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하나.
아휴. 첫 임무를 무사히 끝냈다. 아무리 수궁 신하들 중에서도 용맹하고 똑똑한 존재들만 골라 넣었다는 훌륭한 뭍 감사대 소속이어도 그렇지, 역시 인형 안에 갇혀 움직이는 건 힘들다.
그래도 주몽 도련님의 허리춤에 매달려 본 그 세상은 어찌나 별천지던지! 휑그르르 돌아가는 눈을 단속하느라 물의 품으로 돌아갈 뻔했다.
아무튼 노고도 치하받았겠다, 이만 바위 깊숙한 곳에 숨겨둔 내 몸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지금 몸으로 뭍에서 생활하는 것도 편하긴 하지만 역시 고향이 최고지.
교육받은 대로라면 몸이 바짝 마르거나 심하게 다치면 다시 인형으로 돌아가 영혼을 꺼낼 수 있다. 그래서 그 길로 가장 볕이 좋은 자리에 앉아 햇볕을 쬐기 시작한 참이다.
움냐냐.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 햇빛이면 이틀 내로 돌아갈 수 있겠다!
둘.
“자라야. 어디 아파? 영 눈을 안 뜨네……. 등껍질도 자꾸 마르고. 왜 이러지?”
[…….]
등 위로 또, 또! 물이 쏟아졌다! 내가 애써 반이나 말려놨는데!
벌써 열흘째다, 저 인간이 자꾸 성가시게 구는 바람에 몸이 마르지 않은 날이!
마음 같아선 왁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꾹 참았다. 며칠째 죽은 척을 하고 있는데 고작 이따위 도발에 넘어갈 수는 없다. 원래 인형을 통해 뭍을 오가고 말도 할 수 있다는 건 일급 비밀이란 말이다!
이미 임무를 수행하며 들켰다곤 하나 한낱 인간에게 또다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 조금만 더 참자. 나는 애써 성질을 죽였다. 며칠만 더 고생하면 결국 죽은 줄 알고 날 놓아주지 않을까…….
물론 내가 이 인간의 집요함을 너무 우습게 보았을 때의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인간이 지원군을 데리고 다시 납시셨다.
“해야, 봐봐. 자라가 눈을 안 떠. 어쩌지?”
“제 눈에는 큰 탈이 없어 보입니다만…….”
등껍질에 목을 쑥 집어넣고 있는데도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미 꾀병이라는 걸 다 알아챈 눈치였다. 하긴, 고작 ‘지원군’이라기엔 너무 귀하고 대단하신 분이셨다. 왜 다 알아놓고 나를 억지로 깨우지 않는지는 조금 의문이었지만.
눈을 꾹 감고 있으려니 장차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실 분께서 처음 듣는 목소리로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저 짐승은 그만 놔두고 저와 밤 산책을 가주세요. 제가 좋은 곳을 봐두었습니다.”
아… 그래…. 그냥 나에게 신경을 한 톨이라도 쏟는 게 싫으셨던 거구나…….
“자라가 아픈데 어떻게 그래. 역시 네가 커피를 줘서 그런가 봐. 그러게 왜 커피를 먹여서……. 이걸 어쩌지? 유화 님을 뵐 낯이 없네.”
그러나 홀로 심각한 인간은 다른 원인을 짚어냈다. ‘커피’라. 낯선 단어에 팔다리가 움찔 떨렸다. 정황상 임무 도중 주몽 도련님이 날 깨우기 위해 부은 까맣고 쓴 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고 고개가 끄덕끄덕 움직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장장 삼백오십칠 년을 살면서 그런 건 첨 먹어봤다. 심장이 진주조개를 발견한 것처럼 펄떡펄떡 뛰고, 느림보처럼 휘젓던 팔다리도 씽씽하게 움직이더라니까. 힘이 넘쳐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어차피 이대론 평생 죽은 척을 해도 날 놓아줄 것 같지가 않은데. 이왕 또 비밀을 들켜야 할 바엔 그 까만 물을 한 번 더 먹는 게 낫지 않을까?
결심은 빠르고 행동은 그보다 더 빨랐다. 나는 슬그머니 목을 내밀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거… 그, 커피… 라는 쓴 물 좀 더 있소? 내 그걸 먹으면 힘이 좀 날 듯도 하구, 움…….]
잠시 놀란 인간의 얼굴이 곧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내 알 바냐! 옆에 계신 주몽 도련님의 얼굴은 그보다 좀 더 무서웠지만, 괜찮다! ‘커피’만 먹으면 다시 힘이 날 테니 그 틈을 타 쏜살같이 도망가야지!
셋.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커피’는 그 꿈 세계에만 존재하는 물이란다.
며칠을 기운 없이 보냈다. 그 물만 먹으면 기운이 펄펄 났는데……. 먹을 수 있을 듯하다 못 먹으니 괜스레 더 기운이 없는 것 같다.
넷.
내가 인간을 오해한 것 같다. 인간은 성품이 아주 뛰어난 놈이 틀림없다. 글쎄, ‘커피’를 못 구하니까 그 대신이라며 풀 향이 나는 초록 물을 가져오지 뭐야.
속는 셈 치고 먹어 줬는데 요거 요거, 아주 물건이다. ‘커피’보단 덜해도 두 눈이 번쩍 뜨이고 심장을 쿵쾅대게 해준다. 이름도 외우기 쉽다. 푸를 녹 자를 써서 녹차. 입에 굴리기만 해도 향기로운 명칭이다.
나는 이쯤에서 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괴롭혔던 인간을 용서해 주기로 했다.
다섯.
인간, 아니 도령이 그 사랑스러운 녹차를 매일 아침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진가를 알아본 게지.
모름지기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하는 법! 아무 데나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꼴을 보아하니 영 모자란 인간 같은데, 곁에 머물며 도울 게 없나 좀 찾아봐야겠다. 에헴. 절대 녹차를 더 얻어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섯.
내 빈틈없는 감시망에 드디어 의심스러운 존재가 걸렸다. 믿기 어렵겠지만… 바로 주몽 도련님이시다.
아마 다른 인간들이 들으면 기겁을 하며 날 비난할 게다. 그야 그럴 만도 한 게 낮에는 인간을 둘도 없는 보물을 다루는 듯 제 곁에서 떼어놓질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누구더냐. 며칠을 잠복해 기어코 수상한 점을 잡아냈다. 바로 주몽 도련님만 왔다 가시면 도령의 얼굴이 홀쭉해지고 하루 온종일 누워 골골댄다는 것이다!
밤이면 둘만 들어가 새끼 멸치 하나 못 들어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질 않을 때부터 내 이상하다 여겼지. 그러고 나면 다음 날 아침에 나오는 도령의 안색이 아주 파리한 게, 필경 말 못 할 흉악한 짓을 당하는 게 틀림없다.
이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하지. 가장 문제는 도령이 그래도 제 동생이라고 주몽 도련님을 감싼다는 것이다. 내가 넌지시 말해도 듣질 않는다. 봐봐라.
[도령, 혹시 주몽 도련님이 괴롭힌다면 언제든 이야기하십쇼. 나도 도령 하나 숨길 바위쯤은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얼마나 큰데. 너처럼 쪼그마한 자라가 그런 바위를 가지고 있다고?”
[익! 내가 그리 힘이 없는 줄 아쇼? 내가 뭍에서 놀아주니 만만한 줄 알지! 나도 고향에선 손에 꼽히는 자라였다오!]
딴에 생각해서 제안했건만! 곧장 피식하고 비웃는 모습에 빈정이 상했다. 까만 물은 아니더라도 똑같이 기운이 나게 하는 초록 물을 직접 재배까지 하는 정성을 보여주길래 내 친히 말한 것이거늘!
“알지, 알아. 그래도 해가 괴롭힌 건 아니야.”
무엇을 제안하든 당사자가 들을 마음이 없는데 더 지껄여봤자 무엇할까. 매번 챙기는 꼴에 보는 자라 속만 다 터지지. 아휴! 저 미련하고 아둔한 인간 같으니라고!
일곱.
매일이 어제와 같고 오늘이 내일과 같아 한동안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좀… 뭔가 다르다!
시작은 평소와 달리 뻣뻣한 분위기로 시작된 도령과 주몽 도련님의 식사였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모두 좋지 않았다. 그러다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주몽 도련님이셨다.
