 몸으로 받는 성기였지만 제대로 된 윤활제 덕분인지 성기는 예상보다 수월하게 진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큰 성기가 버겁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몸에서 힘을 빼려 노력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사이 성기는 몸속을 드나들며 제집처럼 익숙하게 약한 부분을 찔러댔다. 내벽의 한구석이 마찰과 흥분으로 인해 금세 부풀었다. 뭉툭한 끝이 고작 스치는 것만으로도 몸이 바들거리며 떨렸다.

    “흐응, 흣, 흐윽!”

    “형님, 고개를 드십시오.”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언뜻 보이는 붉게 달아오른 몸이 견딜 수 없게 부끄러웠다. 머리 위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깊숙이 파고들던 성기가 잠깐 물러나는가 싶더니 그가 몸을 조금 숙였다. 아차 하는 사이에 두 다리가 붙잡혀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는 놀라 짧게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 아! 흐아!”

    순식간에 지지할 곳을 잃는 기분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고구려에 있을 때도 가끔 벽에 몰아붙여져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은 적은 있지만, 그땐 최소한 지탱할 단단한 벽이라도 있었다. 지금의 나는 속절없이 두 다리를 벌리고 등을 그에게 기댄 채였다.

    그러자 감출 것 없이 거울 앞에 내 모습이 드러났다. 채 닦이지 않은 정액이 묻은 얼굴과 그가 만져서 부은 가슴, 뻣뻣하게 서서 흔들리는 성기…….

    무엇보다 뒤를 파고드는 거대한 물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 다리를 단단히 잡은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가 허리짓을 할 때마다 중력에 의해 평소보다 성기가 깊게 파고들었다.

    나는 그가 혹시라도 손을 놓아 몸이 꿰뚫려 버리진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평소라면 뒤늦게 풀렸을 안쪽도 꾹 누르는 그의 것에 밀려 억지로 벌어졌다.

    “그, 그만…… 흣, 내려줘, 응?”

    이러다 끝까지 들어올지도 모른다. 나는 꽤나 실현성 있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동안은 한두 번 사정 후 녹진하게 풀어진 뒤에야 남은 길이를 전부 다 밀어 넣곤 했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니 오늘 밤 유독 충동에 휩싸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한 예감에 서둘러 팔을 꺾어가며 그의 어깨를 쥐었다. 그 상태로 억지로 몸을 위로 올리려 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재촉이라 생각했는지 기둥을 한껏 빼낸 그는 짧은 순간 내 다리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아! 아흑!”

    짧은 추락감과 함께 비명을 닮은 신음이 터졌다. 뭉툭한 끝이 무자비하게 안을 갈랐다. 그는 빠져나가는 대신 열린 길이 닫히지 않도록 안을 휘저었다. 인지할 새도 없이 내 성기가 파르르 떨리더니 정액을 뱉어냈다. 몸이 바뀌었어도 성감은 영혼에 각인되었는지 고통보다 쾌감이 더 먼저 치달은 탓이었다.

    나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거울을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정액이 번져 저 달아오른 얼굴을 그저 감춰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해는 쉬지 않고 강하게 허리를 짓쳤다. 앞으로 숙이고 있던 상체가 그대로 거울에 부딪혔다. 성감이 올라 뾰족하게 선 유두에 차가운 유리가 닿자 찌르르 전기가 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방금 사정한 아래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

    “침대, 읏, 침대로 가자… 여기 너무 차갑, 하으!”

    “아프십니까?”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기보단 매번 쾌감에 몸서리치는 스스로가 거북할 뿐이었지만 순순히 털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호소에 해가 혀를 차더니 한쪽 팔로 배를 감싸 안았다. 나는 몰래 안도의 숨을 삼키며 풀려난 쪽 다리를 내리려 했다.

    그러나 발이 땅이 닿기 전, 그가 다른 쪽 다리를 잡고 있던 팔로 두 다리를 모두 모아 잡았다. 성기는 여전히 뒤를 파고든 채였다. 그는 그 상태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반쯤 빠졌던 성기가 다시 들어차며 안쪽을 마구잡이로 찔렀다.

    “흐응, 흐, 아읏! 읍!”

    나는 잡을 곳도 없어 허우적대다 결국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현관에서 침대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나는 해가 내 몸을 침대 위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부들대는 무릎을 이끌고 앞으로 기어갔다. 자취방이 좁다는 것에 이렇게 감사한 날이 올 줄 몰랐다. 그 상태로 몇 걸음만 더 옮겼다면 결국 끝까지 들어온 성기가 뱃가죽을 뚫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배를 감싸고 숨을 고르는 동안 한걸음 물러선 해는 아직도 벗지 않은 옷을 찢듯이 탈의했다. 잠시 후, 언제 보아도 완벽한 육체가 다시 내 위에 드리워졌다. 그는 아직 닫히지 않은 입구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흐읏…….”