“왜 제 곁에 서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알겠어?”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양쪽 얼굴을 보다 목을 움츠렸다. 여차하면 돌덩이가 된 척 등껍질에 몸을 숨길 속셈이었다. 하지만 주몽 도련님은 화를 내는 대신 눈꼬리를 한껏 내리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일단 저 표정이 나오면 상황은 반쯤 끝났다고 보면 된다.
“형님께선 이 나라의 왕후이십니다. 그간 앞에 나서시는 걸 부담스러워하시는 듯해 가만있었지만 그날까지 저 홀로 입장한다면 너무 쓸쓸할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도령의 얼굴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어미인 유화 공주마마께서도 저렇게까지 도련님을 가엽게 여길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이번엔 정말 싫은지 도령은 주먹을 꽉 쥐고 반박했다.
“그저 건국제일 뿐….”
“형님과 제가 하늘 아래 하나로 맺어진 날이기도 하지요.”
“……뭐라고?”
“설마 지금에 이르러 모르셨다 말씀하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날 모든 대신들의 앞에 서서 한 잔의 술을 나눠마시며 약식으로나마 혼례를 치렀잖습니까.”
도령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자라가 봐도 경악과 당황을 담고 있는 표정에 주몽 도련님의 표정도 점차 썩어들어갔다. 나는 도령이 다급하게 변명하는 걸 흥미롭게 구경했다.
“나, 나는 몰랐… 네가 왕후, 왕후 하는 것도 그냥 타령하는 건 줄 알았지!”
“세상 어느 왕이 그런 타령을 하며 왕후궁을 내어 드린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그렇지. 세상천지 모든 걸 내줘도 장난으로 곁자리를 내주는 이는 없다. 자라도 아는 걸 인간은 아직도 몰랐나 보다.
“……괜찮습니다. 비록 저만 홀로 혼례를 올린 처지가 되었지만……. 이제라도 아시게 되었으니 저는 그걸로 족합니다….”
주몽 도련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가증을 떨어댔다.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즉에 뭐에 씐 도령은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달랬다.
“미안해, 해야. 진짜 미안. 나는 정말 몰랐지…. 대체 누가 말도 안 하고 혼례를, 아니 그전에 어떻게 여기서 남자끼리 혼례식을 올릴 거란 생각을 해…….”
내가 모르는 새 세상이 언제 그렇게 개방적이 되었냐고, 억울한 듯 외치는데 뒷말은 잘 못 알아들었다. 아무튼 언제 싸웠냐는 듯 분위기는 점점 도령이 싹싹 비는 걸로 흘러갔다.
“그래도 역시 왕후는 아닌 것 같, 아니 미안해! 내, 내가 어떻게 해줄까?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풀릴까?”
화룡점정은 제풀에 중얼거리던 도령이 상처받은 표정을 꾸며내는 주몽 도련님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못 지킬 말을 뱉은 거였다. 그제야 도련님이 꼭꼭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제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실 겁니까?”
불길하다, 불길해. 나는 한탄을 하며 도령이 마련해 준 내 집으로 꾸물꾸물 기어갔다. 떨어지지도 않은 눈물방울에 제 몸을 넘기는 저 꼴 좀 보게나. 오늘은 뭔가 다르긴 개뿔,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여덟.
그 뒤로 이레가 지났다. 간밤에 주몽 도련님이 붉고 고운 천들을 잔뜩 들고 들어간 뒤로 도령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홉.
드디어 도령이 밖으로 나왔다! 해가 하늘에 뜨다 못해 꼭대기에 오른 때였다.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얼굴이 수척하고 내도록 허리를 짚고 있다. 나는 그가 궁에서 일하는 인간이 가져다준 편지를 읽는 동안 곁에서 알짱거렸다. 나름 걱정을 했던 터라 이리 일어난 모습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춘아야. 폐하께 내가 뵙자고 했다고 전해줄래?”
……하지만 도령은 아닌가 보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도령의 얼굴을 보다 등껍질 속으로 쏙 숨었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럼 오늘은 좀 기대해봐도… 되려나? 심장이 콩콩 뛴다.
***
“우리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자.”
철 지난 로맨스 영화에도 나오지 않을 만한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운 대사였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었다. 제람은 결의에 찬 눈으로 앞에 앉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잘생긴 얼굴이 설핏 굳었다.
얄미울 정도로 마주한 내내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입이 다물린 것은 꽤 통쾌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언제 굳었냐는 듯 안면 근육을 부드럽게 푼 주몽이 제람이 가장 약해지는 미소를 올렸다. 동시에 그가 제람의 밥그릇 위에 빛깔 좋은 떡갈비를 얹었다.
“우선 드십시오. 오늘 내도록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으셨잖습니까. 이러다 몸 상하십니다.”
단식 투쟁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지 살살 어르는 말투였다. 그러나 간밤에 저 미소에 홀려 당한 일만 떠올리면 오늘만큼은 어림도 없었다. 제람은 수저를 드는 대신 팔짱을 단단히 꼈다.
이 나이를 먹고 정말 애처럼 단식 투쟁을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정말로 속에서 음식을 받지 않았다. 반은 아직 가시지 않은 수치심 때문이고 나머지 반은 아직도 아랫배에 뭐가 들어찬 것 같은 이물감 때문이었다.
아니, 그럼 결국 다 저놈 때문이니까 한 가지 이유네? 한결 뾰족해진 눈초리에도 주몽은 모른 척 전을 집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입에 맞지 않으시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내 말 들었어?”
“무슨…… 설마 시간을 갖자는 것이 제게 하신 말씀이셨습니까?”
그럼 너 아니면 누구겠냐. 이 나라의 초대 대왕이자 폐하, 주몽 등 지칭하는 말은 많았지만 그에게는 ‘해’라는 애칭이 더 익숙한 사람. 그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부터 곱게 키워 이런 관계로 발전할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남자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형님…. 그리 보시면 무섭습니다.”
눈치를 보던 주몽이 눈꼬리를 축 내리뜨렸다. 이제야 말 돌리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제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딱 잘라 말을 꺼냈다.
“안 되겠다. 나 잠깐 부여에 갔다 올게.”
주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법 귀여운 모습에 입꼬리가 씰룩거리려 했지만 제람은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그것만으로는 밤새 고민한 결심을 무르기에 부족했다.
아니, ‘밤샘’보다 오후 내도록 고민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누구 덕분에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야 겨우 눈을 떴으니까.
제람은 이를 빠득 갈았다.
곱디고왔던 붉은 혼례복은 부드러운 천이 모두 찢어져 넝마가 되었다. 그뿐이면 대충 싸웠다고 둘러대기라도 할 텐데(아무도 믿지 않을 건 알았지만 이건 사회적 체면의 문제였다.) 거기에 질펀하게 묻은 하얀 흔적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수치스러워 그대로 기절하고 싶으리라.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면 남자가 치마를 입은 걸 보고 아래를 세울 리가 없었다. 치마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지도 않을 거고, 끝까지 벗는 것조차 막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전에 싫다는데 입히지도 않았겠지!
주몽의 곁에 있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기꺼이 안고 가기로 한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전과 다른 이름이 붙은 해와의 관계부터 ‘태자’라는 위치를 포기하고 타국으로 넘어오며 치러야 했던 대가까지. 그래도 뭐든 괜찮으리라 믿었다. 실제로도 제법 그러했고.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평소의 해는 마치 부드러운 순두부처럼 말랑말랑한 아이였다. 행동 하나에도 날 배려하는 모습에 가끔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덕분에 말 좆 사건을 잊은 게 문제였다.
괴상망측한 성벽은 겪어본 경험이 없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스마트폰이 있으면 검색이라도 해보련만, 남부끄러워서 어디다 털어놓을 수도 없고. 혼례복이나 말 좆은 갖다 버려도 해를 갖다 버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겨우 생각해낸 것이 거리를 두는 방법이었다. 저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 홀리는 건 삽시간이니 잠시 떼어놓고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찬찬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내심 이런 강경수를 두면 스스로 반성이라도 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바가 있기도 했다.
제람은 주몽이 오기 전까지 적었던 편지를 눈짓했다.
“가람이도 본 지 오래됐고, 이번 답장은 직접 주고 싶으니 겸사겸사 다녀올게.”
사실 편지에 별다른 말은 적혀 있지 않았다. 매번 오가는 안부와 일상, 소소한 마음들. 다만 이번 가람이의 편지에는 유난히 피로와 그리움이 묻어나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제 딴에는 감추려는 모양이지만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지난여름, 오랫동안 자리를 보전하던 왕이 죽고 가람이 즉위했다. 모든 상황을 다 알지는 못했으나 아마 순탄한 즉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 잇속 채우기에 급급한 귀족들이 그들을 짓누르는 가람을 순순히 왕위에 앉힐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즉위하고 한 번은 가봐야지 했는데. 지금이 적기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편지를 노려보던 주몽이 천천히 입을 뗐다.
“…사흘만 말미를 주십시오. 급한 일만 해결하면 닷새 정도는 자리를 비울 수 있을 겁니다.”
“왜?”
주몽은 대답 대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이 가자는 거구나. 그 진득한 시선에서 제람은 어렵지 않게 진의를 읽어냈다.
설마 ‘시간을 갖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걸까? 잠시 의심을 품었으나 똑똑한 아이가 속뜻 하나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이건 의도적인 무시였다. 가볍게 거리를 두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던 마음이 점차 삐딱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넌 여기서 나라 잘 다스리고 있어. 일국의 왕이 자리를 비운다니 아니 될 말이지.”
“그리 말씀하시는 분이 어찌하여 형님의 위치는 중히 여기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나 주몽은 물러서지 않았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되레 방향을 돌려 그를 붙잡았다.
저 위치란 설마 와, 왕후를 말하는 걸까. 노골적인 언사에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주몽과 제람의 생각이 달랐다.
솔직히 ‘그래, 단둘뿐인데 뭔들 못 해주겠냐.’라는 마음으로 혼례를 치른 셈 치고 별짓을 다 해준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위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그에게 ‘왕후’라는 지위가 간절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두 사람의 마음만 맞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제람은 이런 사소한 일을 이루고자 대신들과 얼굴을 붉힐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조심스러운 처지다. 옆 나라에서 농민이 농사를 짓겠다고 넘어와도 고까울 판에 태자가 넘어와 떡하니 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폐위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정치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위치였다. 이 땅에서 나고 자라 관료가 된 자들은 내가 얼마나 고까울까.
아무도 대놓고 눈치를 주진 않았지만 절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괜히 흠 잡힐 일을 만들어 해까지 욕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작 주몽은 그 옆 나라에서 건너온 또 다른 놈이 나라까지 갈아치운 판에 뭐 어떻냐고 말했지만. 물론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왕으로 인정받은 사람과 하루아침에 들어앉은 낙하산이 뭐가 같다는 건지. 부여를 뒤로한 순간부터 제람은 그저 힘없는 평민일 뿐이었다.
사실 부여는 누구와 가도 상관없었다. 해와 함께 가면 지루할 일도 없이 안전하게 다녀오겠지. 그럼에도 순순히 수긍하고 넘어가지 않은 것은 어느새 흐려진 본래 대화의 본질 때문이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회피에 제람은 단호하게 잘라 물었다.
“해야. 지금 내 말뜻을 모르겠어? 시간을 갖자고. 그래서 혼자 다녀오겠다는 거잖아.”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어젯밤의 열기는 마치 거짓말 같았다. 식사 시중을 들던 어린 궁인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궁인들은 하는 일이 일이니만큼 모시는 사람의 기분에 민감했다. 제람은 죄 없는 아이에게 살그머니 웃어주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앳된 얼굴이 슬며시 풀어졌다. 작게 피는 미소에 괜스레 뿌듯했다.
그 순간 주몽이 젓가락을 쾅, 내려놓았다. 놀란 어깨가 펄떡 튀었다.
“식사는 여기서 마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반을 드실 때 다시 오지요.”
말릴 새도 없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이 일어나는데 멍하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자마자 간단한 묵례로 인사를 마친 주몽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방을 나갔다. 제람은 허망하게 그 등을 바라보았다.
한바탕 휘저어진 공기가 가라앉고 나서야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저녁때 다시 온다고? 내일 아침도, 하다못해 밤도 아니고?”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주몽과 그는 매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그러니 저 말은 우리가 ‘시간을 가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갔다.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분노의 불씨가 다시 지펴지는 순간이었다.
***
소서노는 그릇이 크고 대범한 여인이었다. 홀로 키우는 두 자식과 부강한 나라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여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함께 나라를 세운 사내가 훌쩍 데리고 온 저 사내는 묘하게 눈길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라는데, 그보다 여남은은 어려 보이는 용모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딘가 처연해 보이는 분위기라든가 핏기 하나 없는 고운 얼굴을 하고서 주변의 낮은 것들까지 챙기는 모습이 그랬다.
그녀는 사내가 손수 유리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고민이 있는지 평소와 달리 그의 눈매가 살짝 좁혀져 있었다. 그러나 손길만은 다정해 어느새 풀어졌던 옷고름이 단단히 모양새를 갖췄다. 그가 제법 살이 오른 아이의 궁둥이를 툭툭 쳤다.
“자, 됐다. 이제 얼른 가 봐. 조심히 놀고.”
“네에!”
씩씩하게 대답한 유리가 저 멀리 서 있는 그녀의 아들들을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기다리고 있던 온조와 비류가 흙 묻은 손으로 작은 손을 끌어당겼다. 세 아이는 금세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조잘거렸다.
사내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소서노는 그 뒤에 서서 입을 뗐다.
“이제는 제법 아이다워졌군요.”
“다행이지요. 같이 놀 만한 또래가 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마 유리를 흔쾌히 두 아이의 놀이 동무로 들여준 것에 대한 인사일 것이었다. 지금은 그가 돌보고 있다지만 유리는 엄연히 평민 출신이었다.
평소라면 허락할 리 없었지만 장래에 대한 투자라고 보면 못할 것도 없었다. 유리는 제법 영민한 아이였고, 그것이 아니었다 해도 이 사내는 살갑게 대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으니.
사내가 고운 눈을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텐데 다과상을 내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아이들은 궁인이 돌볼 테니 안으로 드시지요. 부인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내오라 이르겠습니다.”
“형님. 오반을 드실 때가 머지않았습니다. 지금 다과를 드시면 식사는 어찌하시려 합니까.”
그때 주몽이 교묘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소서노는 좀 더 짙은 미소를 그렸다. 그래, 이런 점이 바로 사내의 진정한 가치였다.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못해 무감각하다는 평을 받는 왕의 유일한 정을 받는 남자라니.
심지어 이 정은 단순한 우애 혹은 친애가 아니었다. 사내가 곁에 있지 않았던 시절부터 주몽을 봐 온 소서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기쁜 일이 생겨도 입꼬리 하나 올리지 않고 슬픈 일이 생겨도 동요조차 하지 않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백 일마다 사라져서는 팔 전체를 가로지르는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그때마다 그는 누구도 꺼낼 수 없는 절망의 구덩이에 빠진 사람 같았다. 그런데 듣자 하니 그렇게 피를 쏟는 연유가 그의 형님, 그것도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자자한 이 때문이라더라.
그에 한 번은 그를 비난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주몽과 한 배를 탄 사람이었다. 몸을 아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해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 날 주몽은 전투에 나가 활을 들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터져 두껍게 감아둔 천 아래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도 적군이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활을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이후로 소서노는 더 이상 그를 탓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가치가 있는 법이었다. 설령 그것이 그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도. 그녀는 멀리서 뛰어놀고 있는 그녀의 가치를 보다 눈을 돌렸다.
그래도 이렇게 감싸고 돌면 장난기가 올라오기 마련이었다. 소서노는 과장된 감탄사와 함께 손으로 입을 가렸다. 드러난 눈꼬리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대군께선 참으로 다정하기도 하시지요. 폐하께서 대군의 이러한 점을 닮으셔야 했는데.”
“네?”
“제가 폐하와 재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저 성격 때문이 아니겠어요. 만일 대군 같은 사내였더라면 고민도 않고 했을 텐데요.”
그녀가 눈가를 찡긋거렸다. 물론 말은 저렇게 했지만 만일 주몽이 흔쾌히 다음 대의 왕위를 그녀의 자식들에게 약조해 주지 않았더라면 기어이 그녀가 왕후의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사내는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눈을 접어 웃으며 부드럽게 받아넘겼지만.