    이미 시간이 꽤 지난 탓에 사정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의 여유 없는 몸짓 끝에 드디어 몸속에 뜨거운 액체가 퍼졌다. 이윽고 아직 단단한 성기가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나는 멋대로 조여드는 내벽을 무시하기 위해 애쓰며 빛에 살짝 가려진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는 내 방에 막 들어왔을 때처럼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물었다.

    “왜?”

    “사방이 온통 형님의 내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야 내 집이니 내 냄새가 묻어 있는 게 당연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그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마치 제가 모르던 시절의 형님께 둘러싸인 느낌이라, 어쩐지…….”

    “…….”

    “아쉬운 기분이 듭니다.”

    정작 저는 모르던 세상에서 살아가신 시절일 텐데.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해는 정말로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만 온 얼굴을 찡그리며 미소 짓고 말았다.

    그가 무엇을 안타까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의 내 시절을 삼키지 못해 안달을 내는 것이다. 그의 삶에는 매 순간 내가 함께했지만 내 삶 속에는 그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있으므로.

    어쩌면 이렇게 맹목적이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을까? 문득 내일 그와 함께 가면 좋을 곳이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털어놓기 전에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름을 불러줘.”

    이제는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내 것. 그 이름을 부를 때면 해는 항상 왼쪽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마치 눈이 부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그의 입에서 숨이 터져 나오기 직전에 입술을 겹쳤다.

    “으음…….”

    어딘가로 던져 놓은 휴대폰에서 12시를 알리는 알림음이 짧게 울렸다. 나는 입술을 떼고 눈을 맞췄다. 해의 까만 눈동자는 주위가 아무리 어두워도 찾을 수 있었다. 그 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하듯 목소리를 죽여 속닥거렸다.

    “벌써 하루가 지났어. 이제 내 생일이야.”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 어째서입니까?”

    그 말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별것도 아닌 물음인데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밤 12시가 아닌 떠오르는 해로 하루를 구별하는 네겐 당연한 궁금증인데도. 새삼 그 차이가 우리가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를 느끼게 했다.

    동시에 짧게나마 서로가 질리지 않을까 고민했던 순간들이 모두 어리석게 느껴졌다. 나는 너를 더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그리고 내가 허투루 흘린 숨결 하나마저 삼키지 못해 안달 내는 너는 나 홀로 간직한 시절을 탐내기에 바쁘겠지.

    “내일은 내가 자랐던 곳으로 가보자. 엄마랑 가람이도 보고, 붉은 수국도 건네주고 오자.”

    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나는 기대감에 발그스름하게 열이 오르는 귓가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탐욕스러운 내 작은 알을 위해 얼마 안 되는 밑천을 내놓은 꼴이었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나 못지않게 그리움에 지쳤을 네가, 만나보지도 못했을 때의 나를 그리느라 또다시 그 멍에를 멘 것이 못 견디게 감사했으니.

    ***

    “다녀왔습니다.”

    가람은 현관문을 열며 작게 중얼거렸다. 예상대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매년 형의 생일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유골을 안치해둔 봉안당에 가서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셨다. 저 역시 회사에 반차를 내고 나온 참이었다.

    옷만 서둘러 갈아입고 가야겠다. 가람은 신발을 벗은 뒤 습관적으로 형에게도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

    그러나 그는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채 눈을 깜빡여야 했다.

    평생토록 머무를 줄 알았던 작은 집에서 조금 더 넉넉한 새집으로 이사를 오며 신발장 위의 진열대도 넓어졌다. 물론 여전히 그곳을 차지한 물건은 단 두 개뿐이었다. 수국 화분 하나와 형을 담은 액자 하나.

    그러나 오늘따라 형의 사진 앞에 붉은 수국이 한 송이 놓여 있었다. 엄마가 갖다 두셨나? 그렇다면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파란 수국만을 두었으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만 가람은 종종 파랗게 물든 꽃잎이 염치도 없는 자신을 대신해 눈물을 흘려주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의외로…….

    “……붉은색도 예쁘네.”

    그는 피식 웃으며 꽃잎을 툭 건드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화사한 색을 앞에 둔 형이 활짝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생일 축하해, 형.”

    가람은 작게 중얼거리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꽃잎이 살랑, 흔들렸다.

    해연정기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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