그녀로서는 원하는 것을 얻어 냈으니 그가 궐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괜히 다른 여인의 치마폭에 휩싸여 늘그막에 본 자식을 왕위에 앉히겠다는 헛소리를 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사내라면 적어도 회임할 걱정은 없을 테니.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처음에는 경계하는 기색이었던 남자는 점차 마음을 열었다. 마음을 얻기가 길고양이보다 쉬운 사내였다. 조금만 잘해주면 넘어오니 왕이 전전긍긍 끼고 도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 주몽이 답지 않게 사내의 옷자락을 붙잡고 칭얼거리고 있었다.
“형님. 저런 말에 웃어주실 겁니까? 그러지 마시고 다과는 물리시지요. 제가 더 좋은 것으로 내오라 이르겠습니다.”
“폐하께선 지금 제가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이 아닙니까? 전 부인과 있을 테니 어서 가십시오.”
“제가 있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밀어내시는 겁니까.”
저는 매 순간 형님과 함께하고 싶은데…….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본성을 아는 그녀에겐 가증스럽기만 한 울림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사내는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도 걸려들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곤혹스럽게 달싹거리던 입술은 평소와 달리 단단한 일자를 그렸다. 호오? 소서노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사내가 드물게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이미 제가회의에 늦으셨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그럼 식사는 저와 하셔야 합니다. 단둘이 먹겠다 약조해 주지 않으시면 가지 않겠습니다.”
“지금 이게 무슨…. 하아. 알겠으니 어서 가십시오.”
가라니까. 얼른 안 가? 사내가 주몽의 귀에 입술을 붙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눈까지 부라려서야 주몽이 질질 발걸음을 뗐다. 천하를 호령하는 대왕을 다섯 살배기 아이처럼 다루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평소와 무언가 달랐다. 다투기라도 하셨나? 소서노는 한결 예리하게 사내의 낯을 훑었다. 조금 전에도 걸렸던 눈매는 이제 완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두 분께서 다툴 일이 뭐가 있을까. 이 다정한 사내가 웬만한 일로 화를 낼 리는 없고. 제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구는 주몽이 좀체 거슬리는 일을 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간의 태도로 보아 영 잡히지 않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서노는 우선 넌지시 말을 던졌다.
“쯧쯧. 약에 쓸 데도 없는 저 집착병은 어째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제가 못 볼 꼴을 보여드려서…….”
“대군께서 왜 사과를 하십니까.”
살짝 떠본 말에 사내의 낯이 금세 질렸다. 소서노는 그를 간단히 달래며 속으로 웃음 지었다. 월척이구나. 이거 조금만 더 쑤시면 무료한 인생에 재미있는 모습도 볼 수 있겠거니 싶었다. 사내가 곤란해지는 건 안타깝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싹퉁바가지 없는 주몽이 곤경에 처하는 걸 볼 수 있을까.
소서노는 우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사내가 있다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왕을 깎아내리는 멍청한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흠흠, 목을 고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뽑았다.
“아니, 저걸 다 받아 주고 계십니까? 이번에는 대체 무슨 일로 저렇게 사람을 몰아붙인답니까?”
“몰아, 붙이기까진 아니….”
“아니라뇨! 감시도 아니고, 저게 대체 뭐랍니까.”
소서노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람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분개에서 정말로 자신을 염려하는 마음이 묻어나왔다.
정말 남의 눈에도 해의 행동이 좀… 과해 보이나?
제람은 점점 소서노의 말에 빠져들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시간을 갖자’던 말 이후로 주몽이 그의 곁에 붙어 떠나지 않은 지 사흘이 지났다. 그는 제람이 당장이라도 도망갈 사람인 것처럼 잠시도 홀로 두지 않았다.
물론 그게 마냥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괘씸해서 그렇지 원래 보고만 있어도 화가 스르륵 풀리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작은 먼지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부여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무시하던 그 모습 때문일까. 시간을 갖자던 말은 받아들이기 힘든 성적 취향 때문에 꺼낸 것이었지만 정작 다른 모습만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제람은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사실… 요새 제 아우가 좀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잠시 고향에 다녀오려고 했거든요.”
“아우라면, 혹시 부여에…….”
“아, 네, 이번에 즉위한, 네…….”
“음…….”
소서노가 난감하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그 앞에서 제람은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다녀오고 싶다는 건 내 과한 바람이었을까. 보통 동생도 아니고 대국의 왕을 만나러 가는 것이니 가벼운 행동 하나에도 여러 관계가 얽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소서노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제람은 놀라 덜컹거리는 다과를 붙잡았다. 그녀가 호기롭게 외쳤다.
“남의 눈이 걱정되면 몰래 다녀오면 될 일입니다. 대군께서는 폐하만 보시고 이곳까지 홀로 넘어오셨는데! 어찌 그리운 가족을 보러 간다는 것까지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혼자는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 말을 꺼낼 틈도 없었다. 그녀의 눈이 기묘한 빛으로 번쩍거렸다.
“이건 기회입니다.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부여에 다녀오세요.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시면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제 말 들으십시오. 정계 내에서만이 아니라 연인 간에도 기 싸움은 존재합니다. 이건 작은 전투란 말입니다. 상대는 싸움에 능한 무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여, 연인…….”
“제가 책임지고 폐하를 붙들어 두겠습니다. 마음 편히 다녀오세요. 다만 혼자 가실 순 없으니……. 그건 마 대로에게 가보세요. 그라면 아마 흔쾌히 마마를 도와줄 것입니다.”
소서노는 끼어들 새도 없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제람은 그 기세에 억눌렸다. 듣다 보니 영 틀린 말 같지도 않다는 것이 크게 한몫했다. 분명 협보라면 옳다구나 도와줄 것이었다.
결국 제람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언제까지 귀엽다며 받아 주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매번 오냐오냐하면 애 버릇도 나빠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부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해, 아니 폐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얕보일지도 모르겠어요.”
주몽이 세 살배기 아기도 아니고 새삼 버릇이 잘못 들 일은 없겠지만 확실히 뭐든지 받아 주고 보는 방식은 나빴다. 이러다 적국과 긴밀히 조율할 일이 생겼을 때도 천지 분간 못 하고 요구만 하다 호되게 당할까 봐 걱정되었다.
이러다 치마폭도 아니고 같은 거 달린 사내에게 홀려서 나라를 망친다는 추문이 돌면 무슨 망신인지. 저야 괜찮지만 건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왕에게 붙기 적절한 소문은 아니었다.
“아, 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지만, 뭐… 아무튼 잘 생각하셨어요.”
소서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람은 결연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계획을 다 세우고 나자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식사는 결국 셋이서 함께했다. 소서노는 식사 내내 제람을 살갑게 챙겼다. 오히려 불편해 말리고 싶었지만 계획의 일환이라는 속삭임에 모른 척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식사 뒤에는 주몽이 긴히 논의할 일이 있다며 소서노를 붙잡고 일어섰다. 회의가 힘들었는지 올 때부터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는데 이제는 입매까지 단단히 굳은 채였다.
제람은 퉁퉁 부은 볼을 쿡 찔러보고 싶은 걸 참으며 그를 보냈다. 안 그래도 또다시 떨어지지 않으려 할 주몽을 어떻게 따돌려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나갈 채비를 하고 일어섰다. 혹시나 주몽이 일찍 돌아와 추궁할 것을 대비해 궁인들에겐 비밀로 한 채였다.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어도 몸은 여전히 남의 것이라 존재감이 옅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협보가 일하는 곳은 전에 가본 적이 있어 찾기 어렵지 않았다. 제람은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문 바로 옆에 자리한 책상에 앉아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제람은 머뭇거리다 말을 붙였다.
“저기……. 협, 아니 마 대로를 뵈러 왔는데요.”
“미리 약조하셨습니까? 대로께선 지금은 회의를 하러 가셔서 자리하고 계시지 않습니다만.”
“아…. 약조는 하지 않았는데. 돌아오는 데 오래 걸릴까요?”
남자는 마구 휘갈기던 붓을 멈추고 앞에 선 곱상하게 생긴 사내를 쳐다보았다.
이곳은 문관 관직 중에서도 가장 높으신 분의 개인 업무 공간이었다. 그만큼 이 안쪽까지 직접 찾아오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무엇보다 마 대로께선 약조를 잊으실 분이 아니었다. 결코 사람을 불러 놓고 회의를 가실 분이 아닌데, 약조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와선 이제 기다리기까지 하겠다는 사내가 의심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예의를 갖췄지만 묘하게 격 없는 말투와 귀티가 나는 외향이 마음에 걸렸다. 무턱대고 쫓아냈다간 큰 경을 칠지도 모른다.
“……일단 드시지요.”
남자는 의자에까지 쌓아뒀던 두루마리를 잔뜩 들어서 옆으로 옮겼다. 사내가 눈치껏 도왔다. 저 고운 손을 보면 귀족인가 싶다가도 망설임 없이 돕는 모습에 판단이 흐려졌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는 터놓고 묻기를 택했다.
“못 보던 얼굴인데, 혹시 어느 분 아래서 오셨습니까?”
“음, 저기, 폐하의 형님 되시는 분의 궁에서 왔습니다.”
“아!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폐하께서 따로 두고 부리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제가 못 뵌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폐하께서 그분을 길러주신 형님을 끔찍이 아끼신다는 것은 말단 궁인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니, 아끼는 게 다 뭐냐. 왕후궁을 내주고 전용 부서도 따로 마련한 데다, 전해 듣기론 폐하께서 머무시는 궁보다 왕후궁의 예산이 더 높게 책정되어 있단다. 직접 명하시며 ‘어차피 나는 그곳에서 더 많이 지내는데 무엇이 문제냐?’ 하셨다는 소문은 이미 유명했다.
원래 궐 소문의 절반은 믿을 것이 못 되었지만 남자는 이 형제에 대한 소문은 덜하면 덜했지 과장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왕후궁부터가 잘못 걸리겠다 싶은 소문은 일절 새어 나오지 않는 곳이 아닌가. 저부터도 이렇게 왕후궁에서 일한다는 관리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내 주제에 이런 기회가 다시 오기나 할까.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는 사내를 향해 은밀히 상체를 숙였다.
“저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예? 예,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조금 남사스럽지만… 요새 왕후마마와 폐하께서 금슬이 좋지 않으십니까?”
“예?”
사내의 얼굴이 단박에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왕후마마라니, 혹시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에이, 모른 척하지 마십시오. 귀관께서 모시는 분 말입니다!”
“아니, 정말 왕후, 그분은… 그분은 그저 폐하의 형님이 아니십니까! 이걸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아, 거참. 이 정도는 흠도 아닌데 무어 그러십니까. 비록 정식 책봉은 받지 않으셨지만 이곳은 폐하의 태도가 곧 지위가 된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모시자마자 떡하니 왕후궁을 내어주시고, 귀한 물건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바치시고, 또 그뿐입니까. 건국제에…….”
남자는 모른 척하지 말라며 사내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누가 보안이 철저한 왕후궁에서 온 관리가 아니랄까 봐 모른 척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러나 증거 앞에서는 뛰어난 거짓말쟁이도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소문을 하나씩 풀어놓을 때마다 사내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의아하기도 했다. 궐 내에선 이제 웬만큼 순진한 사람 외에는 ‘아! 폐하께서 정말 우애가 깊으시구나!’ 하고 넘어갈 이는 없었다.
말이 우애지, 어느 아우가 매일 형님과 석반을 함께 먹고 밤이면 모든 궁인들을 물리는 데다, 급한 일로 새벽에 자리를 비우실지언정 형님께서 깨실 때를 맞춰 다시 돌아가 곁을 지킨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당연한 일로 입씨름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남자가 흠흠 목을 고르며 다시 무게를 잡았다.
“우리끼리니 귀관도 눈치 볼 것 없이 왕후마마라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물음에나 답해 주십시오. 아주 중요한 문제란 말입니다.”
“두 분 사이는 왜 물으십니까.”
여러 번 되물어도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사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끝내 답답해진 남자가 목소리를 크게 높이며 애걸복걸 달려들었다.
“아, 그거야 당장 죽게 생겼으니 말이죠! 요즘 제가회의 분위기가 어떤지 아십니까? 안 그래도 싸늘하신 분이 이제는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하나하나 잡아 족치시는데, 어후, 무서워 황천길 갈 뻔했습니다!”
“그게 왜 와, 왕후 마마와 관련이 있습니까?”
“그것 외에는 연유가 없으니까요! 지난여름에도 무엇이 그리 아니꼬우셨는지 저희를 달달 볶았는데, 그때도 왕후궁에서 돌아오신 직후였단 말입니다. 이번에도 갑자기 이러시는 걸 보니 분명히 왕후마마와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그게 무슨…….”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폐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시려고 마 대로께서 사흘 밤낮을 새우며 일을 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윗사람께서 퇴궐을 하지 않으시는데 제가 어찌 안면몰수하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처음에는 순수한 물음이었던 것이 점차 감정이 격해지며 한탄으로 변해갔다. 사내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 얼굴은 곧 은은한 분노로 변해갔으나 남자는 더러운 사회생활에 눈물을 훔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새 싸늘해진 낯의 사내가 무섭게 뇌까렸다.
“그러니까 지금 폐하께서 애꿎은 화풀이를 하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꼭 애꿎은 것만은 아니….”
“사사로운 일에 흔들려서는 아니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고작 다퉜다고 멋대로 아랫사람을 핍박하다니. 책임감은 어디다 팔아먹고 진짜…….”
뒷말은 너무 작아 듣지 못했지만 사내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폐하께서 조목조목 짚는 부분이 모조리 트집인 것만은 아니었다. 저희가 덜 처리했거나, 미흡하게 마무리했거나, 귀찮아서 잠깐 미룬 일들이 한꺼번에 터져 원망의 말을 한 것뿐이지. 내용만 따지고 보면 부당한 일은, 아니 오히려 칭송받아야 할 일이었다.
다만 며칠째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게 서러워 잠시 한탄한 것인데……. 남자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변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사내의 주의를 다시 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땀을 한 바가지 흘렸을 때야 이 상황을 빠져나가게 해줄 구원자가 등장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상관을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저하, 아니, 허억, 대군마마께서… 여긴, 어쩐 일, 헉, 이십니까?”
그러나 저의 상관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숨을 고르기에 바빴다. 평소 드넓은 궐 내를 걷는 것조차 싫어하던 상관이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달음박질을 해서 오다니. 남자는 영문 모를 상황에 눈만 뒤룩뒤룩 굴렸다.
게다가 왕후궁 관리를 부르는 명칭 또한 이상했다. 대군마마라니! 대군이라 함은 적실 왕자를 뜻하는데, 우리 폐하께서 남몰래 적자를 낳으셨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고 폐하께 형제가 있다고 듣지도 못…….
잠시만. 폐하의 형님이라 하면……. 그 순간 사내는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런 미친! 내가 지금 뉘 앞에서 무슨 소리를 떠들어댄 건가!
사내가 경악을 하든 말든 관리, 아니 왕후마마는 태연히 마 대로를 맞이했다.
“너 보러 왔지. 잘 지냈어?”
“큼, 저야 늘상 같지요.”
누군가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든 말든 사내와 마 대로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겠지! 사실 마 대로께서도 부여 출신이 아니신가! 남자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감히 쳐다봐서도 안 될 분에게 궐 내 소문을 지껄이고 어깨를 퍽퍽 때리기까지 했다. 당장이라도 폐하께서 들이닥쳐서 혀와 손을 베어 가도 할 말이 없었다.
“대군마마께 예를 갖추시오. 그리고 자리 좀 비켜주겠소?”
다행히 협보가 눈치 빠르게 남자에게 권유했다. 제람은 그 즉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한 뒤 사라지는 남자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귀중한 정보를 물어다 준 것치고 겁만 먹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협보는 그러든 말든 둘만 남기가 무섭게 다급히 물었다.
“혹시 폐하와 다투셨습니까?”
“왜? 해가 못살게 굴어?”
협보는 입을 다물었다. 망설임 없이 돌아온 물음이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되묻는 분이 아니었는데.
정말 무슨 일이 있긴 단단히 있었나 보다. 협보의 굳은 얼굴에 제람이 사과하며 미간을 문질렀다. 예민하게 솟아있던 어깨가 조금 누그러졌다.
“부여에 다녀오는 일로 좀 싸웠어. 아니, 이걸 싸웠다고 말할 수는 있나…….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부여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온 거야.”
“……부여요? 정말 부여에 가실 거란 말씀이십니까?”
제람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협보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솔직히, 대신들끼리 모여 회의를 하던 도중 주몽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칠 때부터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뒷담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당사자의 등장에 혼비백산하건 말건 왕은 협보에게 다가와 야차 같은 얼굴로 당장 집무실로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내 형님이 거기에 있으니 그가 무어라 하건 네 앞날을 생각해 신중히 대답하라 했던가. 직접 찾아가지 않고 저를 찾아온 꼴을 보아하니 대판 싸우신 모양인데, 대군이 그곳에 계신 건 또 어찌 안 건지.
하지만 한편으론 ‘그’ 주몽이 모른다는 것이 더 이상하긴 했다. 대군께선 모르시겠지만 왕후궁 소속 관리 중 절반 이상이 훈련된 무사였다. 그중 절반은 기척을 숨기는 데 능한 자들이었고. 그의 형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읽은 책 쪽수까지 빠짐없이 주몽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두 분이 싸우신 덕분에 그의 몸과 정신이 고달픈 건 사실이었지만 협보는 심각한 불화일 거라 여기진 않았다. 앞뒤 볼 것도 없이 또 폐하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겠지. 그러나 뒤따라 나온 주몽이 어딘가 고통스러운 음성으로 겨우 덧붙인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만일 형님께서…. ……하신다면…….’
그때부터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어차피 저 개차반을 이 정도로 참아주고 사시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어. 별일 아닐 거야.’
그리 냉소적으로 되뇌면서도 몸은 저절로 뛰어 이곳까지 달려왔다. 만일 ‘그 사건’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아니, 그럴 일은 없다. 폐하께서 그리되게 놔두실 리가 없었다. 그러니 주몽도 그런 당부를 덧붙인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평소 과도할 정도로 그의 형님을 옭아매던 그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아무리 좋은 쪽으로 길을 틀려 해도 생각은 자꾸만 같은 곳으로 돌아가 맴돌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사태는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여라니. 이곳을 떠나시겠다는 말인가? 그런 거라면 폐하의 말씀이 이해가 간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 와중에 제람은 기름을 끼얹었다.
“나 좀 몰래 갈 수 있게 도와줘.”
“…어째서,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고, 아니, 그전에 왜…….”
“그게 좀 복잡한데……. 하아. 못된 심보로 그러는 건 아니고, 진짜 내가 계속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넘어가다간 해에게 좋을 게 하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제람이 머뭇거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대체 뭐가요? 협보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예상과 동떨어진 대답에 하마터면 멍청하게 대꾸할 뻔했다. 그가 보기에 태자가 우유부단하게 굴어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주몽이었다. 어린 시절 홀대받던 와중에 불고기 도시락까지 알차게 얻어먹지 않았는가.
하지만 태자는 진심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비통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원체 다정한 아이라 걱정이 많긴 했지만 일에서만큼은 똑 부러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감정에 휘둘려서야. 요새 나랑 좀 싸웠다고 주변 신하들에게 행패를 부린다며? 좀 떨어져 지내며 본인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해. 곁에 붙어 있어봤자 괜히 부추기기나 하지.”
아니,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묘하게 틀린 말 같았다. 짚으라면 ‘원체 다정한’부터 수십 개를 짚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협보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집을 나갔던 정신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다행히 자신이 생각하던 흐름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군께선 아직 폐하를 영영 떠날 마음이 없으신 듯 보였고 심지어 ‘개차반’을 갱생시킬 의지까지 보이고 계셨다.
이런… 거라면 괜찮지 않나?
위기감이 가시자 불충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급하게 숙인 고개 아래로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신하 귀한 줄 모르고 며칠 밤낮으로 굴리는 못된 왕을 잠시라도 엿 먹일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도울 수 있었다. 게다가 폐하께서도 뭐, 자신이 직접 하신 말씀이 있으니 뭐라 하진 못하실 거다.
일이 이 지경이 되니 주몽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제 안에서 제멋대로 뜯어지고 부서져 재조합되었다. 연이은 철야로 그는 이미 이성을 반쯤 잃은 상태였다. 협보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지금 한번 다녀오시는 것도 괜찮지요. 오이 형님과 함께 가시면 후에 폐하께서 아셔도 안전 면에서는 안심하실 겁니다.”
“오이는 바쁘지 않아? 그 휘하 무사만 몇 내어줘도 되는데.”
제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만류했다. 그러나 협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 귀한 목숨을 날리시려고. 욕 들어 처먹을 각오는 마쳤지만 목 내놓을 각오까지는 하지 못했다. 게다가 제법 좋은 핑곗거리도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설득했다.
“괜찮습니다. 오이 형님도 좀 쉬셔야지요. 요새 마음이 많이 복잡하고 시름이 깊어 보이던데 기분 전환 겸 다녀오는 게 그에게도 나을 겁니다.”
“그래…? 설마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제람의 얼굴이 단숨에 근심에 휩싸였다. 언제봐도 참으로 다정하신 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앞에서 바로 대군께서 원인이시라는 걸 말할 수 있을까.
협보는 오이가 열흘 전쯤 급한 일이 있어 폐하를 뵈러 갔다가 두 분이서 입맞춤을 하시는 걸 봤다고 죽어도 제 입으로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왜 대놓고 밖에서 접문을 하냐는 주몽을 향한 원망 반, 눈치도 없이 밤에 그곳을 왜 가냐는 오이를 향한 원망 반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그저 조금 심란한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그냥 말을 돌리고 말았다. 홧김에 냈다가 찢어져 돌아온 사직서를 붙잡고 술을 마시는 오이를 위로하느라 사흘 동안이나 되는 건국제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지만……. 모두가 그랬듯 이것은 오이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일이었다.
늦게 안 것이 죄지, 뭐. 내가 그렇게 언질을 줄 때는 무시하더니. 누구보다 이르게 진실을 알아버려 고통을 받았던 자의 소심한 이죽거림이었다.
***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드시고 싶은 거라든가…….”
“가람아, 그만. 충분해. 너도 얼른 먹기나 해.”
제람은 서둘러 달달한 꿀떡을 집어 마주한 입에 쏙 집어넣었다. 말을 이으려던 가람의 입이 갑작스러운 침입물에 의해 막혔다. 그러나 그마저도 좋다는 듯 표정이 금세 허물어졌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올걸. 상황상 힘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제람은 오늘 이른 아침에 부여에 도착했다. 마침 주몽은 소서노와 함께 지방 순찰을 떠나 있었다. 하늘이 도우신 건지 타이밍도 딱 제람이 부여로 떠날 채비를 비밀리에 마친 다음 날이었다.
순간 주몽이 제 계획을 알고 있나 의심했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얌전히 순찰을 떠났을 리가 없었다. 한참이나 날 말없이 바라보며 서 있던 모습이 마음에 걸리지만……. 출장 직전이었고 아직까지 화해를 하지 못했으니 그런 거겠지.
평소라면 우울한 얼굴을 단숨에 끌어안고 토닥거리며 달랬겠지만 고작 며칠 전에 한 결심을 시작부터 무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외출은 궁극적으로 해를 위한 것이니까.
혹시 몰라 간단한 편지까지 남겼으니 괜찮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애써 떠나왔지만 고운 얼굴이 흐려져 있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묵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을 문지르는 걸 가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훑었다.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지요?”
“……없다니까. 정말 너 보고 싶어서 그냥 온 거야.”
“그런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연통도 없이 오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제야 안심하고 웃는 가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람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에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가람이 원해 이어받은 왕위라지만 어떻게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본인을 위한 삶을 되찾아가는 동안에도 제람의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가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람은 내친김에 동생의 앞에 다과를 잔뜩 끌어 놓았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거 맞나? 못 본 사이에 살이 빠져 있었다.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가람이와 삼시 세끼를 함께 먹으며 직접 감시하든가 해야지, 이러다간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쓰러지겠다. 제람은 혀를 차며 남몰래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정말 그리했다. 그는 동생을 아침부터 밤까지 알뜰살뜰 살피며 쌓인 회포를 풀었다. 가람 역시 형님이 잠든 밤에 국정을 처리하면 했지, 낮 동안은 형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그놈이 형님을 괴롭히진 않습니까? 이제 막 자리 잡은 나라인데 편안하게 지내실 환경은 마련해 주덥니까? 정말 아무 일 없이 그저 저를 보러 와 주신 게 맞습니까? 아니, 사실은 그 성질 더러운 놈이 형님을 속여먹고 멋대로 일을 처리하려 들어 도망 오신 거지요?”
“……그저 너를 보러 왔다니까. 정말로.”
“그렇다면 몹시 기쁘지만…. 설령 그놈이 형님을 괴롭히거든 언제든 돌아오십시오. 아니, 아예 오신 김에 궁을 내드릴 테니 그냥 돌아가지 마시고 여기서….”
대부분이 밀린 대화, 아니 추궁… 혹은 뒷담이었다. 그 기나긴 오해를 풀기까지 이틀이 걸렸다.
그래도 지치지 않는지 가람이 밤늦게까지 그를 붙잡고 있으려는 것을 오이가 강경하게 모셔서 나갔다. 제람은 오랜만에 형제끼리 도란도란 잘 생각도 있었건만 오이가 손까지 덜덜 떨며 말리는 통에 말도 못 꺼내 봤다.
심경에 변화를 겪었다더니 이전과 다른 부분들이 몇 가지 보였다. 게다가 종종 묘하게 시름에 잠긴 눈으로 날 바라보길래 할 말이 있나 싶었지만 막상 또 물어보면 고개만 젓고.
“해에게 물어봐야 하나…….”
심란한 마음에 잠자리를 벗어난 발길이 저절로 익숙한 곳을 향했다. 부여에서 지내던 시절 자주 다녔던 호수 근처였다. 기분이 가라앉은 날이면 저 앞에 앉아 하염없이 물속을 바라보았더랬다. 본능적인 이끌림에 몸을 내던지고 싶은 것을 그리움으로 치부하며.
그러나 지금은 그 드넓던 호수가 모조리 메워져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신에게 영혼을 내주자마자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호수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안타깝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라도 내 죽음을 견뎌야 했을 가람이를 생각하니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형님.”
“어?”
그 순간 귓가에 낮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곧이어 냉기가 얇은 내의를 뚫고 들어왔다. 제람은 반사적으로 팔을 벌려 그를 파고든 덩어리를 껴안았다. 당황 속에서도 낯익은 체취와 부피감이 그를 익숙하게 감쌌다. 거기에 함께 느껴지는 빳빳한 옷감과 바람 냄새가…….
잠시만. 그제서야 그가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해야?”
제람은 서둘러 그를 밀어내려다 실패했다. 무겁게 내리누른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조금도 비키지 않았다. 제람은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 뒤에야 푹 잠긴 목소리가 품에 잔뜩 짓눌린 채 흘러나왔다.
“……다시는….”
“…….”
“다시는, 그렇게 편지만 남겨두고 떠나지 마십시오.”
제람은 그대로 몸을 굳혔다. 다시 만나면 몰래 부여로 온 것에 대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단단히 원망을 들을지도 모르지. 최악은 처음 말을 꺼냈던 그날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일을 덮고 태연하게 자신을 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얇은 옷 너머로 뜨거운 습기가 고스란히 넘어왔다. 고인 물기의 정체가 무엇이든 제람이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춥고 깊은 밤에 땀이 쏟아질 정도로 말을 달려오는 것이든, 스스로와의 마지막 타협으로 무심코 남긴 편지에 드러난 오랜 구덩이 속 썩은 기억이든.
쉬지 않고 말을 달린 몸에서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가 찬 밤 내음과 뒤섞여 낯선 냄새를 냈다. 제람은 참지 못하고 그의 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너는 아직도 그 기억에 사로잡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나.
타인의 손을 빌려 행한 자살은 제람에게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새에게 들려 보낸 편지는 내 죽음을 부정하던 그에게 무엇보다 증오하는 동시에 소중한 마지막 흔적이었을 것이다.
너에게 편지는 그저 죽음을 알리는 수단이 되어버렸구나.
제람은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매번 가람이에게 쓰는 편지를 질투하는 그에게 한 번은 ‘그럼 너에게도 써줄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지나가는 말에 주몽은 눈에 띄게 몸서리를 치며 거절했었다. 유난한 반응에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한다며 넘겼던 기억이 났다.
사실 너는 그날의 기억을 되짚고 있었던 걸까. 제람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미안해. 미안해, 해야. 내가 그러면 안 됐던 건데…. 나만큼은, 나는 정말 그래선…….”
“…괜찮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이렇게 제 앞에 계시니…….”
떨리기 시작한 어깨를 주몽이 조심스럽게 감쌌다. 상처받은 것은 본인이면서 언제나 나를 더 우선했다.
너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내가 모질게 내쳐도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으며, 활이 멋있다는 말에 검보다 화살을 먼저 잡았다. 무술 대회에서 왕의 눈에 들어 출세할 수도 있는 순간에 내 말만 믿고 기회를 걷어찼다. 그 뒤로도 너는 언제나…….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했을까. 소서노가 말한 것처럼 그가 내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붙여서? 관리가 털어놓은 것처럼 나와 얽힌 감정의 찌꺼기를 애꿎은 자들에게 화풀이해서?
모두 아니었다. 이곳까지 떠나오게 만들었던 답답한 기분에 조금씩 갈피가 잡혔다. 제람은 눈앞에 들어찬 단단한 어깨를 밀어냈다.
“차라리 화를 내. 왜 말도 없이 갔냐고 날 비난하고 다신 그러지 말라며 언성을 높여. 하다못해 떠난 이유라도 물어봐.”
다시 담담해진 그의 말투를 비난하고, 도무지 그가 드러내지 않는 감정 대신 주몽의 옷깃을 쥐어뜯었다.
“형님.”
“내가 네 곁에 있는다는 게 그 어떤 잘못이든 덮을 수 있는 과분한 은혜인 것처럼 굴지 말라고!”
제람은 두려웠다. 주몽의 머릿속에 자신밖에 없는 것이.
적실 곳을 잃은 눈물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기어코 범람해버린 파도가 흔적도 없이 다져진 호수 대신 흙을 적셨다. 제람은 고해성사를 하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깊숙하게 숨겨 잊었던 죄를 털어놓았다.
“…난 무서워. 네 삶에서 네가 최우선이 아닌 것 같아서. 그 가장 중요한 자리를 내가 빼앗아버린 것 같아서…….”
주몽이 턱을 당기며 눈을 크게 떴다. 당혹스러움이 여실히 느껴지는 손짓으로 제람의 손목을 붙잡았다.
“있지도 않은 걸 어떻게 빼앗아 가십니까? 원래부터 제게 스스로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리 따위는 없었습니다. 모조리, 태어났을 때부터 형님을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제람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말하면 주몽은 부정할 테지만 그의 유년기를 빼앗은 건 제람이었다.
유년기뿐일까. 주몽이 결국 부여를 떠날 때까지 그의 인생을 만들었다. 교묘히 운명을 조작하고 작은 마음을 부정하고 타오르는 의지를 외면했다. 어찌 보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틀 안에 가둬버린 것이다. 이것은 원인이 무엇이든 명백한 자신의 죄였다.
그래서 그는 종종 주몽이 저 없인 살지 않을 것처럼 굴 때마다 가슴 한편이 선뜩했다. 이제는 저보다 훨씬 크지만, 아직도 종종 작게만 느껴지는 아이의 세상에 스스로가 없는 것이 모두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제람은 필사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몸짓으로 주몽의 팔을 붙잡았다. 이미 잡힌 손목이 돌아가 서로가 서로를 붙잡은 형국이 되었다. 그 우스운 모양새를 한 채 연신 침을 삼켰다. 눈물로 인해 이미 입 안은 축축했지만 목이 자꾸 마르고 가슴이 턱 막힌 것 같았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저조차도 몰랐던 욕망이 강하게 치달아 끝내 간절해졌다. 제람은 이 마음이 왜곡되지 않고 온전히 전달되길 빌며 천천히 입을 뗐다.
“네 삶에서 나 외에 다른 것들도 중요해졌으면 좋겠어.”
주몽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나 외에도 그리워할 것이 생기고, 나 외에도 위로받을 곳이 생기고, 나 외에도…… 네게 살아갈 의지가 있었으면 좋겠어.”
네게 즐거움을 안길 취미가, 마음을 터놓을 친우가, 믿고 일을 맡길 신하가 있었으면 좋겠다. 초록 들판에 핀 작은 풀꽃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느끼고, 흘러가는 구름을 눈에 담다 별이 쏟아지는 밤이 되고 마는 여유가 하루를 채웠으면 좋겠다.
그제야 제람은 줄곧 혼란하던 마음의 마지막 갈피를 찾았다.
나는 네가 나 때문에 하루를 망치는 것이 싫었나 보다.
“형님께선 정말,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주몽이 눈매를 찡그리며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검은 다정함과 섞여 기묘한 그늘을 만들어냈다. 주몽은 제람이 이럴 때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가 역겨웠다.
마음을 감추고 듣기 좋은 말을 포장해 건넬까. 눈물을 떨어뜨리고 어깨를 움츠리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은 그가 제일 잘하는 짓이었다. 더러운 겉가죽을 벗기고 깨끗한 눈물로 씻긴 말만 드리면 그의 형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를 안아줄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너무도 지치고 공허했다. 자신이 그랬다고 하면 아마 한 사람 빼고 모조리 믿지 않을 테지만, 그 한 사람이 곁에 없던 며칠 간은 그야말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심지어 그의 ‘버림’은 자신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 이 일에 제람의 탓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처럼 말을 고르고 싶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신의 피는 오만하며 남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 주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하게 속삭였다.
“제 삶에서 형님 외에 다른 것들도 소중해지길 바란다고 하셨습니까?”
“…….”
“저는 형님의 삶에서 저 외에 다른 것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제람의 다정함에 색채가 있다면 분명 붉은색일 것이다. 평소에는 따스하게 모두를 감싸주다가 뛰어들면 결국엔 흔적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는 불을 닮은 색.
그리고 그는 얌전히 불을 쬐는 방법 따위는 몰랐다. 온몸으로 그를 덮어 꺼뜨려 남은 불씨까지 재가 되어버린 내 몫이 될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 불은 너무도 뜨거워서…….
“그걸로 네 불안이 사라진다면. 그래.”
“…….”
“내 삶을 너로 채울게. 너는 네 삶의 구석이라도 좋으니, 다른 것들을 돌아봐 줘.”
……몸을 내던진 지 오래인데도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람의 손이 멍하니 굳은 그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뻣뻣한 목을 쓰다듬고 찬 바람의 냉기가 옮은 뺨을 문질렀다. 그 손길에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영문 모를 눈물이 딱 두어 방울 낙하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다정할 수가 있나. 나는 이미 조목조목 타들어 가 당신에게서 빼낼 마음마저 이미 재가 된 지 오래인데.
“너는 종종 불안하고 초조하게 날 바라봐. 내가 또 떠날 것만 같아?”
제람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돌아올 곳은 너뿐이라는 걸 어떻게 해야 네가 믿을까.
네 하루에는 평온함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내가 떠날까 불안해하지 말고, 손편지 하나가 불러온 어두운 기억에 때때로 잠식되지 않고. 네가 꽃과 물결과 바람으로부터 즐거움을 찾는다면.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웃음을 닮는다면.
그리하여 결국에 네 삶에 여유가 생기고 불안 대신 믿음이 들어찬다면.
“그땐 기다림조차 매 순간 기대로 바뀌어 반짝일 거야…….”
불을 닮은 다정함이 어김없이 그를 태웠다. 주몽은 낮게 탄식했다. 당신은 그때도 이랬다. 내게 함께 나라를 세워 가자 해놓고 손을 뻗을 수 없는 죽음으로 떠나버렸다. 처음으로 스스로의 결정 대신 남에게 믿음을 바친 날, 세상 이상의 것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전부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 변함없는 그의 다정함의 티끌만…. 내 하루가 자신으로 가득하길 바라기보다 이름 모를 꽃과 물결과 바람으로 장식되길 바라는 그의 마음 정도만. 딱 그 정도만 다시 믿는다면.
“……돌아가면 저에게도 편지를 써주십시오.”
놀란 제람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살짝 벌렸다. 주몽은 끌어안은 몸이 떨어질세라 그의 허리에 팔을 휘감아 강하게 당겼다. 이것은 그저 아직까지도 버리지 못한, 핏물 밴 그 편지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그 편지가 그의 형님을 찾아올 힘을 기르게 해준 것처럼, 이번 편지는 그가 이제람과의 하루를 기대할 힘을 기르게 해줄 것이라는 걸.
반동으로 파묻힌 고개가 작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산들바람 같은 웃음이었지만 잔잔하던 불길을 타오르게 하기엔 충분했다. 주몽은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그가 또다시 나를 태우는구나. 흔적도 없이. 흔적도 없이…….
***
열.
그 망할 것들이 결국 나를 다른 인간에게 맡기고 떠났다. 깐깐하고 예민하게 생긴 이 인간은 시종일관 종이와 붓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다행히 도령이 당부하고 가서인지 아침마다 녹차 물은 손수 챙겨주지만, 그 이외에는 나를 궁인에게 맡겨두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단 말이다.
아무리 도령이 ‘협보야, 아침마다 들여다보기만 해줘. 다른 건 궁인들이 챙겨줄 거야.’라고 했어도 막상 나를 보면 성심성의껏 모셔야 하거늘!
“자라야. 너 장가는 갔냐?”
[…….]
“갔어도 불쌍, 못 갔어도 불쌍하구나. 만일 갔다면 영락없이 생이별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니.”
심지어는 이런 무례한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감춰야 하지만 않았다면 속사포처럼 욕을 늘어놓았을 거다.
그러나 나를 붙잡고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이놈은 어딘가 우울한 기색이었다. 나는 결국 그에게 다가가 그놈의 무릎 위에 머리를 턱 얹었다. 도령에게도 가끔씩만 해주는 건데 좀 쓸쓸해 보였어야지.
아니나 다를까 그놈이 감동한 얼굴을 했다. 그는 내 등껍질을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참 이상도 하지. 나는 지금껏 폐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태자 저하를 놓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었다. 설령 그분이 또다시 간절히 원하신다 해도 말이야.”
아무렴, 주몽 도련님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폐하께서 내게 그러시더구나.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디로든 보내 드리라고.”
이 말에는 나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그간 행동을 보면 전혀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내게서 그런 기색을 읽어낸 것인지 그놈이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붙잡지 않냐 여쭈니 이젠 붙잡으시는 게 두려우시단다. 믿어지느냐? 수많은 전투의 선봉에 서서 화살 하나로 적군의 장군 셋의 숨통을 끊어놓으시던 분이다. 그런데 겨우 가지 말라는 말, 혹은 편안히 가시라는 한마디를 꺼내지 못해 남의 입을 빌리는 꼴이라니.”
[…….]
“고작 과거에 그분을 붙잡았을 때 돌아온 것이 자결이었다는 기억 하나 때문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곧 피식 웃으며 낮게 깔린 공기를 떨쳐낸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아서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그 씁쓰름한 물이나 먹거라. 몇 밤만 더 자면 네 주인께서 돌아오실 거다.”
누가 누구의 주인이라고. 내가 순전히 호의로 도령을 돌보는 것뿐이었다. 나는 관대하게 코웃음으로 예민한 인간의 말을 넘겨 주었다.
그러나 이놈의 우울이 내게 넘어온 것인지 이번에는 내 기운이 쭉 빠졌다.
……항상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도령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길래 저들은 평생토록 붙어 있을 건가 보다 싶었는데.
그래도 주몽 도련님이 모르는 게 있다면 도련님이 도령을 보내려 해도 이번엔 도령이 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간 내가 얼마나 어르고 달랬는데도 빈말로도 나랑 같이 가겠다고 하질 않는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절대로 주몽 도련님에게 말해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툭하면 도령을 방으로 끌고 들어가 살을 쪽쪽 빼먹고 돌려보내는 분이 뭐가 어여쁘다고!
그래도…… 뭐, 아주 나중에 주몽 도련님이 도령이 떠날까 두려워하면 넌지시 언질을 줄 의향 정도는 있었다. 도련님이 그러면 도령도 슬퍼할 테니까.
정말 딱 그뿐이다! 진짜라니까?